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그럼 기억하게 해 주지. (2)
토도도도도도!
짧은 다리가 쾌속하게 눈길 위를 누볐다.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멈춰 서선 주변을 살피고 다시 질주하기를 여러 차례.
이번에도 주변을 빠르게 살핀 백아는 다시 그 짧은 다리를 놀…….
“아오!”
뻐어어어엉!
청명이 백아를 뻥 걷어찼다. 허공으로 치솟은 백아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재빨리 몸을 돌려 착지하더니 방어 자세를 취했다.
“뭘 젠장, 사흘째 달리기만 해! 이거 똑바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달려들려 하자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잡고 늘어졌다.
“참아라! 청명아, 참아!”
“왜 짐승한테까지 성질이냐!”
“짐승이고 나발이고!”
돌이 된 듯 딱 멈춘 백아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맺혔다.
“너 분명 지금 제대로 찾아가는 거 맞지? 대충 아무 데나 가고 있는 건 아니지?”
키이…….
“어디 부지런히 마음대로 가 봐.”
청명의 눈이 시퍼런 살기를 머금었다.
“제대로 못 찾아가면 그날 화산 재산 목록에 담비 목도리 하나 추가되는 거야.”
백아가 점점 더 땀을 흘리는 걸 보며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야, 청명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넓은 북해에서 냄새 하나 가지고 사람을 어떻게 찾냐?”
“못 해?”
“당연히 못 하지.”
“그것도 못 하는 게 영물이랍시고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고?”
“…….”
청명이 백아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들으라는 듯 외쳤다.
“저게 영물만 아니었으면 벌써 목도리 됐지! 그래도 영물이라고 먹여 주고 재워 줬는데, 영물 값 못 하면 제자리로 가는 거지.”
“……제자리가 어딘데?”
“아까 뭐 들었어? 당연히 보물 창고지!”
“…….”
결국 대꾸하기를 포기한 백천은 허허 웃었다.
‘이건 도사고 어쩌고의 문제도 아니야.’
평범한 사람도 이러지는 않는다. 인성계의 상록수도 아니고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인성이 저토록 더러울 수가 있는가?
“아니, 맹소 그 양반 덩치도 좋고 호방하기에 믿었는데 사기를 치네? 이게 무슨 남만 최고의 영물이야! 하는 짓이라고는 벌벌 떨고 밥 축내는 것밖에 없는데!”
“……물고기는 엄청 잡았잖아.”
“거참 아주 잘했네, 거!”
화산의 제자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여사혼이 헛기침을 하고는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도장. 아무래도 지금이라도 방법을 바꾸는 것이…….”
간수들과 빙검대를 착실하게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전대 궁주의 수하들은 몸을 정비하기 위해 과거 빙궁의 은신처 중 하나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여사혼만은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하고 화산 일행에 따라붙었다.
저들을 통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소백의 행적을 찾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옳은 말이긴 하니 화산의 제자들은 그의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설소백을 찾는 것과, 그와 한이명을 설득하여 빙궁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여사혼이 있으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백천이 살짝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작게 긁적였다.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게 마땅찮지 않습니까?”
그러자 여사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장.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예. 말씀하십시오.”
“한이명은 굉장히 유능한 이였습니다.”
그가 대뜸 한 말에 백천이 살짝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제대로 모습을 숨기고자 했다면, 도장들께서 그를 발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예. 그건 저희도 그리 생각합니다.”
의도가 있어서 그들을 탐색하려 했겠지. 그건 이미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나온 말이었다.
“지금 그는 빙궁의 추적을 피해 행적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면 웬만해서는 그를 찾을 수 없…….”
키이이이이잇!
“……는데.”
모두의 시선이 백아에게로 쏠렸다.
백아가 짧은 뒷다리로 땅을 탕탕 치면서 앞발로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만 앞발?”
여사혼이 입을 쩌억 벌렸다.
뭔 담비가 주둥이도 아니고 앞발로 뭘 가리키는가?
화산의 제자들 역시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거 아무래도 담비 아닌 것 같아.”
“영물이라잖습니까.”
“아니. 아무리 영물이라도 그렇지.”
영물이라도 짐승은 짐승인데…….
하지만 청명은 그런 것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찾았다고?”
키이!
“진짜지?”
키이!
그 자신감 넘치는 고갯짓에 청명은 흐뭇하게 웃으며 백아의 작은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거짓말이면 진짜 목도리 만든다?”
무시무시한 위협에도 백아는 자신 있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키잇!
백아가 섬전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쫓아!”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화산의 제자들이 백아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홀로 남겨진 여사혼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멍하니 보다 재빨리 뒤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정신들인가?’
저 담비가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곳은 북해다. 이 드넓은 북해에서 냄새로 사람을 찾는다니, 차라리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모래알갱이 하나를 찾아내는 게 빠를 것이었다.
솔직히 이런 방식으로는 사흘이 아니라 한 달을 찾아도 설소백이 싸고 간 오줌도 발견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내가 이들을 너무 믿었나?’
저들의 무위는 확실히 여사혼을 혹하게 만들 만했다. 몇 되지 않는 인원으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냐는 의심을 순식간에 부술 만큼 저들이 보여 준 검은 강하고 강렬했다.
하지만 무위는 무위. 경험은 경험.
‘이들이 아직 경험이 짧은 젊은이들이라는 걸 간과…….’
“앞에 뭔가 있다.”
“웃기지 마!”
순간 여사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앞을 달리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여사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 시선을 외면했다.
‘말도 안 돼.’
뭔 개도 아니고 담비가 냄새로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불합리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 아니야. 아직 아니다.’
뭔가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게 설소백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을 찾은 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벌써 이렇게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래도 계곡 아래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생각이 짧아진 모양이로군.
이리 생각하고 마음이 편해진 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기 사람이다!”
“오! 사람! 진짜 사람이다. 민가도 있는 것 같은데?”
“…….”
여사혼의 눈가가 실룩였다.
저 멀리서 뭔가 거뭇거뭇한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사람 같긴 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이 한이명일 리…….’
핏발이 서도록 눈을 부릅떴지만, 보이는 이의 정체를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두터운 털가죽을 얼굴까지 뒤집어쓴 이를 무슨 수로 판별하겠는가?
‘아니겠…….’
그들이 막 그 근처까지 다가간 바로 그때였다.
“아니, 세상에! 화산의 문하들이 아니십니까? 이런 인연이?”
그들을 뒤늦게 발견한 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양팔을 벌리며 반갑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재빨리 자신의 얼굴을 감싼 털가죽을 걷어 내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한 건, 한이명이었다.
“이야! 다시 보네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한 대협!”
“허허허허. 이리 반가워해 주시다니…….”
감격적인 재회였다.
하지만 그 재회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즐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
여사혼은 혼이 빠진 얼굴로 한이명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고 고생을 하며 그가 알던 얼굴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저 사람은 분명 한이명이 맞았다.
“……뭔…….”
담비를 풀어서 사람을 찾는다고? 이 넓은 북해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이게!
그런 여사혼의 생각을 아는 건지, 한이명을 찾아낸 백아는 허리가 거의 뒤로 넘어갈 정도로 배를 내밀고 우쭐대고 있었다.
“크으! 역시 영물의 왕!”
“잘 키운 담비 하나, 열 이무기 안 부럽다!”
“훌륭하다! 훌륭해!”
화산의 제자들이 박수를 짝짝 치며 칭찬을 퍼부었다.
멍한 눈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여사혼을, 한이명이 발견했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황급히 달려왔다.
“이, 일 장로님! 일 장로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아, 아니 대체 여길 어떻……. 응?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일 장로님?”
넋이 나간 눈으로 한이명을 보며 여사혼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냥…….”
“예?”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네.”
“…….”
한이명의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이 양반이 못 본 새 노망이 들었나?’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여사혼은 말없이 습기가 차오른 눈가를 훔쳐 내었다.
“……그런 일이.”
화산의 제자들이 든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차라고 부르기도 힘든, 밍밍한 끓인 물이었지만 따뜻한 것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꽝꽝 얼은 몸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 났다.
한이명은 굳은 얼굴로 여사혼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장로님들을 비롯한 수많은 동지들이 험한 꼴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여사혼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저 하는 일 없이 살아 있었을 뿐이네. 북해의 유일한 적통을 저들로부터 지켜 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우리 같은 밥버러지들이 어디 얼굴이나 들겠는가.”
“……장로님.”
“정말 고생이 많았네. 정말 잘해 주었어.”
그 말에 한이명이 울컥한 듯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그간의 숱한 고생이 머리를 스치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오랜…….”
“아아, 회포는 나중에 푸시고요.”
하지만 다시없을 그 감격의 순간이, 안타깝게도 청명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시급하니까. 본론부터 빨리 들어가죠. 꼬맹이 어디 있어요?”
“…….”
한이명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청명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내었는지 금세 체념한 얼굴로 대꾸했다.
“설 공자는 이곳에 있습니다.”
“보아하니 여기 아저씨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다들 한가락 하는 것 같고.”
한이명을 따라 들어온 곳은 커다란 설산 사이의 계곡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백아가 아니었다면 이곳의 은신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곡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집들이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었고, 제법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이 수십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빙궁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달아난 이들이 숨어 사는 곳 중 하나입니다.”
“하나라는 건?”
“예. 이곳만이 아닙니다. 북해에 이런 곳이 십여 군데 더 있습니다.”
청명이 눈을 빛냈다.
‘생각보다 수가 좀 되는군.’
이번에 계곡에서 탈출시킨 이들과 북해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들을 모두 모을 수 있다면 저 빙궁과 한판 벌이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아저씨.”
“예.”
“말은 모두 들으셨죠?”
한이명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실래요?”
“도장.”
청명의 물음에 한이명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도망자입니다.”
“…….”
“한때 우리가 빙궁의 정예를 자처했다고는 하나, 우리는 이제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쫓기며 살아남기에 바빠 꾸준히 수련을 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무학을 익히지도 못했습니다. 설천상은 간악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이는 아닙니다. 아마 지금 북해의 전력은 우리 모두가 모인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할 겁니다.”
청명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는 패배주의에 찌든 말을 싫어하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가 막 한 소리를 하려는 찰나, 한이명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굉장히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에는 시운이라는 게 있지요. 이 기회를 놓친다면 북해는 영영 저들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저 간악한 마교도들이 북해를 유린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한이명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저는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도 모두 기꺼이 싸울 것입니다.”
청명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가볍게 손가락을 튀겼다.
“그럼 됐네요.”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병법이고 나발이고 이건 시간 싸움이에요. 지금 당장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두 모으세요. 단숨에 빙궁을 치고 궁주 자리를 되찾을 테니까!”
“되겠습니까?”
“지금 궁주 모가지가 떨어지면 저들이 별수 있겠어요? 막으면 비킬 때까지 패고, 말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패면 되죠! 뭐 별거라고! 그러니까 자, 일단은……!”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을 하는 동안 살짝 민망해진 윤종은 백천에게 작게 속닥거렸다.
“사숙.”
“응?”
“……이거 따지고 보면 역적모의 아닙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대로 우리가 명색이 도산데 남의 문파 궁주 자리를 찬탈할 계획을 세운다는 게…….”
“윤종아.”
“예?”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기에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잖느냐.”
“…….”
백천은 빙그레 웃으며 흡족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될 대로 되라지, 빌어먹을.”
“…….”
사숙.
그런 거 웃으면서 말씀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