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2)
“저, 저……?”
솟구치는 황금빛 권기에 몸을 실은 청명이 가볍게 성벽 위로 내려서는 걸 본 여사혼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저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저 일을 실행할 만한 무위를 갖춘 이들은 지금 그들 중에서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빙벽을 올라야 하고, 머리 위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저런 판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실행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새파랗게 젊은데 어찌 저리 전투에 익숙하단 말인가?’
숨을 쉬듯 싸우고 또 싸운 이가 아니라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장로님!”
“아.”
여사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청명이 성벽 위로 올라서면서 순간적으로 화살이 멈췄다. 이때 빨리 올라가지 않으면 언제 다시 쏟아질지 모른다.
“올라라! 어서 올라!”
“예!”
손을 뻗어 빙벽을 움켜잡으며 여사혼이 이를 악물었다.
‘저들이 없었다면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 싸우게 된 것이 더없는 행운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는 여사혼이었다.
“당장! 당장 저놈을 잡아 죽여! 어서!”
누군가 행운을 거머쥔다면, 누군가는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성벽을 오르는 북해의 무사들이 행운을 누렸다면, 성벽 위를 지키는 빙궁의 무사들은 더없는 불행을 마주하고 있었다.
청명이라는 이름의 불행을 말이다.
콰득!
섬전같이 뻗어진 검이 막아서는 검을 흘려내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파고들었다.
“끄륵…….”
찔린 이는 이내 피거품을 물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모로 쓰러졌다.
“죽어라아아앗!”
빙궁의 무사들은 모두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파앗!
깔끔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일 검.
파아아아앗!
그 뒤를 이어 연이어 내질러지는 수십 개의 검영(劍影).
청명을 향해 달려들던 이들은 시야를 모조리 메우며 날아드는 수십 개의 검기를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마, 막아야 한…….’
콰득! 콰드드득!
하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섬전보다 더 빠른 검기를 모두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이 몇 개의 검기를 튕겨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채 막지 못한 검기는 무정하게 그들의 육신을 베고 찔렀다.
“끄으윽…….”
단숨에 절명한 이들은 그래도 상황이 나았다.
어설프게 급소를 피한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거꾸러졌다.
파앗!
그리고 청명의 검은 여지없이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회생할 가능성이 없는 이의 숨을 더 붙여 놓는 것은 농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차라리 깔끔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그들이 받아야 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 줄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청명은 잘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에 가까운 이들의 목숨이 스러졌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성벽 위를 붉게 물들였다. 그 광경은 마치 설원 위에 피어난 붉은 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이를 두고 아름답다 표현할 수 없었다.
촤악!
청명은 무심한 얼굴로 걸었다. 한 손에 잡은 검을 늘어뜨린 채,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자세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앳되어 보이는 빙궁의 무사가 손을 떨었다.
‘……미친놈.’
물론 그 어린 얼굴과 달리, 그는 북해빙궁의 무력단 중 하나인 빙전대(氷箭隊) 대주였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산전수전을 모두 겪었건만, 그조차도 몸서리칠 만큼 청명의 얼굴은 차갑고 무정했다.
살검(殺劍).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깔끔하게 상대를 죽이는 검. 저건 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전검(戰劍)이자 살검이었다.
“안 와?”
청명은 제 앞에 선 이들을 보며 싸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가지.”
탓!
발끝이 바닥을 박차는 작은 소음과 함께 그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읏!”
“이 새끼가!”
빙궁의 무사들이 날아드는 청명을 향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십여 개의 검이 시퍼런 검기를 머금고 청명을 노렸다.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차마 눈으로 쫓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가공할 쾌검(快劍)이 뿜어져 나왔다.
카카카캉! 카캉!
청명을 노리고 날아들던 검들이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빛살에 부딪히며 되레 튕겨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빛살은 무기를 잃고 당황한 이들의 가슴팍을 빠르고 깔끔하게 꿰뚫었다.
푸욱! 푸욱!
심장을 뚫린 이들은 마지막까지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부릅뜬 채 허물어졌다.
털썩. 털썩.
동료들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광경에, 빙궁 무사들의 얼굴은 숫제 북해의 설경보다 더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다, 달려들어, 이놈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빙궁의 궁도더냐! 수는 이쪽이 우위다! 둘러싸서 죽여 버려!”
말은 쉽다.
수의 우위로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즉,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더없이 안타까운 것은, 청명은 그들이 달려들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날 인물이 아니란 점이었다.
파앗!
수도 없는 잔영을 자아내며 검이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이들이 검을 미친 듯 휘두르며 몸을 물렸다.
하나.
서걱!
“아아아악!”
이내 발목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린 그들은 보았다. 이미 잘려 나가 피를 쏟고 있는 자신의 발을.
서걱. 서걱!
그사이에도 검기는 허벅지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스쳤을 뿐인데도 허벅지의 살이 쩌억 갈라지며, 새하얀 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피를 본 그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엉금엉금 기어 뒤로 물러났다.
북해의 공기보다 더 써늘한 한기가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청명이 성벽 위로 올라온 후, 불과 숨 몇 모금 내뱉을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이미 이곳은 그에게 완전히 장악당했다.
“흐……. 흐읍…….”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청명에게서 멀어지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청명을 상대로 거리를 내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파르르르.
청명의 검 끝이 환상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파르르르.
처음엔 착각인가 싶을 만큼 작게 시작한 떨림은 이내 점점 커졌고, 마침내 검 끝에서 붉은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성벽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설원 위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겨우내 기나긴 시간을 버텨 낸 매화가 눈 속에서 그 꽃을 피워 내 듯, 온통 새하얗게 물든 세상 사이로 피처럼 붉은 매화가 한 송이 한 송이 벌어졌다.
‘이게…….’
꽃을 피워 내는 검이라니.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놀라운 광경에 공포마저 잊은 그들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흡사 화원 안에 있는 듯 수없이 피어난 꽃들은 북해의 바람을 타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메우는 듯 굉장한 꽃잎의 물결이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차갑기 짝이 없는 검 끝에서 어떻게 꽃이 피어난단 말인가?
하지만 북해의 한기를 고스란히 품은 한철검 끝에서 피어난 꽃은 너무도 생생했고, 또 아름다웠다.
하나.
그 검기의 꽃잎엔 아름다움만 도사리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꽃잎이 빙궁도들의 육체를 사정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하늘 여려 보이기만 했던 꽃잎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살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베여 나갔고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아아아악!”
“이, 이거!”
“피해라! 당장! 하나하나가 다 검기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이 몸을 날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의 주변은 붉은 꽃잎으로 완전히 휩싸인 뒤였다.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날던 꽃잎들이 거짓말처럼 그 기세를 바꿔 맹렬하게 무인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서걱!
꽃잎이 살을 갈랐다.
푸욱!
꽃잎이 몸을 꿰뚫고 통과했다.
아름답기만 했던 꽃잎이 사람의 눈을 현혹하고 그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날아든 나비 떼처럼 불규칙하게 휘몰아치는 꽃잎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자욱한 피 안개가 퍼졌다.
이 자리에서 청명이 보여 준 매화검법은 과거 비무대회에서 선보였던 검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정파에서 가장 사파스러운 검.
검술만을 놓고 볼 땐 사파의 검보다 더욱 요사스럽다 평해지는 화산의 매화검법이 마침내 자신이 가장 눈부시게 활약할 수 있는 전장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털썩.
털썩.
“끄으으윽…….”
환영 같은 꽃잎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쓰러진 몸뚱이들과 흥건하게 흘러내린 피뿐이었다.
“끄으…….”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무릎을 꿇은 이가 숨을 헐떡였다.
쓰러지지 않았을 뿐, 전신에 자잘한 자상을 수도 없이 입은 탓에 피로 완전히 젖은 채로 경련하고 있었다.
찰박.
바닥에 고인 피를 밟고 걸어간 청명은 단숨에 그의 목을 쳤다.
털썩.
고통을 뒤로하고 쓰러진 그를 무심하게 일별한 청명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이 무감한 얼굴로 다시 매화를 피워 내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으라차아아아아아!”
성벽 아래에서 커다란 기합과 함께 조걸이 솟구쳐 올랐다.
“청명아! 우리 왔다!”
“저 새끼, 저거!”
그 뒤를 이어 백천과 윤종, 유이설, 당소소가 튕기는 듯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보던 청명의 얼굴이 일순 확 일그러졌다.
“아니, 빌어 처먹을 땡중 새끼는 이거 하나를 못 올라와서!”
“아, 아미타불!”
성벽 아래서 처연한 불호가 들려왔다. 청명은 세상에서 가장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미타불을 얼어 뒈질 아미타불이여! 아미타불님이 널 보시면 쓸모없다고 귓방망이를 후려치시겠구만!”
“……아미타불.”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청명의 옆에 화산의 제자들이 내려섰다.
청명이 만든 광경을 본 그들은 일순 얼굴을 굳혔다가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에이, 또 뭘 이렇게 화끈하게 저질렀냐!”
“혼자 이만큼 감당하려면 그럴 만도 하죠.”
“그래. 그렇지! 이젠 우리가 한다!”
백천이 청명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
“간다! 저들에게 화산의 검을 보여 줘라!”
“예, 사숙!”
“으랴아아아아아앗!”
백천, 윤종, 조걸이 성벽 위의 무사들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했다.
갑자기 나타난 원군에 당황한 빙궁의 무사들이 움찔했지만, 그런 그들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세 사람은 맹렬하게 검을 휘둘러 갔다.
콰앙!
“비켜라! 다친다! 이 새끼들아!”
“흥분 좀 하지 말라고, 인마!”
조걸이 날뛰기 시작하자 적들이 순식간에 뒤로, 뒤로 밀려났다.
“간다.”
“예!”
유이설과 당소소가 지체 없이 그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이 합류하자 다시 한번 빙궁의 무사들이 크게 주춤하며 뒤로 더욱 밀려났다.
그리고.
“끄응! 아미타…… 에이, 빌어먹을 성벽!”
혜연이 뒤늦게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는 상황을 보자마자 앞으로 내달리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본승이 자비가 부족타 욕하지 마시지요!”
“…….”
누구 하나 청명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달려가 버렸다.
청명은 그 모습을 가만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어쩐지 슬쩍 복잡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떨치고 앞을 응시했다.
“어쩌냐, 빙궁.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그리고 이내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다 쳐 죽여 버려!”
“오오오오오!”
하나로 똘똘 뭉친 화산의 짐승들이 빙궁의 무인들을 날리며 폭풍처럼 휘몰아쳐 갔다.
칼바람이 부는 북해빙궁의 성벽 위.
이제는 제법 결이 분명한 화산의 매화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