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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01화 (499/1,567)

501화. 우리 애들은 좀 사납다고. (1)

궂은 날씨로 늘 컴컴하던 북해의 하늘도 오늘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햇살이 환하게 대지를 비췄다.

타다다다닷!

그 청명한 하늘 아래, 화산의 제자들이 눈 부신 설원을 박차고 달렸다.

거리를 좁힐수록 성벽은 더욱 까마득해졌다. 선두에 선 백천은 얼굴을 굳혔다.

“청명아!”

“어.”

“위로? 아니면 성문으로?”

“뭐 빤한 소리를 하고 있어? 올라야지!”

“오냐!”

백천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바닥을 그대로 박차고 솟아오른 후 매끈한 성벽을 마치 평지처럼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 화산의 제자들도 날다람쥐처럼 빙궁의 벽을 타고 올랐다.

“저게……?”

“세상에!”

뒤따르던 북해의 무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북해의 겨울은 혹독하고, 거의 매 순간 눈보라가 몰아친다.

때문에 겨울 동안 저 성벽의 표면은 들러붙은 눈이 얼며 빙벽이나 다름없이 변한다. 그런데 저 화산의 제자들은 그 미끄러운 빙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 번 본 광경임에도 넋을 놓고 보던 여사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함 쳤다.

“성벽을 올라야 한다! 저들에게 뒤처지지 마라!”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의지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승심에 화산의 제자들처럼 성벽을 향해 뛰어올랐던 이들이 단박에 미끄러지며 볼썽사납게 처박혔다.

“아악!”

“큭! 조, 조심하십시오! 말도 안 되게 미끄럽습니다!”

두어 번 더 벽을 박차고 오른 이들도 더는 높이 오르지 못하고 빙벽에 들러붙는 게 고작이었다.

고개를 드니 이미 성벽을 거의 절반 가까이 훌쩍 오른 화산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저게 되는 거지?’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과거 빙궁의 장로였던 이들은 그나마 수월하게 성벽을 오르고 있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저 젊은 중원의 무인들처럼 쉽게 나아가진 못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저 나이에 빙궁의 전 장로들만큼 강하지는 못할 텐데, 이게 대체 무슨 기사(奇事)란 말인가?

“무리하지 말고 일단 성벽을 오르는 데 집중해라!”

“저, 저기! 중원의 무인들이 밟고 올라간 곳의 얼음이 깨져 있소! 저쪽으로!”

북해의 무인들은 온갖 잡념을 지워 내곤 빙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도 무인이니 천천히 오르고자 하면 못 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이 땡중 새끼가 빠져 가지고! 빨리 빨리 안 뛰어 올라가?”

“시, 시주. 어, 얼음이 너무 미끄럽소!”

“여하튼 소림 새끼들 느려 터져 가지고!”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고 아미나발이고, 이 새끼야!”

절벽을 타고 오르며 황포를 입은 중을 걷어차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황망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저들은 뭐 하는 이들인가?’

파파파파팟!

그러거나 말거나 화산의 제자들은 일직선으로 성벽을 차고 올랐다. 멀리서 지켜보면 마치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잡아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소야! 조심해라!”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올라가세요, 사숙!”

“오냐!”

백천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빙벽이고 나발이고, 절벽이라면 신물이 나는 화산의 제자들이다. 물론 다소 미끄럽기는 하지만, 제멋대로 굴곡지고 균열이 간 화산의 절벽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타타타탓!

그 순간 그의 아래에 있던 조걸이 순식간에 위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먼저 가서 길을 뚫겠습니다, 사숙!”

“걸아! 무리하지 마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조걸이 빛살처럼 성벽을 올랐다. 마침내 그의 눈에 성벽 끄트머리가 보였다.

우선은 성벽 위로 올라서…….

그때였다.

‘응?’

하늘과 맞닿은 성벽의 끝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지켜보듯 말이다.

“그래 봤자…….”

으응?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리던 조걸이 순간 눈을 끔뻑였다.

고개를 내민 이들이 뭔가 길죽한 것을 내밀고 아래쪽을 겨눈 것이다. 휘어진 긴 나무 장대와, 그 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 뾰족한…….

“활?”

“쏴라아아아!”

슈우우우웅! 슈우우우웅!

아래로 겨눠진 화살이 그대로 일제히 발사되었다. 자신을 향해 무섭게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보며 조걸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미친! 뭔 무인들 싸움에 활이 튀어나와?! 으아아아!”

조걸은 매화검으로 쏘아지는 화살을 빠르게 쳐 냈다.

무인들이 내공을 실어 쏘는 화살에는 평범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제아무리 절벽을 타고 오르는 데 익숙하다지만 미끄러운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그 화살을 모두 쳐 낸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이……!”

조걸이 절벽을 박차며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미끌.

“어?”

디뎠던 발끝이 절벽에서 미끄러지며 다리가 아래로 쑥 빠졌다. 자세가 흐트러지니 당연히 제대로 화살을 쳐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얼굴과 어깨로 날아드는 화살을 가까스로 막아 낸 그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성벽에서 튕겨나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빌어먹으으으으을!”

“걸아!”

“조걸아!”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던 조걸은 어느 순간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응?”

조걸은 더 가까워지지 않는 땅을 확인하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

청명이 그의 발목을 움켜잡은 채, 말 그대로 지옥의 악귀 같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이해한 조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처, 청명아, 그게 아니고…….”

“사형은 이 싸움 끝나고 보자.”

“…….”

조걸을 획 휘둘러 성벽에 다시 붙인 청명이 위쪽을 바라보았다.

“사숙!”

“그래, 간다!”

백천이 뇌전처럼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쏴라!”

슈유융! 슈우우우웅! 슈웅!

어김없이 화살 비가 쏟아졌지만, 백천은 냉정하게 검을 휘둘러 깔끔하게 쳐 냈다. 선두에 선 그와 유이설은 별다른 무리 없이 화살을 깔끔하게 걷어냈다.

하지만.

“아아아악!”

“화, 화살이!”

아래쪽에서 뒤따르던 이들은 성벽을 오르며 화살에 대응할 수 없었다.

오르던 이들이 하나둘 화살에 맞아 추락하는 모습을 본 윤종이 얼굴을 굳혔다.

“내가 가서 막아 주어야…….”

“일단 두고 올라가! 막아 주는 것보다 저 새끼들 처리하는 쪽이 빨라!”

“알았다!”

윤종도 가타부타 말없이 청명의 지시에 따라 속도를 높였다.

화살을 쏘아 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성벽 위에서 지휘를 하는 이가 악을 써 댔다.

“쏴라! 쏴! 앞쪽으로 집중해라! 저 새끼들부터 떨어뜨려!”

“예!”

“기름! 기름은 멀었느냐! 끓는 기름 가져와라!”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소리를 들으며 백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숫제 전쟁이군.’

빙궁과 싸운다고 해서 지난 만인방과의 싸움 같은 걸 생각했건만, 설마 시작부터 공성전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다.

만약 절벽에 익숙한 그들 없이, 저들만으로 이 성벽을 올랐다면 그 피해는 말도 못 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카각! 콰득!

화살은 가장 선두에 있는 백천에게로 집중되었다. 검에 부딪치는 힘과 손목으로 전해지는 내력 탓에 그의 발도 점차 느려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모조리 쳐 내며 절벽을 오른다는 건 천하의 백천이라도 힘겨웠다.

“쏴라아아아아!”

“저 새끼가!”

백천이 이를 뿌득 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숙. 어깨.”

“응?”

그의 바로 뒤를 따라 성벽을 오르던 유이설이 백천의 어깨를 걷어차고 단번에 몸을 붕 띄워 올렸다.

“사고!”

허공으로 솟아오른 그녀는 몸을 한차례 빙글 뒤집었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검을 성벽 위로 날려 버렸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앗!

맹렬하게 회전하는 검이 활을 쏘기 위해 몸을 드러낸 이들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

“숙여라!”

휘이이이잉!

황급히 몸을 움츠린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이 무서운 기세로 스쳐 지나갔다.

딱히 누군가를 베어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백천의 부담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으라차아아아앗!”

백천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벽을 힘껏 내달려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유이설은 다시 돌아오는 검을 받아 낸 후 미련 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받아.”

“야, 이! 빌어 처먹을!”

욕을 짓씹으며 빠르게 몸을 날린 청명이 그녀를 잡아 성벽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허공을 한 번 박차며 다시 성벽에 들러붙었다.

“그거 한 번 봤다고 바로 써 먹냐!”

“받을 수 있으니까.”

저 덤덤한 말투가 사람 속을 더 뒤집었다.

“앓느니 죽어야지!”

청명은 이를 박박 갈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큭!”

백천의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활을 쏘는 이에게 가까워질수록 화살에 실린 힘은 더욱 강해진다.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직격하는 충격에 백천의 발이 성벽에서 미끄러졌다.

투둑!

하지만 그가 중심을 잃기 전에 윤종의 손이 그의 발을 굳건하게 받쳤다.

“밟고 올라가십시오, 사숙!”

“그래!”

백천이 이를 악물고 위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건 의지만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끄러운 성벽을 타고 오르며 쏟아지는 수십 발의 화살을 일일이 막아 내는 게 어디 쉽겠는가?

‘뭔가 다른 수를…….’

그때 백천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어이, 땡중.”

“예, 시주!”

“밥값 한번 하자.”

“예?”

백천이 반사적으로 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벽에 붙어 있던 청명이 파앗 하고 위쪽으로 뛰어오르더니 천천히 혜연 쪽을 향해 떨어졌다.

혜연도 순간적으로 청명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음이 깨어져 생긴 틈에 두 발을 단단히 고정한 뒤 순간적으로 성벽과 수직으로 상체를 젖혔다.

반장을 하며 우수를 허리에 붙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황금빛 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저 미친놈이?

허공에서 살짝 몸을 웅크렸던 청명이 혜연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 순간 혜연이 허리춤에 붙인 우수를 벼락처럼 내질러 청명의 발을 쳐 올렸다.

콰아아아아아!

혜연의 금권(金拳)이 내뿜은 경기가, 마치 승천하는 황금빛 용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 경기에 몸을 실은 청명은 용을 탄 선인처럼 단숨에 성벽을 넘어 하늘 위까지 솟아올랐다.

“뭣!”

“뭐, 뭐냐?”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빙궁의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미친놈이!”

“와……. 미쳤다.”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눈을 뺏길 만큼 엄청난 광경이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에 작렬하는 태양.

그리고 그 태양을 등진 청명.

그는 흡사 먹이를 노리고 강하하는 매처럼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 막……!”

그 순간.

반사적으로 외치려던 이들이 모두 움찔했다.

청명의 눈과 그들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차게 가라앉은 청명의 눈빛을 보는 순간,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파아아앗!

몸을 한차례 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른 청명이 성벽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몸을 굽히며 바닥을 짚은 그는 딱히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푸우우우웃!

그의 앞을 막아섰던 이들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휘청대며 피를 쏟던 그들은 이내 하나둘 털썩 털썩 쓰러졌다.

“…….”

성벽 위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촤악!

가볍게 검을 휘둘러 피를 턴 청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시작하지.”

매화의 검수가 새하얀 무인들을 향해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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