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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96화 (494/1,567)

496화. 그럼 기억하게 해 주지. (1)

찰박.

얕은 개울물을 밟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찰박.

걸음을 뗄 때마다 그 소리는 조금씩 더 질척해졌다.

수십 년을 도가(道家)의 길을 걸으며 수양했음에도, 매화검존은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서툴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 누구도 그에게 평정을 논하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그가 밟고 선 것은 물이 아니라 피(血)이므로.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흘러나온 피는 내가 되어 흘렀다. 걸음을 멈추자 발을 적신 피가 발목까지 타고 올라 스며드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시산혈해(屍山血海).

그 말이 아니고서야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어떻게 표현하란 말인가?

손끝이 절로 덜덜 떨려 왔다.

“어찌 인간이…….”

물론 알고 있다.

이건 전쟁이다.

전쟁이란 결국 상대를 죽이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배 속에서부터 밀려오는 메스꺼움과 노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곳을 휩쓴 잔혹함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리 학살할 수 있는가?

개미를 짓밟아도 이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드드득.

새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주먹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등에 시퍼렇게 돋아난 핏줄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숙.”

아주 희미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청명의 시선이 과격하리만치 획 돌아갔다.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빛살처럼 한곳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겹겹이 쌓여 있던 시신을 순식간에 파헤친 그는 아직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사질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며, 명도(明燾)! 명도야!”

그리고 차갑게 식어 가는 명도의 손을 통해 진기를 불어넣었다.

청명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며…… 명도야. 괜찮다. 응? 내가…… 내가…….”

하지만 명도의 하체 쪽으로 시선을 옮긴 청명의 눈은 그대로 절망에 휩싸였다.

으직.

짓깨문 입술이 찢어지며 핏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명도의 허리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니라 대라신선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어찌 하겠는가?

“괜찮다. 괜찮다, 명도야. 내가 치료해 주마. 명도야, 이놈아. 응? 걱정하지 말거라.”

“……사숙.”

“그래! 그래, 명도야!”

명도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죽음을 앞둔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숨을 몰아쉬었다.

“……십시……오. 사…숙.”

“……명도야?”

헐떡거리며 힘겹게 말을 하던 명도의 얼굴이 서서히 공포에 질려 갔다.

“다, 달아…… 달아나……십…….”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던 청명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가 누구인가?

천하삼대검수로 불리는 매화검존 청명이다.

아니, 천하삼대검수라는 말도 부족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천하삼대검수가 아니라 천하제일검이 되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화산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달아나라?

그더러?

‘대체 무엇에게서?’

그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처…… 천마…….”

명도의 손을 절박하게 움켜잡은 청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숙. 꼭 달아…… 달아나…….”

겨우겨우 호흡을 이어 가던 명도의 말이 멎었다. 고통으로 가득하던 동공이 느슨하게 풀렸다.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청명은 고개를 푹 떨궜다.

입 안에서 쇠 맛이 퍼져 나갔다.

찢어진 입술에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툭툭 떨어졌다.

“……천마.”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든 장본인.

그의 사질을 죽인 이.

십만대산을 지배하는 마교의 주인이자, 세상을 뒤흔드는 악귀.

“천마!”

청명이 검을 콱 움켜잡고 몸을 일으켰다.

“개 같은 자식. 반드시 죽여 버리…….”

그때였다.

청명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동시에 움직임도 그대로 멈췄다.

‘뭐지?’

이상한 일이었다. 청명 스스로도 자신이 왜 말과 행동을 멈췄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이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명의 육체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멈추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고개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한쪽을 향해 꺾이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녹슨 톱니바퀴가 끼긱대며 둔탁하게 맞물리듯이, 청명의 고개가 덜거덕대며 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었다.

사람.

그래,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걸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 피로 붉게 물든 대지.

지독한 피비린내로 자욱해 숨을 쉬는 것마저 힘겨운 이 죽음의 땅을,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청명의 몸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속이 뒤집히고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위화감이 쏟아지듯 온몸을 휘감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저건…….

저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저건…….

그건 청명이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저것’은 그 어떤 것과도 어우러지지 않았다.

하늘과 땅. 그 사이의 인간(天地人).

세상을 이루고 그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모든 것 사이에 있는, 무언가 다른 이질적인 것. 홀로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

홀로 오롯하게.

더없이 강대하게.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해도, 저 존재를 처음 보는 순간이라 해도 어찌 모를 수가 있는가?

하늘 아래 저런 것이 존재한다면 저것에 붙일 이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천마(天魔).”

마(魔)의 조종(祖宗). 그리고 종주(宗主).

천하를 짓밟은 마교의 유일한 지배자이자, 고금을 아울러 다시없을 악(惡).

청명의 시선은 흡사 홀리기라도 한 듯 천마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기이할 정도로 검은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 거의 오금까지 치렁치렁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희고 창백했다.

마교인답지 않게 더없이 새하얀 옷은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 중간중간 수놓인 있는 붉은 자수가 위화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우습지 않은가?

이 많은 이들을 학살하면서도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인간이, 정작 붉은 자수가 놓인 백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지 않은가?

더없이 우습지 않냐 이 말이다.

“이…….”

청명의 비틀린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다.

저건 혼돈(混沌)이다.

왜 명도가 그에게 달아나라 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매화검존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

심장이 절로 조여 올 만큼의 공포.

평생 그의 의지를 배반한 적 없던 몸뚱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달아나라고.

지금 당장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그럼에도 청명은 달아나지 않았다. 아니, 달아날 수 없었다.

죽은 명도의 복수를 위해?

천마를 상대할 기회를 드디어 얻었기 때문에?

천만에.

청명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차라리 미쳐 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 공포 속에서도 청명이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를 봐.”

청명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청명은 이곳에 서 있다.

오로지 죽음밖에 남지 않은 대지 위에 그는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의 시선은 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청명을 못 견디게 했다.

개미 떼를 밟아 죽인 인간이 달아나는 한 마리의 개미에게 눈길을 돌리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더없이 하찮기에 밟아 죽일 수도 있고, 더없이 하찮기에 그저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천마에게 있어서 청명은 떼죽음을 당한 개미 떼 사이에서 꿈틀대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시선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그 생과 사조차도 하찮기에.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청명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봐.”

청명의 눈에 핏발이 선다.

“날 봐! 이 개자식아아아아아아!”

그의 목소리가 닿은 걸까?

피로 물든 세상을 홀로 유유히 걷던 천마의 시선이 천천히 청명에게로 향했다.

먼 거리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청명 쪽을 보았다.

“…….”

끝없는 어둠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검디검은 눈동자.

그 시선 앞에, 청명은 소름이 내달린 몸을 떨었다.

‘없어.’

저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감정도, 의지도, 그 무엇도.

사람의 눈이 어찌 저럴 수 있는가?

저 무심한 눈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거라곤 짙은 허무뿐이었다.

잠시 후, 천마는 그에게 흥미를 잃은 듯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 잠깐의 일별이 전부였던 것이다.

“허…….”

청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보이지도 않는다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으득.

이를 부러지도록 깨문 청명이 검을 뽑았다.

“그럼 기억하게 해 주지.”

공포이 온몸을 옥죄고 팔다리가 파들파들 떨렸지만 청명은 되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잊지 못하게 해 주겠다!”

폭풍 같은 내력을 끌어올린 청명이 바닥을 박차고 천마를 향해 돌진했다.

세상을 뒤덮은 절망을 향해.

그리고 한 달 뒤.

중원의 모든 힘을 모은 결사대가 천마를 죽이기 위해 십만대산을 올랐고.

그중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 * *

“청명아!”

움찔.

청명이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봤다.

“괜찮으냐?”

“사숙?”

“뭔 땀을 이렇게 흘려. 어디가 안 좋으냐?”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꿈인 것을 알았다.

청명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빌어먹을.”

“…….”

청명이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백천은 탓하거나 이유를 캐묻지 않고 청명의 안색을 가만 살폈다.

지금 청명의 얼굴을 본 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청명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그래.”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섰다.

차디찬 북해의 대지. 그 땅을 파고 들어가 만든 임시거처.

위쪽으로 나 있는 입구로 나오자 북해의 찬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싸늘하게 식히기 시작했다.

“…….”

하지만 청명은 한기조차 느끼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컴컴한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천마.’

그건 절망이다.

모든 것을 앗아 가는 절망.

으드득.

청명이 이를 갈아붙였다.

천마를 생각할 때마다 뱃속에 용암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어찌할 수 없는 절망.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될 것 같은 증오와 심장을 얼려 오는 공포가 제멋대로 뒤섞여 휘몰아쳤다.

그의 숨이 끊기던 마지막 날.

그날, 십만대산의 광경은 지금도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때로는 지독한 악몽으로, 또 때로는 지독한 기억으로.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교 같았다.

장문사형, 사형제들, 그리고 사질들까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간 그들의 얼굴은 청명이 다시 죽는 날까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는 안 돼.’

그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천마가 무엇인지. 천마가 어떤 존재인지.

그건 모든 것을 앗아 간다. 삶도, 생명도, 그리고 인연마저도.

“……부활이라고?”

부릅뜬 청명의 눈에 핏발이 섰다.

‘웃기지 마. 개자식아.’

이 세상에 천마 따위가 다시 설 땅은 없다. 청명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다시는 누구도.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손에서 화산을 빼앗을 수 없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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