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5)
마교.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빙궁도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외면하고 싶은 이름이지만, 그럴 수 없는 이름이다.
그들이라고 눈과 귀가 없는 게 아닐진대, 빙궁의 난 당시 빙궁으로 쳐들어왔던 흑의인의 존재를 모를 수야 있겠는가?
그저 굳이 파고들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선 중원인의 입에서 마교라는 이름이 나오고야 말았다. 더는 외면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그때 설천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아, 모른 척하시겠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그것도 좋겠죠.”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설천상은 입술을 뒤틀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어디서 혹세무민을…….”
“아아, 됐어요.”
하지만 청명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실로 무례한 그 행동에 설천상의 얼굴은 더욱더 일그러졌다.
청명은 그런 그의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래저래 들이받아 봐서 아는데, 어차피 사람이라는 건 말로는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설천상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이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어차피 내가 맞는 말 해 봐야 들을 생각도 없잖아요. 그럼 좋은 칼 놔두고 말로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안 그래요?”
“…….”
“생각은 지옥에 가서 하시면 돼요. 목에 칼 박힐 때쯤이면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아실 테니까.”
“이…….”
설천상의 눈이 핏발이 섰다.
이제 겨우 후기지수밖에 되지 않은 어린놈이 지금 그의 목을 자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 않은가?
“……중원 놈들은 어린놈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로군. 주둥아리가 이토록 방자한 것을 보니.”
“아, 예의요?”
청명은 정말로 웃긴 듯 피식 웃었다.
“거 웃긴 양반이네. 어차피 이제부터 서로 몸뚱이에 칼 꽂겠다고 발악을 할 건데, 예의를 차리라고요? ‘아이고오, 궁주님! 지금부터 배에 칼 들어가니 조심하십시오.’라고 해 드려요? 그럼 좀 덜 아프신가?”
“…….”
이제 설천상의 몸은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짝다리를 짚고 건들거리며 말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몸뚱이가 천참만륙이 나고도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몸이 천참만륙이 났는데 어떻게 말을 해요? 생각을 하고 말해야지.”
“이노오오옴!”
설찬상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입술이 갈라져 핏방울이 배어나는 것을 본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지면 곱게는 못 죽겠네.”
“그러게요……. 눈빛으로도 사람 죽일 기센데.”
청명이는 검으로도 패고 말로도 팬다.
수년 동안 청명을 겪어 온 화산의 제자들은, 때로는 검으로 두들겨 맞는 것보다 말로 맞는 게 더 아프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설천상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많은 궁도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다니…….”
물론 그들의 관점에서 설천상은 적이지만, 세상에는 적과 아군을 뛰어넘는 선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에게는 그 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내 입으로 설천상을 패던 청명이 묘한 눈으로 궁도들을 훑어보았다.
“아닌 척해도 알 사람은 다 아는 모양이네?”
“…….”
궁도들은 그저 말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기세에 눌린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당당할 수 없을 뿐이다.
청명은 그 광경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뭐. 고개만 돌려 버리면 사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죠. 굳이 불편한 진실을 파고드는 것도 귀찮을 테고요.”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알아야죠.”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곪아 가는 상처를 째기 싫다고 내버려 두면 결국에는 팔다리를 잘라 내야 하는 법이죠. 그 시기도 놓치면 죽는 거고.”
“…….”
“이제는 선택해야 할 거예요. 팔을 자를 건지. 아니면 죽을 건지.”
빙궁도들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백천이 막 한마디를 해 청명을 진정시키려 했다.
청명의 말에 틀린 것은 없지만, 굳이 저 말을 청명이 꺼내서 부담을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화산에게도 마교를 막는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엔 여사혼이나 한이명도 있지 않은가?
그들을 두고 굳이 화산이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유이설이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겨 막았다.
“……사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표정.”
“음?”
“뒤쪽, 표정.”
그녀의 말에 백천이 슬쩍 뒤쪽을 돌아보았다.
도열해 있는 북해의 무사들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보다 그 수가 곱절이 넘는 빙궁의 무사들을 보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달려왔다지만, 눈으로 확인한 전력의 차이는 부담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뭔가가 달라졌다. 긴장이 풀린 건 아니지만, 그 긴장 어린 표정 속엔 미묘한 자긍심이 뒤섞여 있었다.
‘이게 명분이라는 건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이곳에 있는 북해의 무사들은 설천상을 물리치고, 설소백을 궁주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모였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설소백이 북해의 적통이라고는 하나, 누가 제대로 된 적통인가를 따지는 것은 선악을 가르는 행위가 아니니까.
하지만 마교는 다르다.
마교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 봤다면, 마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모를 수가 없을 것이었다. 이건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죄악이니까.
지금 청명은 뒤에 선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명분을 준 것이다. 사람은 확고한 명분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감을 가지게 되니까.
백천의 시선이 청명의 등에 꽂혔다.
‘저 녀석은…….’
이제는 청명이라는 놈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다고 자신하는 그이지만, 청명은 여전히 새로운 면을 보여 주었다.
딱히 자신을 굉장히 내세우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 나간다.
백천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저 등.
저 등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걸까?
그런 것을 실감할 때마다 백천은 저 등이 든든하고 듬직해 보이는 동시에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흐르는 것을 알아챈 설천상이 언성을 높였다.
“네놈이 북해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독기가 가득 차오른 목소리였다.
“북해는 더없이 척박한 땅이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중원에서 살아온 너희들이 대체 뭘 안단 말이더냐?”
“거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하지만 청명은 이번에도 웃어 버렸다.
“풍요롭든 척박하든,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에요. 척박하다는 걸 변명으로 내세워 지껄일 거면 전대 궁주를 몰아내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죠.”
전대 궁주라는 말이 나오자 설천상의 얼굴이 숫제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놈이…….”
그때 청명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판은 청명이 깔았으니 이제는 그가 회수를 할 차례였다.
말없이 앞으로 나선 여사혼이 싸늘한 눈으로 설천상을 노려보았다.
“설천상.”
궁주가 아닌 설천상.
그 단 한마디로 자신이 설천상을 궁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너는 세 가지 죄를 저질렀다.”
“…….”
“하나는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이들을 끌어들인 죄.”
여사혼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퍼져 나갔다.
“둘은 감히 그들과 손을 잡고 전대 궁주를 시해한 후 그 자리에 스스로 오른 죄. 그리고 세 번째는 그들의 손아귀에 북해인들을 내어 주고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 죄다.”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모두에게 까발려졌지만, 정작 설천상의 얼굴은 조금씩 평온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너를 단죄하고 진정한 빙궁의 후계자를 궁주의 위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감히 북해의 땅을 침탈한 저 더러운 것들을 북해에서 몰아낼 것이다!”
여사혼의 목소리가 성벽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칼날 같은 시선은 이내 설천상이 아닌 빙궁도들에게로 향했다.
“너희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저 간악한 자의 주구(走狗)로 살 셈이더냐! 여기, 북해의 진정한 적통이 있다! 무너진 북해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진짜 적통이!”
여사혼이 슬쩍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한이명의 앞에 선 작은 아이가 드러났다.
“…….”
모두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전대궁주를 기억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이 아이가 그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꼭 닮아 있었다.
동요하는 자.
흔들리는 자.
그리고 되레 이를 악무는 자까지.
성벽 안이 조용히 들끓는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잘못은 바로잡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올바른 편에 서서 저 악적을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태라. 그럼 비틀린 것을 모두 제자리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여사혼의 목소리에는 혼이 실려 있었다.
저 고통스러운 빙정 광산에서 수년을 버티면서도 결코 잃지 않았던 의지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설천상을 끌어내리고 빙궁을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겠다 다짐해 왔던 늙은 무인의 신념이었다.
하나.
사위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 늙은 무인의 피 끓는 외침에 반응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호응하는 외침도 없고, 열의에 찬 고함도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한 싸늘한 정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여사혼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스쳤다.
“……망설이지 마라!”
그는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면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 모든 것을 묻어 둘 것이다. 오직 빙궁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에만…….”
“그 꼬맹이가 말인가?”
그때, 설천상의 목소리가 여사혼의 애끓는 외침을 무심히 툭 잘라 먹었다.
“아니면 여 장로, 아니. 여사혼 네가 말인가?”
“……설천상.”
설천상의 입가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계획이 있기에 이곳까지 당당히 내려왔나 했다. 그런데 믿고 있는 게 고작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라고?”
“이놈! 이분이야 말로 진정한 북해의 적통…….”
“그래서?”
“…….”
말문이 막힌 듯한 여사혼을 보며 설천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리석은 놈. 그 어린놈이 북해의 적통이라면 나 역시 그러하다. 나 역시 설가의 피를 이은 몸.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내 발로 쟁취하여 이곳에 섰다.”
“…….”
“대체 그 어린놈에게 무엇이 있느냐? 그저 설가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그 아이를 따를 것이라 생각했느냐? 그 사실만으로도 피가 들끓어 궁주인 내게 칼을 겨눌 것이라 생각했던가? 한심하군.”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이놈!”
격노한 여사혼과는 달리, 설천상은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 상황이 뒤집히고 만 것이다.
“생각이 굳어 버린 놈들은 제 생각을 진리처럼 믿어 버리곤 하지. 그렇기에 패하는 것이다.”
“이 간악한 놈이 뭐라 지껄여 대는…….”
그때 청명이 차가운 얼굴로 툭 끼어들었다.
“이제 됐어요.”
여사혼이 격앙된 얼굴로 휙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 만한 여사혼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뭐가 됐단 말이오?!”
하지만 그 울분을 상대하면서도 청명은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영감님 꽤 순진하시네요.”
“…….”
“뭐가 옳은지 몰라서 나서지 않았겠어요? 뭐가 옳은지 알면서도 나서지 않았던 거지. 죽고 싶지 않아서, 다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그런 이유로 침묵하던 이들이 상황 조금 바뀌었다고 갑자기 대오각성해서 더 약한 쪽의 편을 들겠어요?”
담담하고 나지막한 청명의 말이 퍼져 나갔다.
“옳은 쪽에 섰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가치가 대단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건너편에 서서 보면 그런 건 별것도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그런 가치는 내 발에 박힌 가시만도 못한 법이죠.”
“…….”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 왔다.
전쟁은 인간이 민낯을 드러내게 하니까.
우정을 논하던 이가 살기 위해 동료를 저버린다. 충을 논하던 이는 모시던 이를 버리고 달아난다. 협의를 모든 것으로 알고 떠받들던 이들은 중원을 위해 희생한 이를 외면하고, 되레 제 잇속을 챙긴다.
청명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겪었다.
원망하냐고?
당연히 원망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관철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던 나약했던 자신을.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암매검을 뽑았다.
“협의라는 건 말이에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은 기묘하리만치 섬뜩했다.
“관철할 힘이 없을 때는 세상 무엇보다 무력해요.”
그리고 그 말에 동의한 사람은 의외로 설천상이었다.
“맞는 말이지.”
그의 비웃음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한데 그건 네게도 적용되는 말이 아니던가? 이제 더는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
청명의 입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의 좌우와 뒤를 채우기 시작했다.
청명이 무엇을 하더라도 함께하겠다는 듯이.
제 주위에 선 화산의 제자들을 느끼며, 청명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뒤틀었다.
“보여 주지.”
그의 두 눈이 새파란 빛을 발했다.
“지금의 화산에겐 신념을 관철할 힘이 있다는 걸!”
채앵!
화산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사숙! 사고! 사형!”
“그래!”
“간다!”
청명의 발이 바닥을 박찬다.
그와 동시에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 역시 바닥을 박차며 빙궁의 무사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적들.
아예 새하얀 설산처럼 보이는 수많은 북해빙궁의 무사들을 향해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유성처럼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