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3)
“속도를 더 올려라!”
북해빙궁 빙검대(氷劍隊)의 대주 고진악(顧振岳)이 큰 목소리로 수하들을 재촉했다. 얼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몰아쳤지만, 달려 나가는 그들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화산의 애송이들이라.’
고진악의 입매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런 하찮은 놈들을 잡아들이는 임무에 빙검대가 직접 나서는 건 우스운 일이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빙궁의 무사.
아무리 하찮다 해도 임무가 떨어진 이상은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빙궁의 방식이고, 빙검대의 방식이었다.
“대주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전방에!”
고진악은 안력을 돋워 앞쪽을 주시했다. 과연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전투인가?”
“아무래도 저희가 늦은 것 같습니다.”
“멍청하긴.”
수하의 말에 고진악은 옅게 웃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적이 있다는 뜻이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는 손을 뻗어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차갑게 식은 검이 손에 닿으니 흥분이 밀려들었다.
“자, 놀아 보자!”
그가 막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들려는 그 순간이었다.
“음?”
뭔가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얽힌 무리들 중 몇몇이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뭐냐, 저것들은?”
“저희를 상대하러 오는 모양인데요.”
“하…….”
고진악은 헛웃음을 흘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복색으로 보나, 달리는 자세로 보나 저들은 결코 빙궁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 화산의 애송이들인 모양이로군.”
명백한 비웃음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감히 우릴 상대로 검을 뽑아 든 패기는 칭찬해 주고 싶지만, 이쪽은 중원의 어른들처럼 무르지 않다는 걸 알았어야지.”
낮게 읊조린 고진악은 이윽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모조리 제압하라! 끝까지 반항하는 이는 죽여도 좋다!”
“충!”
명령을 끝낸 그는 바닥을 박차고 속도를 높였다. 수하들에게만 맡겨 놓을 생각 따윈 없었다. 선두에서 달려오는 저 건방진 애송이 놈을 단숨에 쓰러뜨려 기선을 제압할 요량이었다.
달려오는 애송이 놈도 같은 생각인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에게 일직선으로 들려들고 있었다.
‘이 건방진 놈이!’
이를 악문 고진악은 내력을 있는 대로 실은 검을 달려드는 이의 머리를 향해 섬전같이 내리쳤다.
카아아아앙!
이윽고 커다란 쇳소리가 울렸고, 고진악의 몸이 뒤로 튕기듯 날렸다.
‘뭣?’
그는 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득해지는 그의 정신을 붙잡아 준 건, 손목과 전완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과 얼굴에 닿는 눈보라의 차가움이었다.
빙글.
허공에서 가까스로 몸을 틀어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는 달라진 눈빛으로 다시 앞을 보았다.
유난히 흰빛을 띤 검이 그를 겨누고 있었다. 단정한 장발을 휘날리며 선 상대의 얼굴은 무섭도록 담담했다.
“……너…….”
고진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화산파 이대제자 백천입니다.”
“…….”
“그쪽은?”
고진악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들어 백천을 똑바로 겨누었다.
“북해빙궁 빙검대의 대주인 고진악이다. 북해에서는 나를 북진검(北進劍)이라 부른다.”
“북진검 고진악이라.”
백천은 잠깐 되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함을 용서하시길. 대신 그 이름은 확실히 기억해 두겠습니다.”
“건방진 놈이…….”
도발 아닌 도발이 고진악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쉽사리 백천에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직 손에 남아 있는 묵직한 통증이 그를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딱히 몸집이 대단히 큰 것도 아니건만, 어떻게 저 얇은 검에 그만한 힘을 실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주님.”
고진악의 기세가 살짝 죽은 것을 눈치챈 듯, 뒤쫓아 온 수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고진악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검을 겨눴다.
“만만찮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니 내 검이 너를 죽이더라도 원망하지 말거라.”
백천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얼마든지!”
짧은 대답과 함께 백천은 눈밭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또 시작이네, 저 양반.”
“그런데 이 새끼가 사숙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시, 실수니까 주먹 내려놓으십시오. 사형은 어쩌다 이리 폭력적으로 변하셨습니까?”
“내가 폭력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네가 정신을 놓은 거지!”
아웅다웅하는 조걸과 윤종의 뒤에서 달리던 혜연은 도무지 이 대화의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둘 다 옳은 것 같은데.’
세상은 무릇 공평하도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집중해라! 만만찮다!”
“예, 사형!”
조걸과 윤종의 검이 거의 동시에 새파랗게 빛났다.
한편 묵묵히 달리던 유이설의 입이 열렸다.
“소소.”
“예, 사고!”
“내 옆으로.”
“예!”
당소소는 검을 든 채 결연하게 이를 악물었다. 유이설은 조용히 그런 그녀를 다독였다.
“옆에 내가 있어. 실력만 발휘하면 안 어려워.”
“예!”
당소소가 단호하게 외치며 검을 겨누었다.
중앙에 선 백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진 윤종과 조걸, 유이설과 당소소가 진영을 갖추고 검을 펼쳤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발을,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은 검이 깔끔하게 갈랐다. 그러더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맞서 오는 빙검대를 향해 더없이 날카롭게 뻗어졌다.
쇄애애액!
섬전(閃電)과도 같은 쾌검.
예상치 못한 속도에, 빙검대의 대원들은 기겁을 하며 검을 쳐 냈다.
카앙!
하지만 화산의 검은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파아아앗!
튕겨 나간 검은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질러졌다. 더할 수 없는 속도에 기괴한 움직임이 뒤섞인 검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실전적이었다.
촤아악!
반쯤 얼어붙은 가죽옷이 삽시간에 길게 갈라지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큭!”
고작 일 수의 교환으로 낭패를 본 빙궁대는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빠, 빨라.’
검을 한차례 교환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검은 놀라울 만큼 빠르고, 지독하게 실전적이다.
아직 앳돼 보이는 이들이 강호에서 수십 년은 굴러먹은 노고수들처럼 독심(毒心) 실은 검으로 정확히 급소만 노리고 들었다.
받아 내는 이들은 등골이 절로 섬뜩해질 지경이었다.
기세를 잡은 이상 절대 승기를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 화산의 후기지수들은 검기를 머금은 검을 연이어 찌르고 들었다.
“크윽!”
빙궁대는 어떻게든 자세를 잡아 보려 애썼다. 하지만 눈앞에서 십여 개가 넘는 검기가 일시에 날아드는데, 평소처럼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번 흐트러진 자세는 점차 더욱 무너졌고, 그 탓에 휘두르는 검에도 제대로 된 기운이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서걱!
“…….”
옆구리를 빠르게 가르고 지나간 검에 빙검대의 대원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 와중에도 표정에 미동도 없이 그를 지나쳐 쏘아져 가는 윤종의 얼굴이 보였다.
수십 년간 북해의 검으로 살아온 그들일진대, 저 어린 검수들이 오히려 더 노련했다.
검수로서의 자세에서 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밭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으라차아아아!”
조걸의 검 역시 강맹하게 움직이며 쾌속하게 떨어졌다.
카앙!
힘과 힘에 대결에서 밀린 이가 뒤쪽으로 쭈욱 밀려났다. 그의 발이 밀릴수록 눈 위로 자국이 길게 생겨났다.
“탓!”
거리가 제법 벌어진 걸 확인한 조걸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검 끝이 맹렬하게 떨리며 수십 송이의 매화 잎이 피어났다.
마치 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나는 설매(雪梅)처럼.
과격하기까지 한 검격이었지만, 조걸이 피워 낸 매화는 흰 눈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중원에서 가장 화려한 검법이 지금 이 머나먼 북해의 땅에서 그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붉은 매화의 모습에 빙궁의 무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검법이…….’
빙궁에서 검을 쓰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상상을 한다.
매서운 눈발을 모조리 검으로 꿰뚫고 싶다는 상상. 그리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란 상상.
하지만 이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 경지에 오를 거라면 조금 더 빨라야 했다.
그랬다면 이 매화들을 막아 낼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 그의 실력으로 눈보다 더 많은 매화를 모조리 쳐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아아아아악!”
눈보라와 함께 휘날린 매화 잎은 순식간의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 곳곳을 얕게 베인 그는 이내 사방으로 핏줄기를 뿜으며 쓰러졌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수십 곳을 베인 충격은 그의 의식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좋아!”
기분 좋게 주먹을 움켜쥔 조걸이 막 다음 상대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윤종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다.”
“…….”
“냉정해라. 이건 실전이다.”
“예, 사형!”
지나치게 들뜨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은 조걸은 얼굴을 굳히고 검을 조금 낮추었다. 그의 하체가 다시 안정된 것을 확인한 윤종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살짝 내리눌렀다.
‘확실히 이놈은…….’
조걸이 강해지는 속도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천성적으로 덜렁대는 면이 있어 안정적이지 않을 뿐. 검의 영활(靈活)함과 쾌속함은 감히 윤종이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 그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흥분은 반드시 틈을 만들고, 예상치 못한 실수를 자아내기도 하니까.
“가자!”
“예!”
두 사람은 몰려오는 빙검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날카로운 조걸의 검과 상대적으로 무겁고 진중한 윤종의 검이 마치 한 사람이 휘두르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검에 상대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한 명이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날아드는 검을 대신 막아 주고, 서로의 검이 만들어 낸 빈틈을 일제히 날카롭게 공격한다.
한 사람이 앞을 공격하는 동안 다른 이는 뒤쪽에서 꽃잎을 뿌려 댄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화우가 내리지만, 다른 한 명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확고한 자신감.
그리고 단호한 신뢰.
애초에 만인방의 무력대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았던 두 사람이다. 빙궁이 새외오궁으로 불린다고는 하나, 빙궁의 무력대가 만인방의 그것보다 특별히 더 강할 리는 없었다.
물론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두 사람은 만인방과의 격전을 통해 확실한 경험과 확고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당가행을 통해 아직 부족했던 기초마저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녹여 낸 뒤였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었다.
“얼른 끝내고 소소를 도우러 갑시다, 사형!”
“……까불지 말라니까!”
붉은 매화가 점점이 피어날 때마다 빙검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북풍한설보다 더 싸늘한 예기를 담은 꽃잎이 북해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 피해라!”
“아아아악!”
당황한 목소리와 커다란 비명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느릿하게 내려앉으며 교란하는 윤종의 매화 사이로 조걸의 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두 사람은 청명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손에서 검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그 긴긴 고련의 시간이 이들의 검을 통해 봄을 맞은 매화처럼 더없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상대의 기선을 완전히 제압한 조걸이 이를 드러내며 악동같이 웃었다.
“이 정도로 놀라면 섭섭하지! 내 검은 더 빠르다고!”
“아! 그 입 좀 털지 말라니까!”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피어나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