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5)
고오오오오오오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온통 희던 세상에 장엄하기 짝이 없는 금광이 웅혼하게 빛을 발했다.
이윽고.
우우우우우우웅!
벌 떼 수천 마리가 동시에 날아오른 듯한 소리와 함께, 금광이 둑을 터뜨린 계곡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그 거대한 권력(拳力)에 휩쓸린 이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저 멀리 튕겨 나갔다. 흡사 걷어차인 공 같은 모양새였다.
“……개사기.”
그 광경을 보던 조걸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다 이내 억울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누구는 초식 하나 펼치려면 허공에다 칼질을 일흔일곱 번씩 해 대야 하는데! 누구는 주먹질 한 번에 대여섯을 날려 버리네! 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소림으로 갈걸! 왜 화산에 와선…….”
“아니, 근데 이 미친놈이?!”
윤종이 검을 펼치다 말고 있는 힘껏 조걸을 걷어차 버렸다.
“꺄울!”
옆구리를 얻어맞은 조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리는지 윤종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는 싸움 끝나고 보자. 이 새끼가 하다하다 이젠 기사멸조를 해?”
“기, 기사멸조까지는 안 했고요, 사형……!”
“닥쳐!”
“옙.”
윤종의 눈에 살기가 어리니 조걸도 재빨리 입을 닫았다. 눈이 돌아가면 저 청명도 못 말리는 인간이 윤종 아닌가.
‘그런데 좀 억울하기는 하잖아.’
효율이 다르다. 효율이.
왜 소림의 무학이 천하제일로 불리는지 제대로 실감되었다. 물론 쓰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더 훌륭하고 좋아 보이는 측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저 스님도 진짜 장난이 아니라니까.”
매번 청명에게 괴롭힘당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저 양반도 소림의 방장이 애지중지하던 소림제일기재 아니던가?
청명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소림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을 양반이다.
그런 양반이…….
“흐읍, 아미타불! 뒈지십시오, 시주!”
……저러고 있네.
혜연이 일 권, 일 권을 날릴 때마다 빙검대들은 말 뒷발에 걷어차인 짚단처럼 풀풀 나부끼며 날았다.
아무리 무학의 종류가 다르고 그 경지가 다르다지만, 이쯤 되면 억울한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이놈이!”
“히이이이익!”
갑자기 검이 코앞으로 불쑥 날아들자 기겁한 조걸이 황급히 몸을 굴렸다.
“아니. 근데 저 미친놈이 진짜?”
그 광경을 본 윤종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싸우는 중에 집중을 못 하다니, 세상에 저런 천치가 또 있나.
등에 윤종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며 조걸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얼른 빙검대를 일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검은 두 배 더 빨라졌고, 내력이 두 배는 더 빨리 돌았다.
그리고 땀도 두 배는 더 흘려 댔다.
그런 조걸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윤종은 내내 조걸을 주시하지 못했다. 혜연이 말 그대로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타아아아아아앗!”
콰아아앙!
“아미타불!”
쿠우우우웅!
혜연이 손을 뻗을 때마다 황금빛 금광이 번쩍번쩍 했다. 빙검대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무기력하게 날아갔다.
“……진짜 좀 심하긴 하네.”
저걸 누가 소림의 제자라고 하겠는가?
소림이라면 자비로운 권력이 기본이다. 하지만 혜연의 수법에서 자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권에는 패도(霸道)가 가득했다.
상대적으로 살짝 작은 체구인 혜연이 무시무시한 권력을 뿜어내며 전장을 종횡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림승이라기보다는 사파의 거두처럼 보였다.
“……이게 다 화산의 업보이고 죄지.”
정확하게 말하면 청명의 죄고.
“……아미타불.”
서글프게 불호를 왼 윤종은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린 빙검대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방표의 두 눈은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폈다. 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눈이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전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내력을 찾은 죄수들이 간수들을 몰아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애초에 전대 궁주의 측근 심복들. 내력만 사용할 수 있다면 평범한 빙궁의 무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빙검대는 말이 다르다.
“저, 저런…….”
혜연은 이제 눈에서 빛을 뿜고 광소를 터트리며 빙검대를 쓸어 버리고 있었다.
“대, 대체 저놈들은…….”
방표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빙검대가 저리 일방적으로 당할 수 있는가.
빙검대는 빙궁의 주력 부대 중 하나였다. 물론 빙검대가 빙궁을 대표하는 최고의 무력 부대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예라는 말을 붙이기에 결코 모자람은 없었다.
그런 빙검대가 저 애송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
이 현실을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타, 탈출해야 돼.’
방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 전장의 승패는 갈렸다. 이대로라면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조리 제압되고 말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빠져나가 빙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죄수들이 탈출했고, 객으로 온 이들이 빙궁에 칼을 들이댔다는 사실을 말이다.
방표가 빠르게 탈출로를 탐색하던 바로 그때였다.
“쥐새끼 같은 놈이 또 눈알을 굴리는군.”
“…….”
그의 앞을 막고 있던 간수를 막 처리한 여사혼이 천천히 방표를 향해 다가왔다. 양손에는 새하얀 극음지기를 끌어 올리며.
그의 눈에 차오른 원독을 본 방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여, 여사혼.”
“잘도 내 이름을 입에 올리는구나. 일 장로님, 일 장로님 하며 아양을 떨던 때에 비하면 참 세상이 많이도 바뀌었다. 그렇지 않느냐, 방표?”
방표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으냐? 궁주께서…….”
“설천상 따위가 두려웠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여사혼의 눈이 시퍼런 빛을 내뿜었다.
그 눈빛을 보고도 대화를 시도하는 자는 멍청하거나 생각이 없는 자다. 안타깝게도 방표는 스스로 그런 부류라고 생각지 않는 이였다.
그가 여사혼을 위협하듯 손을 내밀며 뒤로 한 발을 빼냈다.
“여 장로……. 확실히 과거의 당신이었다면 나는 상대가 안 되겠지.”
“잘 아는군.”
“……하지만 당신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 않나. 제아무리 내력을 되찾았다고 한들, 몇 년 동안 쌓인 탁기를 쉽게 제거할 수는 없을 터.”
여사혼이 미간을 살짝 찌푸려졌다.
방표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 내력만 되찾았지, 육체를 정비하지 못한 그는 과거의 무위를 절반도 되찾지 못했다. 그건 이곳에 있는 다른 죄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몸으로는!”
방표가 전방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시린 음기를 잔뜩 실은 장력이 여사혼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큭!”
날아드는 장력을 곧장 후려친 여사혼은 방표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방표는 저 멀리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여사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표를 뒤쫓았다.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금세 추적대가 결성될 것…….
“응?”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솔개처럼 날아가던 방표가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 처박혔다.
쩌적. 쩌저저적.
여사혼은 우뚝 선 채 멍한 눈으로 두 눈을 끔뻑였다. 눈앞엔 어느새 거대한 반원형의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저…….”
더욱 그를 어이없게 만든 건 구덩이가 아니라,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몸이 기괴하게 꺾인 채 경련하는 방표의 몸뚱어리 위에 청명이 쪼그려 앉아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어…… 너무 세게 밟았나?”
“…….”
방표는 입에 게거품을 문 채 경련하고 있었다.
여사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청명아, 다 모았다.”
백천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제압당해 끌려온 빙검대와 간수들이 가득했다.
그중 반쯤은 의식이 없었지만, 그래도 남은 반 정도는 정신을 차리고 있다. 그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당혹과 낭패감이 가득했다.
“쯧.”
청명이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그의 뒤쪽에 선 죄수들은 여전히 원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연신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이 몸을 들썩일 때마다 간수들은 움찔움찔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들었다.
결국 여사혼이 나서서 죄수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침착하게나. 이들이 저지른 죄가 적지 않다고는 하나, 진짜 원흉은 이들이 아니라 설천상임을 모두 알지 않는가?”
“물론 압니다, 장로님. 하지만…….”
“자네들의 심정을 내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들에게 더 손을 댄다면 우리 역시 설천상 그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네.”
여사혼의 말이 먹혔는지 죄수들은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하나둘 살기를 풀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눈을 빛냈다.
‘인망은 아직 있군.’
원래부터 그런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저 척박한 계곡에서 부대끼며 수 년을 함께 지내다 생긴 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곳의 죄수들은 여사혼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먼저.”
여사혼이 청명 일행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히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의 인사에 백천이 바로 포권 했다.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아.”
과연, 협의지사(俠義之士)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언행과 풍모였다.
여사혼이 막 감격에 차 대답을 하려는 찰나.
“아, 비켜!”
청명이 백천을 잡아 냅다 뒤로 던져 버렸다.
“악!”
날아가 눈밭을 구르는 그를 흘끗 본 청명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뭐 상황 다 끝난 것처럼 굴고 있어? 이제 시작인데. 하여튼 곧 죽어도 저놈의 허세는.”
“으아아! 이 새끼!”
백천이 눈을 까뒤집고 도로 달려들었지만, 윤종과 조걸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적당히 진정 좀 합시다, 사숙.”
“뭐 그리 틀린 말도 없잖습니까.”
“뭐, 인마?”
조걸이 얼른 슬쩍 백천의 시선을 피했다.
청명은 뒤쪽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여사혼과 대화를 나누었다.
“몸은 좀 어때요?”
“며칠 정양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다 해서 원래의 실력을 모두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무인이 수년 동안 수련을 할 수 없었다는 건 커다란 문제다. 원래의 무위를 회복하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은 필요할 것이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청명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해야 할 일은 아시죠?”
“물론입니다.”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북해에 전대 궁주를 지지하는 이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에 한이명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여기저기 굴을 파 놨다고. 이 척박한 곳에서 아이를 데리고 숨어 지내는 게 쉬울 리 없죠. 분명 돕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사혼은 감탄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경박한 행동거지와 말투 때문에 우둔한 이로 보기 쉽지만, 이 청명이라는 도사는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물론 그걸 깨닫고도 불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자에게 북해의 운명을 맡겨도 될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청명의 말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에 참혹한 피바람이 몰아칠 테니까.
북해인으로서, 북해빙궁의 무인으로서 그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여사혼은 비장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럼 일단은…….”
“아, 잠시만요.”
그때 청명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슬쩍 돌려 제압당한 빙궁의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듣는 귀가 많아서 좋을 건 없죠. 일단 얘들부터 정리하자고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청명은 살짝 고민하다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뒤끝 없으려면 그냥 역시 모가지를 싹 다…….”
“히이익.”
“도, 도장!”
간수들에게 그토록 핍박을 당했던 죄수들이 되레 화들짝 놀랐다. 청명은 입맛을 다셨다.
“흐음. 그러면 좋겠지만, 제가 명색이 도사인데 그리 쉽게 살생을 할 수는 없죠.”
“휴우.”
여사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이 도사는 다 좋은데 장난기가 너무 심한 게 탈…….
“던져요.”
“네?”
청명이 절벽 쪽을 향해 턱짓하며 외쳤다.
“소소야! 산공독 먹여라!”
“네, 사형!”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적당히 산공독 먹여서 계곡 아래에다 던져 놓으면 되겠죠. 운 좋아서 누가 발견하면 살아서 나올 거고, 운 없으면 뭐…… 어쩔 수 없고.”
“…….”
“아. 동아줄은 미리 치우세요. 괜히 기어 올라오면 귀찮으니까.”
“…….”
“뭐 하세요? 얼른 던져요. 바빠요.”
태연하게 말하는 청명을 보며 여사혼이 넋 나간 얼굴로 웃었다.
‘마교보다 더하네.’
걔들은 적어도 줄은 잡고 내려가게 해 줬으니까.
앞으로 절대 이 청명이라는 도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여사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