소설리스트

화산귀환-509화 (507/1,567)

509화.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4)

“이 찰거머리 같은 놈!”

빙궁의 장로인 이벽(李闢)이 분기탱천하여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 앞을 막아선 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둘러 이벽의 발을 묶어 둘 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앗!”

이벽의 손에서 장력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실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지만, 상대하는 이의 입장에선 그저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장법에 불과했다.

상대하기 어려울 리가 없었다.

“이 중원의 애송이 놈!”

검을 한차례 휘둘러 장법을 맞받아친 백천은 어두운 눈으로 이벽을 바라보았다.

‘여 장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

빙궁의 장로라고 해서 긴장했건만, 이자의 실력은 여사혼의 반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니, 장로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였다.

그가 지금껏 보아 온 일파의 장로들은 이처럼 나약하지 않았다. 설천상이 지금 무시무시한 무위를 뿜어내는 것에 비해, 이들의 장은 날카롭지도 않고 정교하지도 못했다.

‘권력에 빌붙어 스스로를 갈고닦지 않은 이는 이리되어 버리는 거로군.’

물론 이자들은 지금의 백천보다 강하다.

하지만…….

“이쪽은 강한 놈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지는 데 이미 이골이 났다고.”

백천이 기합을 내지르며 이벽의 중심선(中心線)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화려한 검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싶은 욕심이야 당연히 있다. 그 역시 무인이니까. 하지만 백천은 지금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믿고 버티는 것.

청명이가 하려 드는 일을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끄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천은 들뜨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빌어먹을 놈!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계속되는 이벽의 고함에도 그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시답잖은 말에 대답해 줄 여력까지 모두 검 끝에 집중시켰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가 해야 할 것을 해낸다면, 남은 건 청명이가 어떻게든 해 준다.

만일 그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상황이 온다면, 백천은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집중해야 했다.

그는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한없이 가늘고, 한없이 날카롭게. 누군가 건드리면 부러져 버릴 만큼.

이벽을 상대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다른 사형제들을 살펴야 하므로.

‘사매는?’

살짝 시선을 돌리자 역시 빙궁의 장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유이설이 보였다.

순간 밀려든 섬뜩함에 그는 살짝 몸을 떨었다.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집중력이 느껴졌다. 그 누구도 유이설을 흔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백천 역시 각오를 다졌건만, 그녀에 비하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반대쪽에선 조걸과 윤종이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몰아치고 있었다.

카각! 카가가각!

두 사람의 검이건만 마치 한 사람이 쓰는 쌍검처럼 가열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백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이라고 해서, 윤종이라고 해서 혼자만의 힘으로 적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지금 백천이 상대를 한껏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그들 역시 홀로 서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역량을 한계까지 시험해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내리누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무겁군.’

잘난 사매와 사질을 두었다는 건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저들이 이렇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그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백천은 그 결코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다.

성장이란 결국엔 이겨 내는 것. 압박이 없다면 성장도 없다. 저들은 그를 나아가게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아미타불!”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혜연의 권력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아마 지금 혜연의 곁에서 당소소가 챙겨 온 암기를 적들에게 난사하고 있을 것이다.

‘분하겠지.’

다른 화산의 제자들처럼 검만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게.

‘괜찮다. 너도 더 강해질 테니까.’

백천은 이제 상대를 섬뜩하게 만들 만한 집중력으로 이벽을 응시했다.

이벽의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

‘대체 이놈들은 뭐냐?’

그래 봐야 어린놈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빙궁이라면 이제 겨우 무력대의 신입이나 될 나이였다.

그런데 그놈들이 뿜어내는 예기와 집중력은 이벽의 상식을 깔끔하게 뭉개 버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어린 나이에 이만한 노련함을 지닐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중원 놈들은 다 이런 건가?’

그게 아니면 이 화산이라는 놈들이 특별한 건가.

‘빌어먹을.’

상황이 점점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번 떨어진 사기는 쉽사리 복구되지 않는다. 반면 여사혼이 이끄는 반역의 무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기를 높이고 있었다.

당연하다.

실력 이상으로 상대를 파죽지세로 몰아치고 있는 이들의 사기가 오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라면 이긴다고 해도 피해가 너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반격의 실마리를…….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궁주니이이이이이이임!”

“아아악! 궁주님!”

처절한 비명 소리가 그의 귀를 꿰뚫었다. 사색이 된 이벽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쿨럭…….”

입에서 선지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명치를 꿰뚫고 파고든 검이 내장을 휘젓는 바람에 피가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중이었다.

“쿨럭.”

기침하며 한차례 피를 토한 설천상은 자신의 배에 틀어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주르륵.

검신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그가 아닌 청명의 피였다. 맨손으로 검 날을 움켜잡은 청명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검을 타고 설천상의 배에 떨어졌다.

‘……제정신인가?’

저건 음한기공을 두른 그의 손마저 깎아 낼 정도의 명검이었다. 아무리 내력을 담는다고 해도 아차 하는 순간에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서로 목숨이 오가는 그 급박한 순간에 맨손으로 검 날을 움켜잡고 그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끄으윽…….”

배가 뚫린 고통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흐아아아악!”

마지막 힘을 모조리 끌어모은 설천상이 검 날을 쥐고 배에서 뽑은 뒤 힘껏 밀쳐 냈다. 눈밭에 닿은 무릎 사이로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날카로운 날에 베여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등이 눈밭에 처박혔지만 그 어떤 고통도,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신 피를 게워 내면서도 그는 몸을 뒤집었다. 기듯이, 구르듯이 바닥을 긁더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전신이 덜덜 떨렸다. 눈앞이 순간순간 아찔해지며 의식이 멀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와중에도 똑똑히 보았다.

검을 바로 잡으며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째서냐.”

피거품을 문 설천상이 중얼거렸다.

이 노화를 풀지 않고서는 차마 쓰러질 수도 없었다.

“왜……. 왜 내가 너 따위……에게…….”

“퉷.”

청명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곤 손으로 코와 입을 슥 문질러 닦았다.

“약하니까.”

“…….”

“이유야 간단하지. 너는 약하니까.”

설천상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약하다고?”

“그래.”

청명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차게 말했다.

“전대궁주가 있을 때는 제 힘으로 대항해 본 적이 없고.”

“…….”

“그 자리에 오를 때도 남의 손을 빌렸지. 결국 너는 단 한 번도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이 없는 거야.”

피에 젖은 청명의 이가 드러났다.

“그래서 네가 애송이지.”

“흐…….”

설천상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내가 애송이라고? 내가? 으하하하하하핫! 내가?”

혈관이 터져 버린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네놈들이 뭘 아느냐! 네놈들이! 안락한 중원에서 살아온 네놈들이 뭘 알아! 이 척박한 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로지 서로 뺏고 뺏을 수밖에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걸 너희가 뭘 안다고…….”

파아아아앗!

그 순간 청명의 몸이 빛살로 화해 설천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

말을 멈춘 설천상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

이내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실선처럼 보이던 그것은 점점 선명해졌고, 잠시 후 설천상의 목이 서서히 잘리며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던 청명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아니. 목이 잘릴 때쯤에 알게 될 거라고 했던가?

‘아무려면 어떠냐.’

죽은 이는 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욱신.

뒤늦게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무척 짧은 싸움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격렬했다. 검기에 베이고 장력에 가격당한 상처에서 말도 못 할 고통이 터져 나왔다.

‘나약해.’

저런 놈을 상대로도 이만한 도박을 해야 한다. 승부가 조금만 길어졌더라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저자가 아닌 청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승리했다.

승부를 가른 차이는 단 하나.

설천상은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이 없는 이고, 청명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던 이라는 점. 그 경험의 차이가 생사를 갈랐다.

저벅. 저벅.

터덜터덜 걸어간 청명이 바닥에 떨어진 설천상의 머리를 주워 들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상황을 믿지 못했는지, 설천상은 부릅뜬 눈을 마지막까지도 감지 못했다.

청명은 그 머리를 움켜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 궁주님…….”

“궁주님이…….”

빙궁의 무사들이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청명과 궁주의 목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설천상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이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주르륵.

코에서 흐른 피를 무심하게 닦아 낸 청명은 가만히 전장을 바라보았다. 피와 죽음이 휘몰아치던 전장에 빠르게 정적이 번져 나갔다.

정신없이 싸우던 이들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정적에 놀라 몸을 멈추었다. 들끓어 오르던 전장은 이윽고 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전율했다. 지금 이 순간 전장의 모두가 오직 청명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이 통하지 않는 곳.

수많은 수하들을 이끌고 싸울 수도 없는 곳.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청명은 오직 자신의 검 하나만으로 이 전장을 완벽히 지배해 버렸다.

청명은 손에 들고 있던 수급(首級)을 앞으로 집어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따르다가 그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멈추었다. 그렇게 잠시 고정되었던 시선들이 다시 청명에게로 향했을 때, 그 속엔 숱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청명의 입에서 단호하고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궁주는 죽었다.”

“…….”

“의미 없이 더 싸우고자 하는 자는 나서라. 내가 상대해 주지.”

빙궁도들을 노려보는 청명의 전신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누구 한 명 나서기는커녕, 청명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설천상의 목이 잘린 이상, 이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 오로지 설소백만이 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니까.

설천상을 잃은 순간 그들의 전쟁은 끝난 것이다.

빙궁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는 그들이 아닌 머나먼 중원에서 온 이방인의 손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결판나 버렸다.

청명의 시선이 한곳에 가 닿았다.

움찔.

그 눈을 마주한 여사혼은 덜컥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무기를 버려라! 투항하는 이는 벌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의 망설임이 군중을 휘감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여사혼이 쐐기를 박았다.

“새 궁주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도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것이냐?”

벼락과도 같은 호통이 터져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한이명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설소백에게로 향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선 아이를 보는 순간 빙궁도들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챙.

채앵.

무기가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털썩. 털썩.

그리고 저항하던 빙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은 입에 다시 고인 피를 뱉어 내고 피식 웃었다.

“싱겁긴.”

하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이렇게 싱겁지 않을 테니까.

청명의 시선이 저 멀리 저무는 해에 가 닿았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이제 더없이 익숙한 이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제 너희 차례야.’

마교를 떠올리는 청명의 입가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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