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2)
“죽여라!”
“으아아아아! 이 개 같은 놈들!”
“오늘만을 기다렸다!”
“궁주님의 원한을 갚겠다!”
여사혼이 이끄는 북해의 무사들은 실로 광포한 기세로 빙궁의 무사들을 몰아붙였다.
이들의 무위는 앞을 막아선 빙궁의 무사들에 비해 특출하지도, 뛰어나지도 않다. 선두에 선 전대 장로들이야 일반 무사들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하겠지만, 나머지는 오히려 처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무위 같은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송곳처럼 돌진한 병력은 마치 전차처럼 당황한 빙궁의 무사들을 짓밟아 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날아든 검과 장력이 무위의 차를 뛰어넘어 상대를 몰아붙였다. 선두에서 병력을 이끈 여사혼이 되레 당황할 만큼 빙궁대의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니?’
살짝 움찔했던 여사혼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음한기공이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이들에게 작렬했다.
‘등을 보인다고?’
빙궁의 무사가?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갇히게 되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빙궁도로서의 자부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빙궁도들이 등을 보이며 꽁무니를 빼는 모습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달아나는 이들만 문제인 것도 아니다.
싸우려는 의지를 갖고 병기를 든 이들조차 얼굴에 어린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여사혼은 평생 이런 형편없는 광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떠 버린 이들이 생과 사가 오가는 순간을 어찌 버티겠는가?
“죽여라!”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려!”
반면 밀고 들어가는 북해의 무사들은 더욱 사기 백배하여 병장기를 휘둘러 대었다.
‘이쯤에서…….’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엉거주춤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던 빙궁도들이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북해의 무사들이 바로 면전에서 공격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정신을 빼앗긴다?
이러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북해의 무사들이야 눈앞의 적만 상대하면 그만이지만, 저들은 실질적으로 등 뒤에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언제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더 몰아붙여라! 오늘 우리가 빙궁을 되찾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사기를 끌어 올리며 달려드는 무사들을 보며 여사혼이 얼굴을 굳혔다.
‘무시무시하구나.’
저 화산의 제자들은 단 한 번의 돌진만으로 이 전장을 완벽히 지배해 버렸다.
감탄과 두려움이 혼란하게 뒤섞였다. 여사혼은 머릿속을 뒤흔드는 잡념을 필사적으로 떨치며 거센 장력을 뿜었다.
설천상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도열한 빙궁도들의 가장 뒤쪽에 있는 그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한눈에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나, 볼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사실상 어려울 리 없는 싸움이었다.
적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이미 오래전에 무학의 길에서 벗어난 이들. 그 녹슬고 낡아 버린 이들을 처리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더 젊고 더 쌩쌩한 이들을 내세워 압도적인 수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다.
이곳은 연무장이라는 이름의 평지.
등 뒤는 성벽으로 막혀 달아날 곳 없는 전장이다. 기기묘묘한 책략을 쓸 수 있는 지형지물도 없고, 변수가 없는 만큼 대단한 요행이 일어날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힘과 실력으로 승부가 결정 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구, 궁주님, 이게…….”
“…….”
“뭐, 뭐라도 해야…….”
장로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그럴 수밖에.
그들의 눈에도 전열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빙궁도들을 여사혼과 북해의 무사들이 휩쓰는 것이 똑똑히 보였을 테니.
설천상은 입술을 짓씹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뭐라도 해야 한다고? 대체 뭘 할 수 있는가?
완벽하게 잡혀 있던 진영은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 정중앙에 자리한 청명을 중심으로 이 많은 이들이 마치 소용돌이치듯 뒤얽히고 있었다. 마치 들끓는 용광로 안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전술이라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전술이라는 건 지시를 들은 이들이 그를 이행할 정신이 있어야만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설천상 역시 빙궁의 궁주에 오른 몸.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빠르게 결정한 그가 벼락처럼 외쳤다.
“파고드는 놈들을 무시하고 저 중원 놈들을 죽여!”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뭣 하느냐! 머저리처럼 보고 있지 말고 당장 저놈들을 잡아 죽여라! 저놈들만 없으면 여사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구, 궁주님?”
옆에서 들려온 당황한 목소리에 설천상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밥버러지 같은 놈들, 설마 저 애송이들이 무서워서 여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저놈들의 목을 따 오겠습니다!”
장로들 중 일부가 굳은 얼굴로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들을 잠깐 보던 설천상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저놈들은 어디까지 나를 방해할 셈인가?’
애초에 저 화산 놈들을 빙궁에 들인 것이 실수였다. 아니, 저놈들이 이 북해의 땅을 밟게 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그는 무너져 가는 자신의 병력들을 보며 뼈에 사무칠 만큼 통탄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파아아앗!
콰득!
상대의 목을 꿰뚫는 감각이 손에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전해졌다.
백천은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거…….’
뭔가 알 것 같다.
백천은 화산의 검이 요사스럽다는 청명의 평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그려 내는 검법에 어째서 그런 평가가 따라붙는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그는 왜 청명이 매화검법을 가장 사파스러운 정파의 검이라고 평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보라.
파르르르.
흔들린 검 끝이 분분히 매화검기를 흩뿌렸다.
환(幻)의 묘리가 가미된 매화잎 속에 실체는 오직 하나.
지금이 비무를 하고 있는 거라면 적도 그 사실을 알아챘을지 모른다. 당황하지 않고 물러나 기회를 엿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
일말의 주저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급박하기 짝이 없는 전장에서 이 많은 매화 중 실체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아앗!”
공포에 질린 상대가 발작하듯 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검에 닿은 꽃잎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저 사라질 뿐이었다.
그리고.
푸욱!
“끄륵…….”
매화 검기에 농락당한 이의 목을 백천의 검이 정확하게 꿰뚫었다.
상대의 눈을 속이고, 상대를 농락하고, 은밀하게 다가가 목숨을 취한다.
화산의 검은, 적어도 전장에서만큼은 더없이 악랄하고 섬뜩한 검이었다.
촤아아악.
검에 묻은 피를 흩뿌린 백천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앞을 응시하며 달려 나갔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 정정당당? 정정당당? 아주 지랄을 하고 있네. 내가 뒈질 판인데 정정당당은 뭔 얼어 죽을 정정당당이야. 비겁하고 구차하게라도 이기고 살아남는 게 전장의 진리야. 그런 개소리할 시간 있으면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
그 말이 맞다.
설사 그 말이 틀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백천에게는 진리다.
‘내가 해야 할 것!’
백천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조걸!”
“예!”
“소소가 뒤처지지 않게 해라!”
“예, 사숙!”
가장 뒤는 혜연이 맡아 주고 있다. 그가 뒤를 봐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뒤를 신경 쓰지 않고 돌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매!”
“네.”
“길을 뚫어라!”
“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끄는 것.
먼저 달려 나간 놈의 등을 필사적으로 뒤쫓는 것.
홀로 도달해서는 의미가 없다. 그가 백천, 화산의 장문제자라면 함께 싸우는 제자들을 단 하나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백자 배의 대사형인 그가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하압!”
백천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반듯했던 그의 검이 눅진하고 비릿한 살기를 담고 더없이 요사스레 상대의 육체를 유린했다.
파아아앗!
청명이 그랬던 것처럼 백천의 검이 훑고 지나간 곳마다 피 분수가 뿜어졌다. 상대의 목이나 심장을 노려 일격에 숨통을 끊어 주던 깔끔한 검이 아니다.
오로지 쾌속하고 낭비 없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검이다.
‘내가 더 많이 짊어지마!’
거의 바닥에 붙듯 자세를 낮춘 백천이 전방으로 쾌속히 몸을 날렸다. 비어 있는 빙궁도들의 다리를 일격에 베어 낸 그는 크게 고함을 치며 전진했다.
“윤종! 내 등을 지켜라!”
“예, 사숙!”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아가는 그의 귓가에 익숙한 불호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언제 들어도 몸이 떨릴 만큼 강력한 굉음이었다.
혜연은 이 선혈이 낭자한 전장에서도 그들을 믿고 따라와 주고 있었다. 불자로서의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신뢰하는 그 마음 하나로.
그러니 백천은 그 믿음만큼 더욱더 움직이고, 더욱더 짊어져야 한다.
“하아아아아앗!”
백천의 검이 매화를 흩뿌렸다.
이제 더 이상은 여리지 않았다. 하늘하늘한 꽃잎 속에는 그의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이내 앞을 막은 이들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뒤쪽에서 따라붙던 화산의 제자들이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검기였다.
이 전장 한복판에서도 백천은 분명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쿵!
땅을 힘껏 박찬 백천은 익숙한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대며 비로소 멈춰 섰다.
“따라잡았다, 이 빌어먹을 놈!”
“늦었잖아.”
청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검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백천이 뚫은 길로 달려온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이 일제히 날아들어 청명의 주변을 빙 감쌌다.
검은 적에게.
등은 동료에게.
내디딘 발은 확고한 의지처럼 굳건히 대지를 딛고, 허리는 올곧게 세운다. 눈은 적을 압박하되 검 끝은 더없이 가볍다.
빙궁의 무사들은 그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차마 함부로 달려들질 못했다. 아니, 이미 그들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미묘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백천이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몰아칠까?”
“기다려.”
“지금 저기 여 장로가…….”
“기다려.”
하지만 청명의 싸늘한 말이 그를 막아 세웠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끓고 있던 백천의 피가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다들 잘 들어.”
“…….”
청명은 오로지 적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남의 싸움에 그리 열 내지 마.”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목적이 뭐였지?”
백천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전장이란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
모두가 청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포진이니, 전략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치고, 죽음과 죽음이 오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흐름이 생긴다.”
“흐름?”
“그래. 그러니 그걸 느껴. 싸우는 와중에도, 칼날이 얼굴을 훑고 가는 와중에도 그 흐름을 놓쳐서는 안 돼. 그렇게 흐름을 느끼다 보면…….”
청명의 이를 드러낸 늑대처럼 미소 지었다.
“틈이 보인다.”
그의 눈이 전장을 빠르게 훑었다. 여사혼이 뚫고 들어온 곳을 향해 병력들이 쏠리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있는 중앙은 확실히 조금씩 한산해졌다.
“이놈드으으으을!”
마침 설천상과 함께 있던 장로들 몇이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며, 빙궁도들이 좌우로 길을 터 주기 시작했다.
설천상에게로 향하는 완벽한 일직선의 길을!
“보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싸우기에 급급해 몰랐겠지만, 청명의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갔다.
지금 그들의 앞에 길이 열렸다.
“간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따라붙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명이 빛살이 되어 앞으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검영이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던, 빙궁의 무사들을 휩쓸고 날려 버렸다.
비명도 없었다.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사지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그 피가 제 몸에 닿기도 전에 청명은 이미 자리를 벗어나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그런 청명의 뒤를 따랐다.
“마, 막아아아앗!”
“장로! 장로님들이!”
병력들이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진다.
눈앞에 달려드는 적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을 상대하러 오는 장로들을 믿고 길을 열어야 하는가?
망설임은 주저함을 낳고, 주저함은 검을 둔하게 만든다.
그리고 청명은 그 둔함을 용서할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파아아아앗!
맹렬하게 휘둘러진 검이 주춤대는 이들의 목을 깔끔하게 쳐 날린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전진한 청명이 소리쳤다.
“사숙!”
“하아아아아압!”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다는 듯, 백천이 앞으로 튕기듯 나아갔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쏘아져 오던 장로 중 하나에게 그대로 검기를 날렸다.
카아아아앙!
“이, 빌어먹을 애송이 놈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이설이 삽시간에 달려 나가 장로 중 하나를 밀어붙였고, 그 틈에 윤종과 조걸이 함께 검을 찔러 넣었다.
이들의 등을 지키던 혜연 역시 불호를 외치며 청명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장력을 내뿜었다.
연쇄적으로 터지는 굉음과 충격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그 혼란의 와중에 청명의 눈에 실낱같은 길이 보였다.
흡사 섬전 같은 모양새로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열린 길을 타고 달리며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막아서는 이가 있으면 베어 내고, 그러다 길이 또다시 막히면 새로이 열린 틈을 파고들었다.
유령처럼 적과 적 사이를 파고들어 달린 그는 이내 땅을 힘껏 박차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들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어어엇!”
“구, 궁주님!”
“안 돼에에에에에에!”
눈앞이 트이자 세상이 드넓게 펼쳐졌다.
마지막 방어선마저 뛰어넘은 청명의 눈에, 당혹한 설천상의 얼굴이 똑똑히 들어왔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설천상이 모피 자락을 휘날리며 청명을 향해 장력을 뿜어내었다.
마치 새하얀 물줄기와도 같은 음한기공이 영혼마저 얼려 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청명은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올곧게 검을 내리쳐 날아드는 장력을 양단했다.
파아아아아앗!
청명의 검에서 뿜어진 반월형의 검기가 장력을 좌우로 갈라 내고 설천상에게로 향했다.
설천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촤악!
섬뜩한 소음이 퍼졌다.
잠시 후, 바닥에 피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
왼쪽 이마부터 오른쪽 턱 끝까지.
얼굴을 가로지르는 깊은 자상이었다. 설천상은 피로 젖은 얼굴을 짐승처럼 일그러뜨리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탁.
바닥에 내려선 청명은 그런 그를 차갑게 마주 보았다.
“할 말은 많지만…….”
청명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자고, 애송아.”
그의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 매화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