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그럼 기억하게 해 주지. (3)
“네?”
설소백이 당황한 눈으로 한이명과 백천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아이의 반응을 살핀 백천은 한이명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 눈빛엔 담담한 힐난이 깃들어 있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냐는 의미였다.
한이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헌앙한 청년의 비난 어린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뭔가 크게 잘못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설소백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셨을 겁니다.”
“……예.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란 말에 한이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자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자 설소백이 움찔하며 눈을 파르르 떨었다.
한이명은 안타까움을 억지로 밀어 내며 다시금 단호하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빙궁의 전대 궁주의 자제이시며, 제가 충심을 다해 모셔야 할 분입니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가 감히 공자의 아비인 척 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설소백은 여전히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 눈만 커다랗게 뜬 채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를 가만 지켜보던 여사혼이 한숨을 내쉬며 한이명을 도왔다.
“공자께서는 이 북해를 이끌어야 할, 설가의 유일한 적통이십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제는 공자께서 이 북해를 이끄셔야 합니다.”
설소백은 망연한 얼굴로 여사혼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나타난 빙궁의 장로라는 자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을 강요하는데, 어린 그가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저, 저는…….”
“공자.”
여사혼이 단호하게 말했다.
“비명에 가신 선친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실 겁니다.”
“아…….”
“세상에는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북해의 뒤틀린 상황을 바로잡고, 북해인들을 구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말을 하던 여사혼은 이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어 주십시오. 공자만이 북해를 구하고, 북해인들을 해방하실 수 있습니다. 북해의 운명은 오로지 공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설소백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의 북해인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이명을 따라 북해를 누비며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가?
하지만…….
‘내가?’
생각만으로도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전대궁주의 아들이니, 북해의 운명이니 하는 말이 귀에만 머무르고 가슴에 와닿진 않았다.
“공자.”
한이명이 또 무어라 입을 뗐다.
한편, 오가는 대화가 지지부진하다 생각한 백천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움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
잔뜩 심통이 나 있는 청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주 위험한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다.
상황 파악을 마친 백천은 재빠르게 화산의 제자들에게 눈짓했다.
혹시나 청명이 뭔가를 저지르려 하면 잽싸게 막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신호는 조금 늦고 말았다.
“아니, 거…….”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한심하다는 눈으로 한이명과 여사혼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한테 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예?”
“뭔 콩알만 한 애더러 북해를 구해야 한다느니, 그걸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느니.”
청명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애가 그걸 다 하면 어른은 뭐 하고? 어? 어른은?!”
“…….”
“하여간!”
버럭 소리를 지른 청명이 손짓하며 설소백을 불렀다.
“이리로 와 봐. 이리!”
“…….”
“이리 와 보라니까?”
하지만 설소백은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할 뿐, 차마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청명은 그 반응을 보더니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왜 이래?”
백천은 그를 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너 같으면 가겠니, 이 새끼야?’
네가 인마, 저번에 쟤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아마 지금 설소백의 눈에 청명은 산적 두목보다 훨씬 더 흉악해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설소백의 입장에서는 슬프게도, 청명은 오지 않는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청명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어깨를 쭉 당기더니 자신의 앞에 놓았다.
“뭐? 북해의 운명?”
“…….”
여사혼의 한이명의 얼굴이 미묘하게 떨떠름해졌다.
역시 저 젊은 도사는 몇 마디 안 되는 말만으로도 사람 속을 뒤집는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쥐톨만 한 애한테 북해의 운명을 맡겨요? 댁들은 뭐 하고?”
“이보시오, 도장. 북해에서 설가라는 건…….”
한이명이 나름 항변해 보려 했지만, 청명이 그 말을 다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설가가 중요하면 아저씨들이 다 뒤집어엎어 놓고 북해를 가져다 바치시든가. 뭔 애한테 네가 운명을 짊어졌느니, 네가 해야 한다느니……. 에라!”
청명이 눈을 부라린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요만한 애한테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면 북해는 이미 끝난 거니까.”
청명의 마지막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소 싸늘했다. 그 차가운 어투에 한이명이 슬쩍 안색을 굳혔다.
“그건 말이 조금 심하지…….”
한이명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여사혼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도장의 말이 틀리지 않소.”
청명은 그런 여사혼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도 그저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설 공자의 뒤에 숨을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 말을 듣고서야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설소백을 빙글 돌려 그의 빵빵한 볼을 양손으로 쭉 잡아 늘렸다.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저, 저는…….”
“그냥 얼굴이나 보여 주면 된다. 남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해.”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묘한 눈으로 그를 보다 속닥거렸다.
“저 녀석, 이상하게 친절하네?”
“그러게요. 저럴 놈이 아닌데.”
“요즘 저 새끼 좀 이상합니다, 사숙.”
“맞아. 이상해.”
하지만 한이명과 여사혼은 그들의 반응이 황당하기만 했다.
‘친절?’
‘저게?’
누가 봐도 괴롭히는 것 아닌가?
저 화산의 제자라는 이들은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한테 떠넘기려 하지 말고, 해야 할 게 있으면 직접 해야죠.”
청명의 말에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외다. 우리는 이번 전투에 한 목숨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을 거요.”
“착각하지 마세요.”
“…….”
그런데 의외로 돌아온 건 청명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여사혼은 흠칫하며 그를 보았다.
청명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목숨을 내던지는 건 책임을 지는 게 아니에요. 명심하세요. 중요한 건 이기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예요. 일을 벌여 놓고 죽어 버리는 건 후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북해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건만 청명은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잠시간 말이 없던 그는 고개를 내리지 않은 채, 설소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할 것 없어.”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바보짓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 * *
사람이 타인의 행동을 모두 완벽히 이해할 순 없다.
그런 빤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설천상은 어리석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라는 건 상대를 적당히 이해하는 척할 뿐, 다른 이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지.’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합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얼음보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공동.
그 한가운데에 백발의 노인이 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 더없이 경건한 자세로 절을 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그리 크게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예와 신심을 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설사 저 노인이 신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아수라 형상이라고 해도 대단히 이상할 건 없다.
정말로 이상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설천상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저 정도 되는 자가 타인에게, 그것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 저리 완벽한 복종을 표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대체 천마가 무엇이기에?’
천마.
그 이름은 수도 없이 들었다. 강호에 발을 붙인 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천마가 강대하고 위대했더라도, 결국엔 이미 백여 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 아니던가?
어떻게 사람이 백 년 전에 죽은 이에게 저리 완벽한 경건함을 표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도 저만큼 지고한 경지에 오르고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괴했다.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순간,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있던 주교가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뒤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
얼핏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감히 옅은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주교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신실함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스으윽. 스으으윽.
스산한 바람 소리 속에서 주교의 옷과 몸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공동을 완전히 빠져나온 주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설천상을 바라보았다.
설천상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주교를 뵙나이다.”
자신에게 꽂히는 서늘한 눈빛을 느끼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기가 도는 눈으로 설천상을 응시하던 주교가 천천히 입을 뗐다.
“궁주.”
“예! 주교시여.”
“나는 그대에게 빙정을 가져오라 했다.”
설천상은 고개를 숙인 채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설마 그 화산 놈들이 빙궁의 무사들을 물리치고 광산의 빙정을 모조리 든 채 달아날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 주교시여.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죄수들의 금제를 풀었습니다. 설마 그 금제가 풀리리라고는…….”
“궁주.”
차디찬 목소리에 설천상이 움찔하며 다시 몸을 움츠렸다.
“…….”
“나는 빙정을 가져오라 했다.”
설천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한낱 불신자에 불과한 그대를 교도들을 움직여 가며 도운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다. 그런데 그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더러운 불신자인 너 따위를 내가 살려 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쿵!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천상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건 설천상의 의지가 아니었다. 주교가 뿜어낸 기운이 그를 짓누른 것이었다.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지독한 기운이었다.
“주, 주교시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이 목숨을 걸고 반드시 빙정을 회수하겠나이다!”
“여전히 모르는구나. 버러지 같은 놈.”
주교의 얼굴은 점차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우리는 이 순간을 위해 자그마치 백 년을 기다려 왔다.”
“저, 저는…….”
“빙정을 구하지 못해 부활의 대업이 어긋난다면 네 목숨 따위로는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북해의 모든 눈이 피로 붉게 물들어도 우리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설천상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말은 결코 허무맹랑한 협박 같은 게 아니다. 이들은 정말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작자들이라는 걸, 이미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틀이다.”
주교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이틀이 지나도 빙정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 탓에 내가 배알의 의식을 치르지 못하게 된다면, 빙정을 회수한다 해도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겨,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설천상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를 싸늘한 눈으로 일별한 주교는 대답도 없이 다시 공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는 설천상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수라의 형상을 바라보며 진언을 외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슬쩍슬쩍 살피던 설천상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조심스레 주교에게서 멀어졌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교의 입에선 수없이 반복해 왔던 진언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불어온 칼바람이 아수라가 새겨진 거대한 천을 뒤흔들었다.
펄럭이며 들린 천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교는 갈망에 들끓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마의 씨앗은 바로 이곳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완전히 공동을 빠져나온 설천상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훔쳤다.
땀은 손을 흥건히 적시다 못해 땅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마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 이들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저 주교를 마주할 때마다, 설천상은 자신이 커다란 착각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악마와 손을 잡은 게 아니라, 악마의 제단 위에 올라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나…….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설천상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남은 것은 협력하든가, 저들의 손에 처참히 죽는 길뿐.
그리고 그는 후자를 택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마굴(魔窟)을 빠져나온 그는 대기하고 있던 장로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빙궁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빙정을 가져간 놈들을 찾는다.”
“예!”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라! 내 반드시 그놈들을 찢어 죽이겠다!”
설천상의 고함이 북해의 대지 위로 칼날처럼 울려 퍼졌다.
시야를 가리던 눈보라는 어느새 말끔히 멎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