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08화 (506/1,567)

508화.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3)

“……애송이?”

베인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끈거려 왔다.

하지만 상처가 주는 고통 이상으로 설천상을 분노하게 한 것은 청명의 저 한마디였다.

애송이?

지금 누가 누구에게 애송이라 했는가?

“이…… 개 같은 놈이!”

눈이 뒤집힌 설천상이 끝내 체면을 벗어던졌다.

빙궁의 궁주로서 늘 체통을 지키려 노력해 왔건만, 저 어린놈의 말 한마디는 그의 이성을 아예 뒤집어 버렸다.

애초에 저 중원 놈이 지금 그의 앞에 멀쩡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는 분노 속에 그는 끓는 듯한 노성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아아앗!”

그의 양손에서 새하얀 장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쩌저저적!

어마어마한 한기가 발밑에 깔린 눈조차 얼려 버렸다. 그 한기를 고스란히 품은 장력이 전면을 가득 메운 매화검기를 향해 발출되었다.

콰콰콰콰콰!

마치 눈사태가 꽃밭을 뒤덮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이만한 장력과 검기가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도 않을 만큼 웅장하고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내 거대한 폭음과 함께 꽃과 눈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헉!”

“피, 피해!”

궁주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던 빙궁의 무사들은 사방으로 튕겨 나오는 검기와 장력의 파편에 기겁을 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잠시 후.

충격이 가라앉은 그 자리에서, 검을 늘어뜨린 청명이 서늘한 눈으로 설천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더없이 싸늘해야 했을 설천상은 타오르는 용암 같은 노기를 실어 그런 청명을 노려보았다.

설천상은 천천히 얼굴에 난 긴 자상을 손으로 훑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빨리 끝낸다고 했느냐?”

으득으득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말하는 사이사이 추임새처럼 흘러나왔다.

“네까짓 게 감히?!”

쿵!

그의 발이 진각을 내리밟았다. 얼어 있던 땅이 으적으적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겨우 그 실력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도 청명의 입가는 가소롭다는 듯 뒤틀렸다.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는 거야.”

물론 설천상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눈에 청명은 결코 그보다 강하지 않을 테니까. 객관적으로 무위를 비교하면 누구라도 청명이 아닌 설천상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빙궁의 궁주 자리를 찬탈했다고 해서 설천상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마교를 등에 업었다고 한들 지금까지 빙궁을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

‘거기까지.’

애송이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였다. 승부의 결과가 실력대로 나올 거라 생각하는 것.

“하나 미리 충고해 주지.”

청명이 우습다는 듯 설천상을 보며 툭 내뱉었다.

“이건 비무가 아니야.”

그리고 돌연 청명의 몸이 섬전처럼 설천상을 향해 쏘아졌다.

카아아아아앙!

머리 바로 앞에서 검을 막아낸 설천상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각. 가가가각.

음한기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한철보다 단단해진 그의 피부가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이, 이 검은 대체 뭐냐?’

검에 어린 검기도 무시무시했지만, 예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설천상이 난생처음 겪어 보는 날카로움이었다.

주르르륵.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피가 새하얀 검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톡, 톡 하얀 땅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설천상은 이를 보고도 검을 밀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콱 움켜잡았다. 아니, 움켜잡으려 했다.

하지만 막 그가 힘을 주려는 순간 손안의 검이 빙글 회전하더니 손바닥을 베어 내고 빠져나갔다.

설천상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허를 찔렸다?

아니면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다.

지금 청명은 그가 하려던 바를 한발 앞질러 차단했다. 그러니 다음 수가 바로 나오지 못할 수밖에.

“이노오오옴!”

설천상이 멀쩡한 좌수를 뒤로 쭉 빼냈다.

하나 그 순간.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에서 쏟아진 수십 개의 검영이 일제히 설천상의 왼쪽 팔꿈치를 향했다. 그 기세에 감히 팔을 뻗을 엄두도 내지 못한 설천상은 기겁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러나 상대가 물러나는 걸 그리 쉽사리 허할 청명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 멀어지는 설천상을 향해 청명이 비조처럼 쏘아졌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서늘한 눈빛은 오로지 적의 목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설천상은 심장이 단번에 얼어붙는 듯한 섬뜩함에 얼굴을 굳혔다.

쇄애애액!

빠르게 날아든 청명이 몸을 반쯤 굽히느라 앞으로 튀어나온 설천상의 발을 가로로 그어 냈다. 재빨리 다리를 회수했지만, 발목 앞쪽이 살짝 베이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빙글.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청명이 그 반동을 실어 그대로 설천상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처음과 결이 같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뒤로 물러나느라 무게 중심이 빠져 버린 설천상은 똑같은 내려치기를 받아치지 못했다.

쿠웅!

그의 몸이 눈밭을 나뒹굴었다.

“궁주니이이이임!”

“세, 세상에, 궁주님이!”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천상이 누구인가?

궁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북해 최고의 고수로 명성을 떨치던 이다.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 무학을 익히지 못해 전대 궁주에게는 비견되지 못했지만, 무학의 재능만을 따지자면 전대 궁주를 앞질렀던 사람이 바로 설천상이었다.

이제는 빙궁주의 비전 무학마저 익혔을 테니, 명실공히 빙궁 최고의 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중원의 젊은 무인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다 못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넋을 놓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큭!”

설천상은 바로 몸을 일으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청명은 땅을 차려던 발을 천천히 내려놓고 웃었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군.”

어설프게 시간을 끌었다면 청명이 단숨에 달려들어 목에 검을 박아 넣었을 것이고, 설천상도 그 사실을 알기에 몸을 굴려서라도 자세를 바로잡은 것이었다.

“……너는 대체…….”

설천상의 눈은 경악이 휘몰아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강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단한 검기가 그의 장력을 깨부순 것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를 농락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무언가를 하려 들 때마다 청명의 검은 언제나 한발 앞서 그의 투로를 먼저 점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이 좋고, 감각이 좋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닐진대, 대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가 더 강하다. 분명 설천상이 더 강하다.

그런데 왜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단 말인가?

어째서?

“약해 빠졌군.”

청명의 조소 어린 목소리에 설천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야.”

하지만 청명은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쓰게 웃었다.

실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예전의 청명이었다면, 저놈의 목을 베는 데 삼 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몸으로 실행할 수 없는 답답함이 청명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또 한편.

‘강호는 약해졌군.’

예전의 빙궁주는 저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청자 배와 명자 배를 잃은 화산이 무학을 잃고 몰락했듯이, 다른 곳들 역시 문파를 이끌고 무학을 전수해야 할 쟁쟁한 고수들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필사적으로 복구했다지만, 마교와의 전쟁이 남긴 상흔을 쉽사리 완벽하게 복구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수의 수야 과거와 어느 정도 비견 가능할지 모르나, 질적인 측면에서는 과거와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빙궁뿐만이 아니다.

당가를 포함하여 다른 문파들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로는 한동안 모두가 평화에 잠겨 살지 않았던가.

‘우습지.’

그가 목숨 던져 만들어 낸 평화가 이들의 치열함을 앗아 갔다니 말이다.

스릉.

청명이 가볍게 검을 떨친 후 치켜들었다. 예리한 검 끝이 햇살에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큭!”

장(掌)을 장기로 삼는 이와 검을 장기로 삼는 이가 싸운다면 그 승부는 거리에서 갈린다. 권각을 쓰는 이는 어떻게든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려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청명과 근접하는 것이 더없이 위험하다는 판단하에 몸을 뒤로 띄워 올린 설천상은 양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심혼을 얼릴 듯한 백색의 음한기공이 서리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기운이 닿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파고들었다.

주변이 모두 빠르게 얼어붙어 갔다. 북해빙궁이 세상에 자랑하는 음한기공이 마침내 제 위력을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슴 앞으로 양손을 모은 설천상이 두 손을 한 번에 앞으로 힘껏 뻗었다.

“죽어라아아아앗!”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기세로, 순백색의 기공이 청명의 전면을 향해 쏘아졌다.

빙백신장(氷白神掌).

북해빙궁주의 성명절기이자, 저 중원에서마저 이름 높은 빙궁 최고의 무학이었다.

살을 엘 듯한 한기가 주변에 휘몰아쳤다.

그 앞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무엇이든 참혹하게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청명의 눈빛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빙백신장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스스슷.

검이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렀다. 새하얀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 검기가 한 줄기씩 뿜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검기가 매화의 형상을 그려 내었다.

얼음을 녹인 봄이 만산에 매화를 피워 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개화(開花).

그건 또한 태동(胎動).

그 어떤 북풍한설에도 매화는 인내하고 인내한 끝에 마침내 붉은 생명을 틔우기 마련.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중 매화만개(梅花滿開)의 초식이 청명의 검 끝에서 완벽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에도 끝없이 피어나고 있는 매화가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거대한 규모의 새하얀 눈사태와 붉은 매화의 파도가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청명의 몸이 휘청거렸다. 내력만으로 따지자면 빙궁주가 확실히 우위였다.

하지만 청명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파사삭.

굉장한 압력이 어깨의 옷자락을 짓찢었다. 빙백신장의 한기에 얼어붙은 어깨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저벅.

하지만 청명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어깨의 살이 검게 죽고 코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지만, 그의 눈만은 처음보다 오히려 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벅.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내딛는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다가갈수록 가해져 오는 압력은 더 거세지고, 그에 따라 육체가 지르는 비명도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이윽고.

파아아아앗!

그의 몸이 매화검기와 음한기공이 충돌한 가운데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자신이 발출한 검기가 되레 스스로의 몸을 베어 왔지만, 청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검기가 몸을 베고, 장력의 파편이 등을 가격해도 그는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큭!”

장력을 내뿜는 설천상의 입에선 억누르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 기이한 검술은 그가 내력을 있는 대로 실어 발출한 빙백신장의 장력에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무너뜨렸다 싶으면 새로운 검기가 솟구치고, 짓눌렀다 싶으면 그 속에서도 새로 피어났다.

‘그래도 그게 전부다!’

내력은 확실히 그가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격렬히 저항하던 매화검기가 그의 장력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애송이 놈! 여기까지…….”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앗!

섬뜩한 파공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눈앞을 희게 물들인 빙백신장의 장력 속에서, 붉고 검은 무언가가 포탄처럼 쏘아져 나왔다.

‘뭣!’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설천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경악했다.

파아아아앗!

모습을 드러낸 건, 빙백신장을 그 몸으로 받아 낸 청명이었다.

그는 단숨에 설천상의 앞에 도달해 빛살처럼 검을 쳐 올렸다.

서걱!

검이 움직인 길을 따라 핏방울이 솟구쳤다.

잠시 후, 설천상의 가슴이 왼쪽 아래부터 오른쪽 위까지 길게 갈라졌다.

“끄윽…….”

누가 봐도 위중한 부상이었다.

하나 설천상은 그 정도로 주저앉지 않았다.

쾅!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무시하고 청명의 다리에 장력을 박아 넣었다.

청명의 다리가 휘청하며 꺾였다.

쾅!

그러고도 다시 한번, 설천상의 오른쪽 주먹이 음기를 싣고 청명의 명치에 박혔다.

그그극.

땅에 힘껏 박아 넣었던 청명의 발이 뒤로 주륵 끌리며 밀려났다. 동시에, 청명의 입에서 선지피가 왈칵 쏟아졌다.

“죽어라아아아아앗!”

혼신의 힘을 다한 설천상의 마지막 일격이 틀어박힌 것은 다름 아닌 청명의 오른쪽 어깨였다.

빙백신장의 묘리를 품은 장력이 청명의 오른쪽 어깨를 난타했다.

청명의 몸이 뒤로 틀렸다. 그 바람에 일순간 쥐고 있던 검이 허공으로 팽그르르 돌며 튀어 올랐다.

설천상의 눈에 희열이 차올랐다.

검수가 검을 놓친다는 건 오직 죽음만을 의미할 뿐!

‘이겼……!’

그리고 그 바로 순간.

덥석.

청명의 손이 허공에서 회전하던 암향매화검의 검신 한가운데를 움켜잡았다.

서걱!

이 예리한 날붙이는 주인의 손이라 해도 가차 없이 베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수(逆手)로 검 날을 잡은 손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조여졌다.

‘뭐?’

그리고.

콰드드드득!

청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등 뒤를 향해 내찌른 암매검이 설천상의 명치를 뚫으며 파고들었다.

“…….”

제 배를 파고든 검을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설천상의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전장에서는…….”

“…….”

“방심하는 순간 죽는 거야, 애송아.”

허물어지는 설천상의 눈에 청명의 싸늘한 미소가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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