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499화 (497/1,567)

499화. 그럼 기억하게 해 주지. (4)

“공자님!”

가죽 옷을 입은 이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설소백 앞에 부복했다. 그들의 눈에선 연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반드시 살아 계실 거라 믿었습니다.”

설소백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간악한 설천상이 전대 궁주님을 시해한 그 순간부터 저희는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때 설소백의 곁에 서 있던 여사혼이 부복한 이들을 보며 단호하게 일렀다.

“공자라는 호칭은 더 이상 쓰지 않겠네. 이제부터는 소궁주님이라 부르게.”

“소궁주님 말입니까?”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확한 호칭은 궁주님이 되어야 하겠지만, 소궁주님께서는 설천상을 쓰러뜨리고 당당한 빙궁의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궁주라는 호칭을 쓰지 않겠다 선언하셨네. 그러니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소궁주님이라 칭하도록 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소궁주님! 북해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설소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한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감격하실 것입니다.”

“크흑. 소궁주님.”

실로 뜨거운 정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집 바깥에서 창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화산 문하들의 표정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뭔가 마음 복잡해지는 광경이네요.”

“그러게.”

한이명과 여사혼은 빙궁을 치기 위해 북해에 곳곳에 숨어 있던 전대 궁주의 세력들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중에는 설소백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있었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던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몰랐던 이들이 감격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설소백의 입장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궁주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아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저토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대견함보다는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모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전대 궁주를 따르던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로구나.”

윤종과 백천의 말을 듣던 당소소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음?”

“제가 좀 이야기를 해 봤는데, 전대 궁주의 심복들도 있지만 어느 쪽도 따르지 않고 은거한 이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그래?”

“네. 그런 이들이 이번에 소식을 듣고 모두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에요.”

“민심은 천심이라는 거군.”

설천상이 반역을 일으킨 걸 봤을 때도 굳이 맞서 싸우려 들지 않던 이들이 이번엔 모두 칼을 들고 일어섰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북해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한이명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과거 그들이 설천상에 맞서 싸우지 않은 이유는 설 공자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소백 공자가 없다면 설천상을 끌어내린다고 해도 궁주가 될 사람이 없으니까요.”

“아아.”

“그러니 설천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 공자를 죽이려 한 것이지요.”

백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이면 모두 모일 것입니다. 늦게 오는 이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진격하는 와중에도 합류할 테니까요.”

그 말에 백천은 다시금 모여든 이들의 수를 확인했다.

‘이백 정도인가?’

여기에 빙정 광산에서 노역을 하던 이들을 더하면 총 사백 정도다.

“빙궁의 무사들은 그 수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못해도 천은 될 겁니다.”

“……천씩이나.”

백천의 안색이 슬쩍 굳어졌다.

눈으로 본 빙궁의 규모를 감안한다면 사실 그 정도야 당연하겠지만, 직접 들어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겠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이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 중에도 분명 설천상의 폭정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 와중에 설 공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이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설 공자는 북해의 적통이니까요.”

백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한이명 쪽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합류할 이들을 감안하고, 저쪽에서 전향하는 이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절대적인 수에서 열세라는 건 부정할 수 없군.’

백천은 속으로 생각하며 포권을 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한이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설마 화산의 제자 분들과 함께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인연이라는 건 참으로 묘하군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북해는 결코 화산을 잊지 않을 겁니다.”

한이명이 포권을 하고 다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 보던 백천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개소리지, 뭐.”

“…….”

그건 좀 너무 직설적인데.

백천이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저 말대로 저쪽에서 전향하는 이들이 나온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쪼그려 앉아 백아의 배를 콕콕 찌르던 청명이 휘휘 손을 내젓는다.

“사람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응?”

“개개인의 생각은 원래 다 다르잖아. 그런데 단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이면, 그 개개인의 의견 같은 건 가려지고 사라지면서 안 보이는 거지.”

“…….”

“반란군에 속한 모두가 설마 다 반역을 절실히 원해서 싸운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사람은 원래 그럴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가도 앞에서 명령하고 옆에서 싸우는 걸 보면 어어 하다 휩쓸려 버리고 그래.”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탈해서 나와 줄 무사들을 기대하는 건 이해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질까?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살짝 이죽거리는 듯한 청명의 말에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평소에는 실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 놈이 이럴 때는 또 이상하리만치 날카롭다. 이럴 때면 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단호한 확신이 어려 있어 듣는 이를 뒤흔들었다.

“그럼 승산이 없다는 거냐?”

“그건 또 뭔 헛소리야?”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버럭 소리쳤다.

“내 사전에 패배란 없다!”

백천의 얼굴이 심드렁해졌다.

그러시겠지.

눈을 부라린 청명은 백아를 다시 옷 안으로 잘 밀어 넣고 말했다.

“승산이니 뭐니 해 대는 건 방법을 못 찾는 놈들이 하는 말에 불과하지. 이 경우엔 방법이야 너무 빤하잖아?”

“……무슨 방법?”

백천의 물음에 답한 건 청명이 아니라 유이설이었다.

“궁주.”

“……응?”

그녀의 덤덤한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냐?”

“북해인들은 궁주 말 따름. 궁주는 설가만 될 수 있음.”

“그렇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웃었다.

“뭐,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어쨌건 북해 사람들이 그리 생각한다고 하니 차라리 다행이지. 설천상인지 뭔지 하는 궁주 놈 모가지만 따 버리면, 전력이 밀리든 말든 그 순간 북해빙궁을 통째로 꿀꺽할 수 있다는 거야.”

“남은 설가가 설소백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백천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대가 북해빙궁이 아니라 설천상 하나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가능성이 올라간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닙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윤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죠. 마교를 상대해야 합니다.”

“…….”

마교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중원 전체를 암흑으로 밀어 넣었던 마교입니다. 아무리 천마가 없다고는 하지만 빙궁의 전력만으로 마교를 상대할 수 있을지…….”

그때 청명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사형.”

“응?”

“미쳤어?”

윤종이 움찔하며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청명은 전에 없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나와 버렸어? 빙궁으로 마교를 어쩌고 저째?”

“아, 아니. 네가 그러자며…….”

윤종이 살짝 주눅 든 얼굴로 웅얼거리자 청명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답도 없네, 진짜.”

그리고 기가 막힌단 얼굴로 말했다.

“쟤들이 진짜 마교면 북해고 나발이고 나는 지금 뒤도 안 돌아보고 중원까지 도망쳤어. 어디 북해빙궁 따위(?)를 끌어들여서 마교랑 싸워? 차라리 칼 물고 엎어지는 게 낫지.”

“……그럼? 쟤들은 마교가 아니라는 거냐?”

“마교는 마교지. 전에 내가 말했잖아. 마교는 여러 개의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쟤들은 그중 하나일 뿐이야. 저리 하나만 따로 움직이는 걸 보면 제대로 힘을 갖춘 곳도 아냐.”

“아…….”

윤종이 살짝 안심한 듯 한숨을 쉬려는데, 가만 듣던 당소소가 입을 쩍 벌렸다.

“그, 그럼 제대로 된 마교도 아니고 고작 그 지부 하나가 북해를 제멋대로 가지고 놀고 있단 거예요?”

“그렇지.”

“……세상에.”

그녀는 경악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마교의 주된 세력이 아니라는 건 다행한 일이지만, 십여 개가 넘는 교구 중 하나만으로도 북해라는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건 정말 경악할 일이었다.

그때 잠깐 고민하던 백천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청명을 응시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뭘 또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어? 여기에 마교의 본단이 있었으면 빙궁 놈들은 이미 싹 다 죽었어.”

“…….”

“그리고…….”

청명은 뭔가 말을 더 하려다 말고 손을 내저었다.

“아냐. 이런 건 별 의미가 없고. 여하튼 저놈들은 그냥 마교의 잔당일 뿐이야.”

“……그럼 일이 좀 쉽겠네.”

“쉬워?”

청명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다들 잘 들어.”

“응?”

“중원의 운명이고 천마의 부활이고, 다 좋아. 다 좋은데……. 이번 싸움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딱 하나만 머리에 제대로 담아 둬.”

“뭔데?”

“절대 죽지 마.”

“…….”

잠시 말을 멈춘 청명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뒈지면 다 끝이야. 천마가 부활하건, 북해가 박살이 나건, 일단 내가 살아야 뒷일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일단 위험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절대 여기서 목숨을 건다거나 하는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내 말 무슨 소린지 이해했어?”

화산 일행이 굳은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청명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보았다. 이는 결국 청명의 생각에, 이번 전투가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가혹한 전투가 될 거란 의미였다.

“걱정 마라.”

그때 백천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청명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위기에 처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테니까. 네가 도와달라고 해도 무시하고 튈 거다.”

그 말에야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야 내 사숙이지.”

서로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혜연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미타불.’

하여튼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때 청명이 눈을 빛냈다.

“아무튼, 일단 처음 해야 할 건 하나야.”

청명의 입꼬리가 뒤틀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설천상을 죽이고 빙궁을 찬탈한다! 우선 거기부터 시작이다.”

* * *

한이명과 여사혼이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달랬다.

‘이날이 오고 말았구나.’

모인 이들 모두가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그동안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열 기회를 손에 넣은 것이다.

“한마디 하게나.”

“여기서는 장로님이 나서 주셔야 합니다.”

“…….”

“설 공자가 상징이 된다면, 여 장로님께서는 구심점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한이명의 말에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평소라면 겸양을 보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나는 여사혼이외다. 모두 나를 기억하시오?”

“장로님!”

“일 장로님!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열한 이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여사혼을 맞았다. 그 목소리에 휘몰아치는 패기를 느끼며 여사혼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연이야 다 다르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의 뜻은 모두 같을 것이라 믿소.”

그의 목소리가 웅장하게 퍼져 나갔다. 과거 빙궁의 이인자로서의 위엄이 넘쳤다.

“설천상 저 간악한 자가 북해빙궁의 궁주에 오른 이후 북해는 도탄에 빠졌고, 북해인들은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소. 그런데 심지어 저자는 결코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 이들을 이 땅에 불러들였소이다!”

여사혼이 모인 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설천상을 끌어내리고 진정한 북해의 적통을 궁주의 자리에 모시려 하오! 그리하여 뒤틀린 모든 것을 바로잡겠소이다! 그대들은 이런 나의 뜻에 함께하겠소?”

그 물음에 패기로 가득한 커다란 고함이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여사혼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갑시다! 북해의 혼을 되찾을 시간이오! 북해는 온전히 북해인들의 것. 흙발로 이 땅을 짓밟은 이들과, 그들에게 북해를 팔아넘긴 이들에게 그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오!”

“오오오오오!”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출발하라!”

“빙궁으로 간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도열한 이들이 한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이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이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유이설, 윤종, 조걸, 청명, 당소소. 그리고 혜연까지.

“가자.”

백천의 눈이 서느렇게 빛났다.

“우리 앞을 막는 이들에게, 화산의 검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어라.”

“예, 사숙!”

“예, 사형!”

의지로 가득한 대답을 들으며 백천이 몸을 돌렸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렇게 그가 절도 있고 멋들어진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시주. 저는 소림입니다만.”

“아, 좀 다물고 있어! 이 눈치 없는 땡중 새끼야!”

“…….”

청명이 혜연을 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며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렇지.’

멋은 얼어 죽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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