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2)
“좋아.”
청명의 눈이 불길할 만큼 반짝거렸다.
일단 결정을 했으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아마 지금쯤이면 빙궁에 그들이 빙정을 캤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었다.
‘곧 마교도 같은 정보를 손에 넣겠지.’
상황은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
계산을 마친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 설소백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가랏, 백천! 설소백을 찾아!”
“백아 이름은 백천이 아니라 백전이다, 인마!”
“아니, 사숙 출발하라고. 백아 말고.”
“근데 이 새끼가?!”
백천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고 하자 윤종과 조걸이 잽싸게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사숙.”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너희들 왜 나한테만 그러냐? 애초에 저 새끼가……!”
“쟤는 청명이잖아요.”
“…….”
백천이 잠잠해졌다. 그 말 한마디에 납득해 버린 자신과 그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한 백천은 화산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 들었겠지. 상황이 영 녹록치 않다.”
“예, 사숙!”
“빠르게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그들의 머릿속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과, 차라리 빙정을 들고 중원으로 달아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거기에, 이 넓은 북해에서 과연 설소백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청명이 그런 고민을 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위기가 오면 가장 빠릿빠릿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니까.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고민할지언정, 한번 결정을 내렸다면 그저 단호하게 믿고 지지한다. 그게 화산의 방식이었다.
“출발하냐?”
“흠.”
백천이 묻자 청명이 굳은 얼굴로 가만히 계곡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여사혼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입꼬리가 싹 말려 올라갔다.
“분풀이 좀 하게 해 드릴까?”
“……응?”
방표의 시선은 칼바람이 몰아치는 계곡에서 줄곧 떨어질 줄 몰랐다.
“궁에서는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느냐?”
“예. 아직…….”
“늦는군.”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본 방표는 살짝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다. 그럼에도 지체된다는 것은 단순히 전령만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의미겠지.’
궁주께서 뭔가 대응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어떤 대응이든, 저 아래에 있는 건방진 중원 놈들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때로는 재주가 명을 재촉하기도 하는 법이지.”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뭐가 말이냐?”
“……아래에 있는 놈들은 과거 궁주파의 잔당들 아닙니까. 그놈들이 괜한 말을 지껄이기라도 하면…….”
“그럼 뭐가 달라질 게 있더냐?”
“……예?”
방표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뭘 모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 해도 그를 관철할 힘이 없다면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의 수하가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표는 피식 웃었다.
“중원에서 온 애송이 놈들과 패배한 잔당 놈들이 모여 무얼 할 수 있겠느냐? 모두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것들이거늘.”
모든 화(禍)는 방심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저들을 과히 경계하는 것 역시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봤자 결국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하지. 그래도 어쨌든 감시에는 게으름이 없도록 하거라!”
“예!”
그러고도 잠깐 계곡을 가만 바라보던 그는 몸을 획 돌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걸음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앞쪽에서 계곡을 감시하던 이들이 서로 수군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온 탓이었다.
“바람 소리가 이리 큰데 다른 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예.”
수군대며 대화하던 이들 중 하나가 계곡에 바짝 붙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어떤가?”
“별일 없는 것 같은…….”
그 순간이었다.
덥석!
계곡 아래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고개를 내밀고 있던 빙궁도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뭐, 뭣?!”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이, 빙궁도는 그대로 허공을 붕 날아 계곡 아래로 던져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황당함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이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며 아래로 멀어졌다.
“뭐냐!”
“무슨 일이야!”
곳곳에서 번을 서던 이들이 믿지 못할 광경에 기겁하며 달려왔다.
이윽고.
턱!
빙궁도를 계곡 아래로 날려 버린 손이 바닥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내, 곰 가죽을 뒤집어쓴 이가 절벽을 기어 올라왔다.
“끄응차!”
사뿐하게 계곡 위로 올라선 청명이 빙긋 웃으며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네요?”
“……이, 이놈이!”
“거 반응 빤하시긴.”
자리를 비우려던 방표가 그 광경을 보곤 굳은 얼굴로 청명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비켜라!”
포위한 이들을 물린 그는 청명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 차가운 목소리에, 청명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보시다시피.”
“……이해를 못 하겠군.”
방표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니면 그 알량한 협의지심에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아아. 그건 확실히 오해예요.”
손을 내저은 청명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쟤들은 몰라도 저는 협의니 뭐니 하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거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명의 등 뒤로 화산의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비조처럼 솟구쳐 오른 그들은 청명의 뒤로 착지하자마자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채앵!
날카로운 검이 자신에게로 겨눠지는 걸 보며 방표는 입가를 실룩였다.
“협의가 아니라……. 그럼 이런 미련한 짓을 하는 이유가 뭐지?”
“미련한 건 그쪽이고.”
“……지금 뭐라 했느냐?”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마교가 북해에서 일을 꾸미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막기는커녕 협조까지 하고 있는 것들이 누구한테 미련하대? 뒈지려고.”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방표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 청명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끊었다.
“아아. 뻔하고 재미없는 반응은 됐고요. 우리가 지금 좀 바쁘니까 얼른 선택하시죠. 길을 열고 비키든지, 얻어맞고 눈 속에 고분고분 처박히든지. 참 쉽죠?”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막말에 방표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놈이 진짜 미쳤나?’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감히 그를 거꾸로 겁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중원 놈들은 모두 건방지기가 짝이 없다더니,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구나. 북해빙궁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감히 그딴 망발을 입에 담는다는 말이냐?”
“뭐 우스울 만도 하지 않나.”
“……뭐라?”
청명의 입가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마교가 무서워서 제 보물을 캐다 바치는 놈들이 우습지 않으면 세상에 우스울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 이 개자식이!”
아무래도 이 말이 방표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고 시퍼렇게 물들었다.
“궁주께서 무슨 벌을 내리시더라도 네놈의 아가리를 갈가리 찢어 놓고 말겠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제압해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예!”
화산의 제자들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익숙하게 울리는 그 스산한 소리에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격장지계(激將之計) 하나는……. 나는 어떻게 사람을 저리 열받게 만드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격장지계는 의도가 있어서 하는 거고, 쟤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더 무서워.”
“……그건 그러네요.”
백천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무사의 수가 마흔에 달했다. 상대하기에는 적지 않은 수였다.
“중원에서 칼 장난이나 해 대다 아주 정신을 놓아 버린 모양이구나. 감히 그 정도 인원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이 정도 상대하는 데 이 숫자면 좀 과하죠. 미안할 지경인데.”
“……이놈이 끝까지?”
능글맞게 그의 말을 받아치는 청명의 대답에 방표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런데 뭐.”
그런데 그때 청명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검집을 툭툭 쳤다.
“수가 부족해서 불만이시라면 더 채워 줄 수도 있긴 해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방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이 한 실수가 뭔지 알아요?”
방표가 대답하기도 전에 청명이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멍청하게 동아줄을 안 치웠다는 거죠.”
“……뭐?”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앗!
청명이 등진 절벽에서 수십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시에 솟구쳤다.
특히 가장 먼저 올라온 무인을 확인한 방표는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여, 여사혼! 어, 어떻게!”
저들은 분명 내력을 금제당했었는데, 그걸 누가 풀었단 말인가? 심지어 방표조차도 저들의 금제를 풀 수는 없었다.
“방표오오오오오오오오!”
절벽 위에 내려선 여사혼은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었다.
“이 개 같은 놈! 내 오늘 너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여 네 손에 죽어간 이들의 원한을 갚겠다!”
방표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만큼 여사혼의 살기는 무시무시했다. 그뿐 아니라 절벽 위로 올라선 이들 모두가 심장이 떨릴 만큼 살벌한 독기를 뿜어냈다.
왜 아니겠는가?
자랑스러운 북해빙궁의 무사에서 한순간에 죄수로 추락하여 박해를 받아 온 이들이다.
게다가 처음 이곳에 함께 잡혀 왔던 이들 중 반수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그 원한이 적을 리가 없었다.
“여, 여 장로.”
죄수들이 속속들이 절벽 위로 올라올수록 방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헤헹.”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은 기분 좋게 콧소리를 냈다.
“북해에서 간수질이나 해 댔더니 정신을 놓아 버린 모양이네요. 감히 그 수로 우리를 상대하겠다고요?”
“…….”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청명을 보며 방표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저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으으으!”
“이…….”
절벽 위에 올라선 죄수들이 핏발이 선 눈으로 방표를 노려보며 서서히 옭매고 들었다. 몇 년 만에 몸 안에 내력이 도는 것을 느낀 이들에게 무서울 것이 무어 있겠는가?
그들의 기세에 빙궁의 무사들이 모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자, 장로님.”
“어찌합니까? 장로님!”
하지만 방표에게선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뭐 해요?”
청명의 말에 죄수들이 모두 그를 주시했다.
“쓸어 버려요.”
청명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죄수들은 일제히 광포한 기세를 내뿜으며 짓쳐 달려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빙궁의 배신자들!”
“역도들을 죽여라!”
죄수들이 성난 파도처럼 간수들을 몰아쳐 가는 모습을 보며 청명은 낄낄 웃어 댔다.
“좋아! 반역의 서막이다!”
“반격의 서막 아니냐?”
“아냐. 반역이지. 궁주를 끌어내릴 거니까!”
챙.
청명의 검이 뽑혀 나왔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지금부터는 외길이었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에 모든 것이 걸렸다.
“준비해!”
“도울 거냐?”
“아니. 저기 오잖아, 우리 상대가.”
청명의 말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과연, 눈보라로 흐릿하게 가린 시야에 일렁이는 형체들이 들어왔다.
“……저게 진짜군.”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이들의 무위도 녹록하진 않았지만, 지금 이쪽으로 질주해 오고 있는 저들의 기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왜? 겁먹었어?”
청명의 물음에 백천이 피식 웃었다.
“어쭈? 웃어?”
“청명아.”
“응?”
“……겁 대가리라는 걸 가지고 있기에는…….”
백천의 눈이 새파란 광망을 내뿜었다.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
백천이 앞으로 한 발짝 성큼 나서자 화산의 제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가자!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 준다!”
“예, 사숙!”
“준비됐습니다!”
“대가리 깨 버려!”
“오오오오!”
백천이 선두로 달려 나가자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 혜연마저 괴성을 내뿜으며 질주해 나갔다.
“…….”
뒤에 남겨진 채 그 광경을 보던 청명은 작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저 미친놈들.”
사형.
장문사형.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