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4)
“하하(下下)!”
“예!”
당소소의 무릎이 살짝 더 굽혀졌다. 독 오른 살쾡이처럼 자세를 낮춘 그녀의 검은 더없이 독랄하게 상대의 목을 노렸다.
카가가각!
가까스로 다급하게 목을 막아 낸 상대의 얼굴엔 짙은 낭패가 어렸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상심을 유지하며 검을 휘두를 때와는 달리, 실전에서는 반드시 흥분하게 되니까.
자신의 검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고, 자신 역시 상대의 검에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와 같은 침착함을 유지하라는 것은 사실상 과한 요구다.
하나, 검수는 언제나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이뤄 내야 한다.
“손목에 힘을 빼고, 발끝에 힘을 줘.”
“예!”
부동심을 유지할 수 없다면, 적어도 몸의 상태라도 평소와 같이 유지한다. 어설픈 근성론보다는 몇 배는 나은 방법이었다.
당소소는 살짝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켰다.
‘나는 아직 부족해.’
다른 사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 왔다. 청명이 화산의 수련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해서 그들이 예전부터 해 온 수련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운검 역시 기본을 중시했고, 그 수련의 시간은 그들의 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당소소는 이제 겨우 검의 기초를 쌓아 가는 과정. 아무리 본인의 재능이 특출하고, 유이설과 청명이 집중적으로 가르친다고 하나 아직은 다른 사형제들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단숨에 사형제들을 뛰어넘으려 드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오만임과 동시에, 다른 사형제들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화산의 제자 중 누구도 수련을 게을리 하는 이가 없고, 누구도 검에 진지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까.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언젠가 따라잡으면 돼.’
언젠가 청명이 말했다.
한 매화나무에 피어나는 매화 중 동시에 함께 피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어떤 꽃은 일찍, 또 어떤 꽃은 늦게 피어나지만 늦게 핀다 해서 그 아름다움이 덜하지는 않다고.
늦게 피는 것을 아쉬워하지 마라.
당소소의 검이 천천히 여유를 머금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더없이 빠르고 날카롭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조바심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
유이설이 낮게 속삭이며 한 발을 옆으로 뗐다.
딱 한 걸음만큼 벌린 거리. 그 거리는 유이설이 당소소에게 보내는, 검수로서의 신뢰였다.
‘사고.’
그 거리의 의미를 이해한 당소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옆을 지켜 준다는 말은, 단순히 그녀를 보호하겠단 의미가 아니었다.
당가의 여식.
의약당의 의원.
그 모든 것이 그녀이지만, 그 어느 것도 그녀는 아니다.
‘나는 화산의 검수야.’
당소소의 검 끝이 아직은 어설픈 매화를 피워 냈다. 선명하지 않고, 결연하지 못하다. 하지만 어설플지언정, 분명 매화였다.
세상천지 수만 수억의 매화가 피어난다고 해도 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소소만의 매화가 처음으로 피어나고(開花) 있었다.
유이설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원체 표정 없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커다란 미소였다.
단.
촤아아앗.
유이설의 발이 눈밭 위를 스치듯 누볐다.
새로이 개화한 매화를 지켜보기 위해 자신의 검을 굳이 억누를 이유는 없었다. 그녀 역시 아직은 부족한 몸. 실전 속에서 검을 벼릴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쉽사리 찾아오는 게 아니다.
당소소와는 달리 부드럽고 유려한 검로가 당황한 상대들을 감싸 안듯 날아들었다.
서걱! 서걱!
어둠을 밝히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날아든 검은 상대의 빈틈을 희롱하듯 파고들었다.
딱 떨어지는 간결함.
그녀의 검은 그녀와 닮았으되, 또 달랐다.
간결하지만 부드럽고, 날카롭지만 여유롭다.
“아아악!”
다급히 막아서는 검을 부드럽게 밀어 낸 한철검은 이내 상대의 어깻죽지를 타고 올라 어깨를 빠르게 베었다.
서걱. 서걱.
손목과 무릎 위를 베어 삽시간에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검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지독히 아름다운 광경이겠지만, 그 검을 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일 검에 하나.
그 환상적인 검격에 덩달아 넋을 잃은 당소소의 귓가에 차가운 유이설의 목소리가 꽂혔다.
“정신!”
“예!”
당소소는 퍼뜩 이를 악물며 유이설의 뒤를 향해 내달렸다.
저 등을 지켜야 할 이는 다름 아닌 당소소니까.
“……이게 대체?”
주변을 둘러보는 고진악의 눈은 사정없이 떨렸다.
밀리고 있다.
아니,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이곳까지 전력으로 달려오느라 힘을 소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몇 되지도 않는 어린놈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물론 이 상황이 패배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수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고, 저들도 사람인 이상 이 많은 이들을 모두 상대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라고는 해도 승기를 완전하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고진악을 경악하게 했다.
‘화산파가 이렇게나 강한 문파였던가?’
이름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문파였는데.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파아아앗!
당장 얼굴로 검이 날아오는데 딴생각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고진악은 기겁하며 고개를 옆으로 획 젖혔다. 하지만 완전히 피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의 볼이 길게 갈라지며 핏줄기가 흘렀다.
불에 지진 듯한 화끈한 통증이 잡념을 태웠다. 고진악은 재빨리 몸을 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른 곳에 신경을 써도 될 만큼 제가 약하지 않습니다.”
“…….”
백천은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수하들을 생각하기 전에 본인부터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수하들보다 먼저 쓰러지실 테니까요.”
그 말에 고진악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건방 떠는 것도 여기까지다.”
“외람되지만 저는 건방을 떨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죠.”
“이…….”
속이 긁히다 못해 뒤집어진 고진악은 이를 악물고 내력을 끌어 올렸다. 이내 그의 검에 새하얀 서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항복한다고 해도 결코 살려 주지 않겠다!”
“바뀐 건 없는 것 같군요. 항복 같은 건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으니.”
“이노오오오옴!”
고함을 힘껏 내지른 고진악이 검을 빠르게 찌르고 들어왔다.
잔뜩 흥분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검은 차갑다 못해 시리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일곱 개의 검기가 순식간에 백천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얼굴과 복부, 양쪽 어깨와 다리를 동시에 노리고 들었다.
하나.
스스슷.
백천 역시 녹록히 당해 주지는 않았다. 그의 검 끝이 가볍게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십여 개의 꽃봉오리가 허공에서 피어났다.
캉! 카카캉!
그 꽃들은 날아드는 검기를 정확하게 막아 냈다.
화려하게 휘몰아친 것은 아니었다. 날카롭게 적을 노리지도 않았다. 그저,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적절한 방어였다. 일체의 낭비도 없는 가장 효율적인 검격이었다.
“큭!”
고진악의 검은 포기할 줄 모르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칼바람처럼 맹렬한 검기가 대기를 찢으며 백천을 향해 쏟아졌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눈을 모조리 집요하게 부수기라도 할 듯, 베고 찌르고 휘두른다.
냉검파설(冷劍破雪).
고진악이 가장 자신하는 검초이자 북해빙궁의 검학, 빙하십이식(氷河十二式)의 절초였다.
창백한 백색 검기가 허공에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모습은 마치 백색의 돌풍이 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를 마주한 백천의 눈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
‘아니지.’
제아무리 화려하고 복잡한 검초라 해도 이 정도로는 그의 눈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보라.
휘몰아치는 돌풍처럼 맹렬한 검기 속에 미세한 빈틈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 정도가 아니야.’
그놈의 검은 다르다.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검기를 흩날리면서도 어디 하나 빈 곳이 없다. 그 검을 정면에서 맞이했을 때 느꼈던 절망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그의 털끝 하나 흔들지 못한다.
백천은 내력을 밀어 넣은 검을 단호하게 앞으로 내질렀다.
쇄애애액!
백광을 머금은 검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날카롭게 검기의 돌풍 사이를 파고들었다.
“헉!”
검기 사이로 불쑥 밀고 들어오는 백색의 검을 본 고진악은 기겁하며 몸을 굴렸다.
눈밭을 한참 데굴데굴 구른 뒤에야 멈춰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무인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방식으로 백천의 검을 피해 냈지만, 지금 그의 머리에 수치심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이들과 검을 겨뤘지만,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강한 이와 맞붙었을 때도 더 강한 힘에 짓눌린 적은 있을지언정 일 검에 검초가 파훼된 적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건 비무가 아니었다. 묻는다고 해서 상대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 리도 없거니와, 그사이 그의 목이 떨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그는 이를 악물며 백천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이노오오옴!”
그 모습을 보는 백천의 눈은 차게 가라앉았다.
‘만인방의 대주급?’
아니, 어림도 없다.
빙궁이 만인방보다 못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고진악은 그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
더 강한 상대가 필요하다.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러니…….
파아아앗!
고진악이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백천의 검기가 그를 향해 쏘아졌다.
카아앙!
“크읏!”
묵직한 검기가 고진악의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강력하게 검을 때렸다.
카아앙!
한 번 더!
카앙!
그리도 또 한 번.
달려들던 고진악의 기세가 주춤했다.
화아아악!
그러자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수백 송이의 매화가 피어올랐다.
“아…….”
실로 화려하고도 웅장한 검초였다. 고진악은 일순 넋을 놓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 찰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간 동안 말이다.
그리고 백천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쇄애애애액!
분분하는 매화 사이로 벼락이 떨어졌다. 매화를 뚫은 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진악의 검을 후려쳐 날려 버렸다.
허공에 솟구치며 팽그르르 회전한 검은 바닥에 맥없이 꽂혔다.
푸욱.
고진악은 제 손을 떠나 눈밭에 박힌 검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너…….”
콰드득.
백천의 검은 어느새 고진악의 어깨를 파고들어 있었다.
서늘한 백천의 눈과 핏발 선 고진악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했다.
“…….”
“잘 배웠습니다.”
털썩.
백천의 인사와 함께 고진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백천은 뽑아낸 검을 무심히 허공에 휘둘렀다.
촤악.
검에 묻어 있던 피가 눈밭에 흩뿌려졌다. 백천은 쓰러져 버린 고진악을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음.”
백천이 담담히 말하자 빙검대는 모두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대, 대주님이…….”
“강하다……. 너무, 너무 강해.”
완전히 기선을 제압해 버린 백천은 상대를 끝장내겠다는 기세로 빠르게 전진했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산 제자들의 활약을 지켜보던 청명은 어정쩡한 손길로 백아를 쓰다듬었다.
“동룡이……는 이겼고. 윤종 사형이랑 조걸 사형도 잘 싸우고……. 이설 사고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소소도 잘 싸우네.”
허허.
이러면…….
“……내가 할 게 없는데?”
보통은 적당히 상대하다가 좀 밀리기 시작하면 내가 ‘짠’ 하고 나타나고 그러니까…….
아니, 거…….
“너무 키웠나?”
얼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청명은 슬그머니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시무룩해져선 중얼거렸다.
“……먹을 거라도 좀 가져올걸.”
가만히 있으려니 춥네.
어으, 추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