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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06화 (504/1,567)

506화.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1)

적의 병력은 이쪽의 두 배 정도다.

하나하나가 가진 힘 역시 저쪽이 월등하다.

더구나 저들은 지금까지 함께 손발을 맞춰 왔고, 적당한 수련과 휴식을 반복하며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이쪽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 병력에, 그마저도 빙궁의 무사들과는 달리 몇 년간 제대로 수련을 하지 못했고, 몸도 많이 상해 있는 상태다.

집단 수련을 통한 호흡?

그런 건 기대도 할 수 없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쪽의 전력은 절반……. 아니, 그 이하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앞으로 돌진하는 청명의 머릿속에선 그런 사실들이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절반의 병력? 상대에게 미치지 못하는 병력의 질?

‘그게 뭐 어쨌다고.’

그건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짐승처럼 달려드는 마교도들을 상대로 항상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적의 병력이 배가 넘는 것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수십 배에 달하는 적과 맞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를 성장시킨 것은 화산이지만, 그를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마교였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콰콰콰콰!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천둥과도 같았다. 칼바람이 얼굴을 찢어발기듯 후려쳤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적들의 얼굴에는 미세한 당황이 어렸다. 청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적병의 선두에 선 이들의 얼굴엔 결의가 서서히 굳어졌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들을 앞에 두면 잡념 같은 건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나 청명은 그들이 방비 태세를 갖추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들던 그의 몸이 엿가락처럼 주욱 늘어난다 싶더니 이내 몇 배는 빨라진 속도로 순식간에 빙궁의 무사들 앞에 당도했다.

빙궁 무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동했다’기보다는 ‘나타났다’에 가까웠다.

“이, 이형환…….”

이형환위(移形換位)라는 말이 채 입에서 다 나오기도 전에 암향매화검이 섬뜩한 광채를 발했다. 휘날리는 꽃잎을 검 주위에 두르고는 공간을 갈라냈다.

파아아아앗!

순간적으로 꽃잎의 폭풍이 밀어닥치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러했듯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악!”

흩뿌려진 검기가 전면을 막아선 이들의 몸을 수없이 꿰뚫었다. 제대로 방비를 하기도 전에 쏟아진 일격은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틈도 주지 않았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고, 잘려 나간 사지가 허공으로 높이 튀어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빙궁도들의 눈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붉은 매화 형상의 검기와 치솟는 핏물이 뒤섞인 광경.

이는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경이와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타아앗.

청명은 자신이 만들어 낸 광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짓쳐 달렸다.

하늘로 솟구친 피분수가 후드득 쏟아지며 온몸을 뒤덮었지만, 청명은 눈 하나 깜빡하는 일이 없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일격은 언제나 적들의 예상보다 빠르고 과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일 검.

단 일 검으로 전장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틀어쥔 청명은 사색이 되어 물러나는 이들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마, 막…….”

푸욱!

무어라 외치려던 이의 입 안에 무정한 검 날이 쑤셔 박혔다.

서늘하게 또 하나의 목숨을 거둔 청명의 검은 온기라곤 없이 간결하게 움직였다.

파앗! 파앗! 파앗!

세 개의 목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목이 있던 자리에서 피분수가 솟아오르는 걸 지켜보던 빙궁도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와 경악이 휘몰아쳤다.

그들 역시 검을 들었고, 사는 동안 끊임없이 무학을 배웠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이런 전투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밀려드는 마교의 무리 앞에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궁주를 잃었던 것이 그들이 경험한 마지막 집단전이었다.

이 벌건 대낮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목이 장난감처럼 잘려 나가는 걸 본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다.

강철 같은 마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누구나 이에 대해 누차 강조한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누구도 쉽게 이뤄 낼 수 없다는 의미다. 쉽게 할 수 있다면 강조할 필요가 없으니까.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전장의 매정함과 잔혹함 앞에서, 이론으로만 머리에 새겼던 부동심 따위는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청명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막아서는 이들의 목에 가차 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목을 꿰뚫고 반쯤 튀어나온 검 날이 그대로 머리를 뜯다시피 날렸다.

청명의 검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눈앞의 참상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이의 옆구리로 곧장 파고들어 허리를 동강 내었다.

순백색 눈으로 뒤덮여 있던 북해빙궁의 연무장은 순식간에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설원 위에 붉은 꽃이 만발하는 듯 아름답고 섬뜩한 광경이었다.

“무, 물러나!”

“빌어먹을! 물러나지 마라! 뭐 하는 거야!”

“적은 소수다! 겁먹지 말고 침착하게 상대해!”

“비, 비키라고, 이 새끼들아!”

삽시간에 혼란이 번졌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청명을 본 이들은 배운 검을 잊고, 잠시나마 팽배했던 용기를 잃었다. 살고 싶단 본능에 굴복한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하지만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이들은 물러날 수 없었다.

서로간의 간격이 좁아지며, 기껏 배치하여 유지하고 있던 진영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지휘관들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지만, 혼란에 빠진 이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는 청명의 눈이 빛났다.

‘애송이 놈들이.’

평화에 젖어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그를 막아선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비무?

결투?

청명의 장기는 그딴 게 아니다.

그가 가장 확고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곳은 바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 상대의 목에 칼을 박으며 일말의 주저도 할 필요 없는 이 세계다.

문파라는 온실에 안주하며 적과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워 본 적 없는 이들은 절대 그를 감당할 수 없다. 애초에 살아온 세계가 다르다. 전장을 지배하는 방법도 모르는 이들 따위는 아무리 잔뜩 모여도 그의 적수가 안 되었다.

모두가 흡사 괴물을 보는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청명에게서 물러섰다.

물러나?

나를 상대로?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적어도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물러난다는 건 절대 답이 될 수 없다.

그의 검 끝이 파르르 떨리며 매화 검기를 분분히 날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휘몰아쳐 오는 꽃잎의 폭풍에, 빙궁의 무사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본능적으로 장력을 날려 대었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꽃잎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막아 내기에 그들은 너무도 무력했다.

화아아아아악!

꽃잎의 검기가 전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실로 잔혹한 절경이었다.

마교와의 전투 당시 같은 정파에게도 경원시되던 화산의 검기가 머나먼 북해의 땅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검기에 꿰뚫린 이들이 채 다 쓰러지기도 전에 청명의 발이 다시 땅을 박찼다. 상대가 충격에서 벗어나 전열을 재정비할 기회를 줄 이유 따윈 없었다.

섬뜩한 살기를 내뿜으며 적을 향해 달려드는 청명은 악귀의 형상 그 자체였다.

“큭!”

백천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저 망할 놈은 뒤쪽에서 따라붙는 일행의 사정을 전혀 돌봐 주지 않았다. 사실상 속도에 맞추어 따르기만 할 뿐인데 그마저도 버거웠다.

‘빌어먹을.’

좁히고 또 좁혀도 이 망할 간격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앞에서 청명의 검이 다시 번뜩였고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백천은 눈앞의 광경에 정신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토록 잔혹하고 섬뜩한 광경을 본 일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는 입술을 터지도록 짓씹으며 청명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저 피를 저놈 혼자 뒤집어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저 등이 말하고 있다.

뒤처지지 말고 따라오라고, 죽을힘을 다해 따라붙으라고.

“하아아아앗!”

이를 악문 그는 죽어라 달려 가까스로 청명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몸을 날려 청명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빙궁도의 가슴에 매화검을 쑤셔 박았다.

콰득.

검이 살을 뚫고 뼈를 끊어 내는 감각.

선명한 죽음이 검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살인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감각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망설이거나 주저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망설이는 만큼 누군가는 더 많은 죽음을 그 어깨 위에 짊어져야 때문이다.

서걱!

“아아아악!”

그와 같은 생각인지, 반대편에선 유이설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적을 응시하며 목을 쳐 날리고 있었다.

얼마나 피를 뒤집어쓴 건지, 움직일 때마다 검붉게 흠뻑 젖은 무복에서 피가 튀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은 그 순간 보았다. 유이설의 입매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으아아아앗!”

“빌어먹을!”

등 뒤에서 조걸과 윤종이 내지른 고함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은 당소소의 억눌린 신음도 들려왔다.

모두가 필사적이었다.

‘그래도 따라붙는다. 이 망할 놈…….’

그때였다.

전방으로 일 검을 날린 청명이 몸을 쭉 편다 싶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졌다.

“뭐?”

어디?

“위! 위입니다! 사숙!”

뭐?

백천의 고개가 꺾일 듯 위로 젖혀졌다. 과연, 푸른 북해의 하늘 한가운데로 뛰어오른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

백천은 순간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몸을 띄워 올린 청명은 뛰어오른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강하했다.

콰아아아앙!

그 바람에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뒤쪽의 무사들이 날벼락을 얻어맞았다. 적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청명이 곧장 횡으로 검을 휘둘러, 그들을 순간적으로 베어 버린 것이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 빌어먹을 놈이……!’

백천은 속으로 악다구니하며, 앞을 막아선 빙궁의 검수에게 매화검기를 날렸다.

보조를 맞추며 함께 싸운다?

어깨를 맞대고 서로를 돕는다?

청명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청명에게 있어서 함께 싸운다는 것은 서로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지, 뛰어난 이가 모자란 이를 보완해 주는 것이 아니다.

되레 저 놈은 저 등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죽을 각오로 따라붙으라고 말이다.

“못 할 것 같으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눈에 핏발을 세운 백천이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살기 짙은 검으로 적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숙!”

서걱!

순간 그의 옆을 노리고 달려들던 이가 윤종의 검에 꿰뚫려 쓰러졌다. 하지만 백천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전방에 선 이에게만 집중하며 돌진했다.

뱃속이 끓어올랐다. 동시에 검에도 뜨거운 것들이 잔뜩 서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섬뜩.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백천은 움찔하며 검을 멈추었다.

그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겹겹이 그를 가로막은 빙궁도들 틈에서 청명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을 차린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흥분하지 마라!”

“예!”

“머리 식히고 자세를 낮게 유지해라! 흥분한다고 강해지는 게 아니다!”

“예!”

이것은 스스로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했다.

백천은 검을 다시 단단히 움켜잡고 무게 중심을 낮추었다.

그러자 섬뜩하게 이쪽을 바라보던 청명의 시선이 사라졌다.

‘저놈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적을 상대하면서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좀 가혹하잖아, 이 새끼야.”

백천은 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외쳤다.

“따라붙어!”

“예!”

백천에게서 눈을 뗀 청명은 무감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막으라고! 한 놈이다! 달라붙어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

“수는 이쪽이 훨씬 많다고! 겁먹지 마라. 이놈들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빙궁의 무사더냐!”

독려하거나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고래고래 울렸다.

그 목소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청명의 검이 잠시 멈췄기 때문인지 그를 에워싼 이들이 움찔대면서도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긴장하기는커녕 피식 웃어 버렸다.

“이래서 애송이 놈들은.”

시선을 끌면 끄는 대로 모조리 달려들어 주는 놈들이라니.

“너희 그거 알고 있냐?”

“…….”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움찔하며 주변을 살폈다.

“저 영감님이 순진하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단 말이야.”

그 순간.

“모조리 처 죽여라!”

“오오오오오오오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완전히 흐트러진 진영의 옆구리를 향해, 여사혼이 이끄는 북해의 무사들이 무서운 기세로 파고들었다.

완전한 명분을 얻은 이들이 화산 제자들의 활약에 더할 나위 없이 고무되었다. 그 사기가 얼마나 높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비, 빌어먹을! 저기!”

빙궁의 무사들은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화산의 제자들이 진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지 않았다면, 사실상 이런 공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집단전에서 진영을 무너뜨린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비무가 아니다. 생사를 건 일대일의 결투도 아니다. 말 그대로 전쟁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승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거짓된 안락함을 택한 대가지.”

청명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들을 넘어 그 뒤로 향했다.

새하얀 모피로 전신을 휘감고 있는 한 사람에게로.

설천상의 파래진 안색을 보며 청명은 이를 드러내고 희게 웃었다.

“이제 네 차례야.”

검을 한차례 휙 떨친 청명이 완전히 얼어붙은 빙궁의 무사들을 향해 맹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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