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3)
“아아아아아아아악!”
“…….”
여사혼이 부릅뜬 눈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화산의 제자들이 성벽 위로 올라간 순간부터 비명과 고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물론 전투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라지만, 이건 분명 뭔가 결이 달랐다.
그러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보라고.
성벽 위에서 황금빛 휘광이 번쩍 한다 싶더니 서넛이 동시에 성벽 밖으로 튕겨 나왔다.
음?
튕겨 나오면 어떻게 되냐고?
빤한 일 아닌가.
“살려 줘어어어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아악!”
빙궁의 무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쿠웅! 쿵!
아래를 내려다본 여사혼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눈밭 위로 추락한 무사들이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안 죽었으면 됐지.’
평생 침상에 누워서 살아야 할 판이지만, 그래도 눈이 잔뜩 쌓여 있어서 목숨이라도 건진 게 어딘가?
“장로님!”
“그, 그래!”
여사혼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성벽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건 그들의 싸움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뜻이 맞아 그들을 돕는 빈객(賓客)들이 아니던가? 객들에게 선두를 내어 주고 뒤에서 구경만 하는 건 무인으로서 더없는 수치였다.
“흐아아아앗!”
성벽을 오르는 그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졌다.
위쪽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사라진 이상, 성벽을 오르는 자체는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끝에 다다른 그는 성벽을 박차며 위로 몸을 날렸다.
“이놈들! 내……. 히이이이이익!”
하지만 허공으로 떠오른 그에게로, 튕겨 나온 빙궁도가 포탄처럼 날아왔다.
“으아앗!”
무어라 마저 외칠 겨를도 없이 그는 바닥에 들러붙은 종이처럼 납작 엎드렸다. 수그린 머리 위로 튕겨 나간 사람이 빠르게 획 스쳐 지나갔다.
‘저기에 부딪혔으면……?’
그도 조금 전 봤던 이들처럼 저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했겠지.
이 추운 날씨에도 식은땀이 쭉 흘렀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성벽 위의 광경이 들어왔다.
쿠우우우우우우웅!
내디딘 진각이 성벽 전체를 울리며 떨게 했다.
그리 체구가 크지도 않은데, 대체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미타부우우우울!”
혜연의 주먹이 앞으로 내뻗어지는 순간, 황금빛의 불광(佛光)이 충천하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분분히 성벽 밖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불호라는 건 보통 자비롭겠으나, 혜연의 불호에서는 자비의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미타불을 외치며 사람을 성벽 너머로 날려 버리는 중을 부처님이 보시면 대체 뭐라고 하시겠는가?
하지만 혜연은 그런 것따윈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숫제 광소를 터뜨리며 빙궁의 무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 막아라!”
모두가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권력에 기겁하며 달려들었지만, 그건 혜연을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웅.
나한권은 반장(半掌)으로부터 시작된다.
소림을 상징하는 그 자세를 취한 혜연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묵직하게 주먹을 질렀다.
빙전대의 무사가 휘두른 검이 혜연의 주먹과 맞부딪쳤다.
카가아앙!
그리고 그 순간, 내기가 실린 강철검이 마치 장난감처럼 부러져 나갔다.
“헉!”
달려들던 이는 그 기사(奇事)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투우우우웅!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형(形)을 넘어 법(法)의 극의(極意)에 달한 권.
모든 중원 무학의 기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림의 나한권(羅漢拳)이 지금 북해빙궁의 성벽 위에서 묵직한 그 무게를 내보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청명에게 타박을 당하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압도적인 무위였다.
소림이 왜 그를 두고 백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기재라 평하는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왼 혜연이 물러서는 이에게 비조처럼 달려들어 허벅지를 내리밟았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허벅지를 밟힌 이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림의 가르침을 따르는 법승(法僧)에게는 자비가 있으되, 소림의 권에는 자비가 없다. 흡사 부처의 위상처럼, 혜연의 권은 무도한 자들을 용서치 않았다.
“……진짜 적응 안 된다니까.”
조걸이 혀를 내둘렀다.
천하비무대회 이후로 그들은 꾸준한 수련을 해 왔다.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그때의 자신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혜연과의 격차는 그리 좁아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들도 강해졌지만, 혜연도 분명 과거와 비할 수 없이 더 강해졌다.
“질 수 없지! 흐아아아앗!”
검이 허공을 가르며 공기를 찢어 내었다.
재빠르고 경쾌한 칼놀림 속에 선명한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낮게! 더 낮게!”
“예!”
파아아앗!
조걸은 발끝으로 단단하게 바닥을 짓누르며 들뜨는 어깨를 내리눌렀다.
육체는 한없이 굳건하게 중심을 받치지만, 손끝에서 휘둘러지는 검은 그와 대조적으로 더없이 가벼웠다.
“소림에게 질 수는 없지!”
적들을 몰아붙이는 조걸은 흡사 한 마리의 표범처럼 날렵했다.
등 뒤는 천 길 낭떠러지.
아차 하는 순간 이 높은 성벽 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곳에서 화산의 제자들은 열 배가 넘는 수를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철석간장을 가진 이라고 해도, 심장이 쿵쾅대고 손발이 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움츠러든 기색 따윈 조금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앗!”
“흥분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윤종이 조걸을 어깨로 밀어 내고는 앞으로 치고 달렸다.
밀리던 빙궁도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이, 이놈들이!”
새파랗게 어린 검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신들을 몰아붙이는데 화가 나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죽어라아아아앗!”
노기를 잔뜩 품은 검이 살기등등하게 윤종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윤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반개한 눈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들을 보다 매화검을 휘둘렀다.
카앙.
부드럽게.
카앙.
또 도도하게.
조걸처럼 화려하게 몰아치는 맛은 없다. 하지만 기초에 더없이 충실한 검은 상대의 공격을 정확하다 못해 완벽하게 막아 냈다.
완벽한 방어에 검이 튕겨 나가며 빙궁 무사들의 상반신이 열렸다.
파아아앗!
윤종이 만들어 낸 그 틈을 파고드는 건 당연히 조걸이었다.
“아아악!”
어깻죽지를 관통당한 무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이 중원 놈들이 겁도 없이!”
발작처럼 반격하려던 그는 순간 기겁하며 몸을 바닥에 내굴렸다.
윤종과 조걸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갑자기 검이 불쑥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간격이 벌어지잖아요!”
“…….”
“…….”
당소소가 안색을 굳히며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그녀의 검은 검이라기보다는 비수에 가까웠다. 순간적인 틈이 생길 때마다 마치 비수가 날아들듯 검이 섬뜩하게 파고들어 왔다.
더없이 완벽한 연계.
얼마나 힘겨운 수련을 해 왔는지, 검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여사혼의 눈을 잡아 끈 것은…… 저 검이었다.
쇄액!
“으윽!”
순식간에 어깨를 꿰뚫린 이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파아앗!
어깨에서 뽑혀 회수된 검은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다시 뻗어졌다.
간결하다.
그리 빨라 보이지 않는 검이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일체의 낭비 없이 완벽한 검로를 그린 검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빠르고, 예상한 것 이상으로 강했다.
바로 유이설의 검이 그러했다.
살짝 발을 교차하는 것만으로 막아서는 이와의 거리를 좁힌 그녀의 검이 환상처럼 휘둘러졌다.
“엇!”
순간적으로 분화한 검이 빙궁 무사의 어깨와 발목을 동시에 갈랐다.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한 이는 정확히 자신의 명치를 향하는 검을 맞이해야 했다.
푸욱.
“끅…….”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힘들 만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명치를 뚫은 검이 깊숙하게 박혔다.
검을 부여잡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다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검을 회수한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적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치고 들어가려는데,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힘을 아껴 둬라, 사매.”
유이설은 고개를 돌려 백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의 피를 털어 낸 그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벌써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유이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혼은 멍한 눈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실각하기 전까지는 빙궁의 장로로서 제자들을 키웠다. 오히려 그렇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산이라는 문파는 대체 어떤 수련을 하는 문파기에 젊은 검수들을 저리 키워 냈단 말인가?
그야말로…….
“아니이이이이!”
움찔.
넋을 놓고 앞을 바라보던 그는 돌연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 소리에 움찔했다.
“칼을! 어? 그따위로, 어? 아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진짜! 내가!”
“…….”
“검에 파리 앉겠다! 이것들아! 여기 놀러 왔어?!”
모든 것이 모호한 와중에 하나는 확실했다.
쟤는 성격이 많이 더럽다.
“으으으! 오, 올라왔다!”
그제야 북해의 무인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여사혼이 목소리를 높였다.
“중원의 협사들에게 선두를 내어 주지 마라! 우리는 자랑스러운 북해의 무인들이다!”
“예, 장로님!”
“가자!”
여사혼이 달려 나가며 화산 제자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오?”
“영감님 아직 정정하시네.”
뭔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여사혼은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전장에서 잡념을 가지는 것은 목을 닦고 적에게 내미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니까.
고오오오!
그의 양손에 가공할 음한기공이 맺히기 시작했다.
절벽에서 막 금제를 풀었을 때도, 그는 방표 따위는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이제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상, 빙궁의 평범한 무사들 따위는 그의 적이 될 수 없었다.
“타아아아아앗!”
그의 양손에서 뿜어진 빙살강기(氷殺剛氣)가 한데 몰려 있는 빙궁의 무사들 사이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한기의 폭발이 일어나며 휩쓸린 이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와…… 대단하다.”
“장로 자리를 골패(骨牌)로 딴 건 아닐 테니까.”
“아오! 추워! 씨!”
뭔가 자꾸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사혼은 이제 화산의 제자들에게 말려들지 않기로 했다.
“역적의 패악을 보면서도 눈을 감은 이들은 더 이상 자랑스러운 빙궁의 무사가 아니다! 내 오늘 너희를 단죄하고, 북해에 진정한 하늘을 세우겠노라!”
“이 반역자 놈이 잘도 지껄이는구나! 뭣들 하느냐! 쳐라!”
빙전대주가 고함을 내질렀지만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사혼의 무위에 용기백배한 북해의 무사들이 거칠게 빙전대를 몰아붙였다. 활을 주력으로 하는 그들이 이리 근접한 거리에서 사기가 오른 무사들과 맞붙는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빌어먹을, 이게 아닌데.’
어디서부터 꼬였는가?
빙궁의 성벽은 더없이 높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드높은 성벽을 많은 병력들이 오를 수 있을 만큼 두텁게 쌓는 것은 빙궁이 아니라 빙궁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성벽 위를 지키는 이들의 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던 이유는, 저 높고 미끄러운 성벽을 오르는 이들에게 내력 실린 화살을 퍼붓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투는 단 한 순간도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다!’
이제는 북해의 무사들 뒤에서 건들대고 있는 저 어린놈!
저놈만 아니었어도 이 반역자 무리는 성벽을 채 다 오르기도 전에 피를 뿌리고 나가떨어졌을 텐데!
“이익!”
하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지금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거리를 벌려라! 아래에서 지원이 올라온다!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 앞쪽으로 진을 치고 방어에 치중…….”
그 순간이었다.
‘어?’
빙전대주는 갑자기 느껴지는 위화감에 입을 다물었다.
뭐지?
이 감각은?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구역질이 날 만큼 이상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뭐가 달라졌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딱히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
없다.
조금 전까지 히죽히죽 웃어 대며 그의 속을 뒤집어 놓던 그 어린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
그때, 바로 옆에서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전장에서 한눈을 팔았으면 죽어도 억울할 게 없지.”
빙전대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새하얀 검날이었다.
서걱.
검이 살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