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4)
촤아아아악!
“끄륵…….”
목 옆쪽이 한 치쯤 베임과 동시에 몸에 힘이 쭉 풀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뒤튼 덕에, 일 검에 목이 잘려 나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나.
파앗. 파앗.
뒤튼 옆구리로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스쳤고, 열려 버린 가슴을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넋이 나간 빙전대주의 눈에 회수되는 검이 보였다. 그 검을 타고 올라간 시선이 마침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무감한 눈.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식어 버리는 눈빛이었다.
“너…….”
파아아아앗!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금 움직인 검이 빙전대주의 목을 대번에 베어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털썩.
목 잘린 시신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심했어야지.”
청명이 빙긋 웃으며 주변을 살짝 돌아보았다.
“다음은?”
눈 깜짝할 새에 지휘관을 잃어버린 빙전대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아……. 아아…….”
“다, 달아나라!”
“뛰어내려! 죽는다!”
공포에 질린 이들이 무기를 내던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벽의 계단을 향해 달리며 뒹굴었고, 일부는 심지어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휑하게 비는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은 입맛을 다셨다.
“쯧. 요즘 애들은 영 매가리가 없다니까.”
마! 나 때는 어?
에이.
말해 뭐 해.
여사혼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 있었다.
‘저자는…….’
저건 명백하게 이상하다.
그는 저 빙전대주라는 자를 알지 못했다. 그가 빙궁의 장로일 때는 이런 대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빙전대주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빙전대주는 한 무력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이를 일컫는다.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강하지 않은 이를 쉽사리 따르지 않는다. 그 가운데 대주라는 지위에 오른 이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이가 단 몇 초 만에 목이 달아난다?
저건 여사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청명, 그러니까 화산신룡이라는 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빙전대주와 제대로 맞붙는다면 응당 백 초 이상은 싸워야 마땅했다.
저리 단숨에 목이 달아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실제로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사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에서 저게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이는 겨우 여사혼 하나뿐일 것이었다.
방심?
그래. 방심이다. 따지자면 전장에서 집중력을 잃은 빙전대주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여사혼은 도저히 빙전대주를 탓할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걸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주 잠깐.
찰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빈틈을 정확하게 파악해 내는 통찰력. 그리고 그 판단을 바탕으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는 결단력.
거기에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완벽하게 검을 펼치는 과감함까지.
‘괴물 같은…….’
차라리 저 젊은 검수가 일 검에 성벽 위의 빙전대를 모조리 쳐 죽여 버렸다면 이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무공의 고하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런 결단력이나 과감함 등은 단순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생 수없는 싸움을 해 온 여사혼조차 엄두를 못 낼 일이 아닌가?
“대체…….”
그때였다.
암향매화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려 검집에 밀어 넣은 청명이 뚜벅뚜벅 걸어가 성벽 안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많이도 몰려왔네.”
성벽으로 오르는 것은 성공적으로 이뤄냈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빙궁의 저력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닐 테니까.
그때 고개를 돌린 청명이 여사혼을 불렀다.
“영감님!”
“으, 으응? 나 말이오?”
“네. 남은 사람들 빨리 좀 올라오라고 해요! 뭔 굼벵이도 아니고.”
저들이 굼벵인 게 아니라 너희가 날다람쥐 같은 거겠지.
쯧 하고 혀를 찬 청명이 성벽 아래를 가리켰다.
“어쩌실 거예요?”
“……뭘 말인가?”
“하. 거참 답답하게 구시네.”
청명이 정말로 답답한 듯 가슴을 쾅쾅 쳤다.
여사혼은 살짝 목을 움츠렸다. 이전까지였다면 청명이 무슨 말을 해도 허허 하고 넘어갔겠으나 방금 그 청명의 움직임을 보고 나니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 쓰였다.
“꼬맹이 데리고 설득 한번 해 본다면서요?”
“그, 그랬지.”
“저기에 다들 적당히 몰려 있고, 여기는 높으니까 대화를 해 보기에 제법 적당한 상황 같은데 어쩌실 거냐고요.”
여사혼은 살짝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현명해 보이지 않건만, 오히려 여사혼보다 몇 배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네를 잘못 봤던 것 같군.”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대답은 여사혼 쪽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왔다.
“사이비 도사.”
“싸가지 없는 어린놈.”
“쉬지 않는 주둥아리.”
“지옥에나 떨어질…….”
“마지막 땡중 새끼 나와.”
혜연이 움찔하며 백천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새끼가 숨어?”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혜연의 민머리를 움켜잡는 청명을 보며 여사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랍구나.’
화산의 제자들이 선두에 서 준 덕분에 희생이랄 것도 없이 모두가 성벽 위로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저 청명이라는 자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선두에 선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게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청명아. 스님 머리는 잡는 게 아니다.”
“사숙. 스님 머리를 잡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원래 사람 머리는 잡으면 안 되는 겁니다.”
“어……. 그렇지?”
조금 느긋해진 이들을 보며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숙. 안 내려갑니까? 싸우다 말고 이게 뭐 하는 겁니까?”
“걸아.”
“예!”
“……뒤에 사람들이 아직 덜 올라왔잖느냐. 안 그래도 수가 적은데 나뉘어서 싸우면 각개격파밖에 더 당하겠느냐?”
“아…….”
조걸이 그제야 이해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또다시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이리 못 올라옵니까?”
“…….”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마침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두를 것 없다. 적이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북해인들을 배려한 발언이었다.
대부분은 그런 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안타깝게도 화산에는 지독히 눈치 없는 이가 한 명 존재했다.
“이 시간에 대비를 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
“걸아.”
“예?”
“주둥아리가 간지러우냐? 좀 때려 줄까?”
“……아니요, 사형.”
윤종이 눈을 부라리자 조걸이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숙였다.
이들의 대화에 여사혼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설마 우리의 기량이 저들의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아무리 긴 노역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 중 대부분은 과거 빙궁의 장로들과 정예들이다.
저 화산의 젊은 제자들이 비해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황을 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는, 저들에게 무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다.
‘오늘 참 여러 번 놀라는구나.’
북해의 운명을 결정 짓는 날 이런 감상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들고 일어나는 감정을 내리누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청명의 말에 여사혼이 안색을 굳혔다.
“병법상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소.”
“네.”
“하지만 나는 성벽을 내려가는 쪽이 낫다고 보오.”
“왜요?”
청명의 물음에 그는 차분히 말했다.
“저들에게 소궁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어야 하오. 아무리 무인들이 눈이 좋다고 해도, 이토록 멀고 높은 곳에선 소궁주가 진짜 전대 궁주의 자식임을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오.”
“아. 그러니까 애를 저기로 데려가서 칼 들고 있는 놈들 앞에 들이미시겠다?”
청명이 한이명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이명의 등에 업혀 온 설소백이 살짝 움찔하며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건.”
여사혼이 말문이 막힌 듯 우물대자 내내 잠자코 듣기만 하던 한이명이 거들었다.
“도장이 뭘 우려하는지는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차피 모두가 죽소. 그리고 소궁주는 더욱 그렇겠지.”
“흠.”
“이게 최선이오. 이해해 주시오.”
청명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북해의 방식이라면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네요.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이해해 주어 고맙소이다.”
“다만.”
청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차게 식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말한 이상, 일이 틀어졌을 때 선두에서 제일 먼저 죽을 각오도 해야 할 거예요. 그게 책임이라는 거죠.”
“…….”
“내려가 보죠. 저기도 많이 열받은 것 같으니까요.”
청명이 피식 웃으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천상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지다 못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식겁하여 성벽에서 죽어라 도망 오는 빙전대의 모습을 본 것이다.
“저 겁쟁이 같은 것들이!”
빙전대는 그가 궁주 자리에 오른 후 특별히 수련시켜 새로 만들어 낸 무력대였다. 성벽을 높이 쌓은 만큼 외부에서 누군가 쳐들어올 때 어떤 무력대보다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저리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쳐 버리면 그의 체면은 뭐가 되는가?
“빙전대주! 이 병신 같은 놈이!”
설천상의 분노 어린 시선이 성벽 위로 향했다. 드높은 성벽 위에서 빙전대가 아닌 다른 이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혀 버렸다.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갈아붙여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끌어내라!”
“구, 궁주님.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가게 되면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그럼? 저 꼴을 그냥 두고 보자는 소리냐?”
직언을 했던 장로는 설천상의 핏발 선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마자 급히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러고도 너희가 자부심 높은 빙궁의 무인이더냐! 이 수치도 모르는 놈들!”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빙궁도들의 생명이다.
이곳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처음부터 잘못됐다.’
누구도 그 사실을 궁주에게 고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목이 가장 먼저 달아날 테니까.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저버린 이들에게 목숨을 걸 용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저놈들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저 망할 중원의 애송이들은 반드시 살려서…….”
“구, 궁주님!”
“음?”
“저, 저기!”
설천상이 의문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한 사람이 느긋하게 성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저…….”
설천상의 얼굴이 순간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어느새 가죽옷을 벗어 던지고 화산의 상징인 매화가 수놓인 무복을 드러낸 청명이었다. 그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여유롭게 그들 쪽을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궁주님?”
태연한 얼굴로 인사까지 건네 오는 모습에, 설천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찢어 죽일 놈이!”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빙궁을 울렸다.
“내가! 그리고 빙궁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었거늘, 중원 놈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이 무도한……!”
“아아. 그건 오해예요. 저는 은혜는 두 배로 갚는 주의거든요.”
“뭐라?”
“그런데 이건 경우가 좀 다르죠.”
청명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가셨다. 웃음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냉기만이 가득했다.
“나는 마교와 손잡은 놈은 인간으로 안 보거든.”
“…….”
“마교의 개에게 갚을 은혜 같은 건 없어. 오직 검만이 있을 뿐이지.”
매섭고 차가운 일갈이었다.
드높은 성벽을 넘은 싸늘한 한기가 빙궁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