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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91화 (489/1,567)

491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1)

“……지랄 맞네, 진짜.”

청명이 빠득빠득 이를 갈아붙였다.

하여튼 이 마교라는 것들은 전생에서고 지금에고 쥐뿔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아니,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이면 차라리 다행이지.

“끄으응.”

속에서부터 우러난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동시에 그의 눈에 섬뜩한 독기가 어렸다.

“……차라리…….”

청명의 시선이 소매에 든 빙정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마교는 천마를 살리기 위해서 빙정을 원한다. 물론 청명은 그 미친놈들이 진짜로 천마를 부활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지만,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냥 다 깨 버릴까?”

“뭐? 빙정을?!”

화산의 제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쩍 벌렸다.

“야, 이거 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고생이 문제가 아니잖아! 빌어 처먹을!”

“호, 혼원단은? 녹림에 주기로 한 건?”

“혼원단이고 나발이고…….”

청명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물론 녹림왕과의 약속은 중요하다. 하지만 천마의 부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악재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녹림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순순히 참을 리는 없겠지만, 천마와 싸우느니 녹림과 싸우는 게 백 배……. 아니, 천 배쯤 낫다.

다만.

“끄응. 말이 쉽지.”

빙정이 모두 없어져 천마를 부활시키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걸 마교 놈들이 알게 된다면?

‘말 그대로 미쳐 날뛰겠지.’

의욕을 잃고 시무룩해지고 의기소침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어디 그럴 위인들인가? 보나마나 눈을 까뒤집고 온갖 발악을 다 해 댈 것이었다.

그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뛴다면 북해는 개미 새끼 하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마교도 중 제정신 박힌 놈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므로 이건 정말 최후의 최후에나 생각해 봐야 할 방법이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결국 싸워야 한다는 건데…….”

청명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빌어먹을 마교 새끼들, 이번에도 지랄이네. 이번에도! 중원의 지원을 받아도 감당이 안 되는 마교를 우리끼리 무슨 수로 상대하라고!”

그로도 모자라 거품을 물 기세로 땅을 나뒹굴었다.

“으아아아아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어어어!”

그의 자지러지는 모습에, 화산 제자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종이 백천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쟤를?”

“…….”

“무슨 수로?”

윤종은 슬쩍 뒤쪽의 죄수들 눈치를 살피다 다시 속삭였다.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데.”

“비무대회에서는 보는 눈이 없었던 모양이지.”

“…….”

백천은 많은 것을 놓아 버린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발악하는 건 좋으니, 제발 발악 다 끝내고 나면 제정신만 찾아다오. 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마.

사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청명이 놈 신경이 쇠심줄로 이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마교가 바로 옆에서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고, 그 마교가 찾는 물건이 제 소매 안에 있는데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일단은 조금 진정을 시키고…….’

그런데 백천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청명이 벌떡 일어났다.

움찔한 백천은 재빨리 그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노기와 짜증, 분노와 억울함.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로 뒤섞인다 싶더니 청명의 입가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아니지?”

그의 눈은 곧 불안하게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따져 보면 언제는 내 일이 잘 풀린 적 있었나? 산이 막으면 산을 갈아 버리고, 강이 막으면 강을 뒤틀어 버리면 그만이지!”

그 호기로운 말에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세상에. 저게 도사구나. 저게 도사야.’

청명아.

너 혹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무슨 뜻인지는 아니?

태상노군이 널 보시면 입에 피거품 문 채로 뒷목 잡고 쓰러지시겠구나.

하지만 청명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그래……. 너희들이 여기서 부활을 하겠다 이 말이지?”

누구 맘대로, 이 새끼들아?

두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운이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야. 이 마교 새끼들, 하필 내 눈에 띈 걸 처절히 후회하게 해 주겠어!”

온몸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청명을 보다 윤종이 또다시 속삭였다.

“사숙. 상황이 뭔가 불안하게 돌아가는데요?”

“윤종아.”

“예.”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란다.”

“……무슨 뜻입니까?”

“포기하면 편하다는 의미지.”

“……백천 시주, 그건 그런 뜻으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듣고 있던 혜연이 조용히 끼어들었지만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과거 빙궁의 일장로, 여사혼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예?”

갑작스런 부름에 여사혼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상황은 대충 파악하셨죠?”

여사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저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를 보아 일단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는 적당히 정보만 얻고 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마교 새끼들이 중원인들에게 밀려나서 여기에 처박힌 게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왔다는 거죠. 천마를 부활시키겠다는 목적!”

“…….”

“그게 성공하든 실패하든 북해는 끝이에요. 성공하면 당연히 끝이고, 실패하면 이 새끼들이 미쳐 날뛸 거예요.”

“아니, 그걸 어떻게…….”

“마교는 원래 그래요.”

내가 당해 봐서 알아, 이 양반아! 내가!

청명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아저씨!”

“……예?”

여사혼.

그는 분명 과거의 신분으로나 경험으로나 누구에게 밀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화산의 젊은 도사에게 자꾸만 말려드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풀려나면 빙궁을 다시 찾을 수 있겠어요?”

“비, 빙궁을 다시 찾는다고 하셨습니까?”

“네.”

여사혼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내력도 잃은 저희가 무슨 수로 빙궁을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마교의 금제로…….”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어요.”

“……예?”

“금제 그거, 제가 풀어 드릴 수 있다고요.”

여사혼이 눈을 찢어지게 부릅떴다.

“뭐, 뭐라고…….”

“아, 귀가 잘 안 들리시나! 그 금제 제가 풀어 드릴 수 있다니까요. 내력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다고요.”

“그걸 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세상에서 마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마교도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마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은 사람은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마교가 한창 발호하던 때에도 청진 정도를 제외하면 그보다 마공을 잘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궤가 다르긴 뭐가 달라.’

너희들이 경지가 떨어지니 그런 거지!

그러고 보면, 청명도 돌아온 이후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래도 이제는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지 않으니까.

옛날의 매화검존 같았으면 면전에다 대고 ‘니들이 약해 빠졌으니 그거 하나 못 풀지, 이 천치들아.’ 하고 바로 질러 버렸을 것이다.

“그,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속고만 사셨나! 제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여요?”

“…….”

“……왜 대답이 없으시죠?”

“아니…… 뭐…….”

대답을 망설이는 여사혼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로를 했던 분이라 그런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

‘절로 믿음이 간다.’

그때 청명이 단호한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

“각설하고.”

그리고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내력을 찾고 여기서 나갈 수만 있으면 전대 궁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빙궁과 한판 할 수 있는 건지.”

여사혼의 얼굴에 곤혹스런 기색이 스쳤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요? 듣자 하니 지금 궁주는 폭정 때문에 민심을 많이 잃은 상태라던데. 이쪽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나요?”

여사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빙궁의 무사들은 물론이고 북해인들조차 우리를 지지하지 않을 겁니다.”

“왜요?”

“우리는 설가(雪家)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명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설가?”

“예. 북해의 지도자는 대대로 설가에서 맡아 왔습니다. 설가가 아닌 이들은 북해인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진 청명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게 대체 뭔…….”

화산의 제자들 역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정말 왕국이로군.”

“그러니까요. 문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혈족으로 이루어진 세가에서조차 특정 몇몇이 가주의 자리를 독점하지는 않는다.

“……그럼 적당한 다른 설가는 없습니까?”

백천의 물음에 여사혼이 고개를 저었다.

“설가는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이었습니다. 지금 북해에서 설가의 명맥을 잇는 이는 설천상뿐입니다.”

“끄응.”

뭔가 일이 끔찍하게 꼬여 간다는 생각에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아니, 진짜 다른 방법은 없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여사혼은 자신도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제가 중원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북해의 특성상, 설가의 핏줄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참변 때 달아난 선대 궁주의 아들이라도 있다면 어찌 해볼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조걸이 입을 열었다.

“선대 궁주의 아들요?”

“……그렇소.”

화산의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설소백인가 하는 걔 말인가?”

“그런 것 같은데요?”

여사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대들이 그걸 어떻게…….”

“만났어요.”

청명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한이명인가 하는 양반이랑 같이 있던데요.”

“하, 한 총관이?”

입을 쩍 벌린 여사혼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비록 육신은 이곳에 갇혔지만, 그간 그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얼마나 갖은 애를 썼던가?

하지만 몇 년 동안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설소백의 소식을 이들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모르죠.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심드렁한 대꾸에, 여사혼의 얼굴에 떠올랐던 희망이 급격하게 꺼져 갔다.

“아……. 그들의 행방만 알 수 있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건만…….”

“그래요?”

“……예. 설 공자는 설가의 적통입니다. 선대 궁주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설 공자의 행방만 찾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흐으음.”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니까, 그 설소백인가 하는 꼬맹이를 찾아내면 외부의 세력과 빙궁 내의 전대 궁주파를 규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지요. 하지만 이 넓은 북해에서 그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청명이 흐뭇하게 웃는다.

“하는 것 없는 식충이를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드디어 밥값을 하는 때가 오는구나.”

“……예?”

청명이 자신의 가슴께를 툭툭 쳤다.

“야, 나와 봐.”

키익?

그러자 그의 옷 안에서 새하얀 털 뭉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졸다가 깼는지 까맣고 동그란 눈에 졸음이 묻어났다.

청명은 백아의 허리를 덥석 잡아 밖으로 꺼냈다.

“그 꼬맹이 기억하지?”

청명의 손에 잡힌 백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찾을 수 있지?”

…….

“냄새 기억하라고 했잖아. 찾을 수 있지?”

잠깐 청명을 빤히 보던 백아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백천이 그 양을 보다 조걸에게 속삭였다.

“걸아. 원래 짐승도 땀을 흘리냐?”

“일단 개는 안 흘리는 거로 아는데요. 담비는 어떨지…….”

“……흘리나 보네. 영물이라 그런가.”

그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백아의 뒤통수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 모습이.

청명은 다시 한번 물었다.

“왜? 못 찾아?”

키이!

짐승의 말을 알아들을 방법이 있겠냐마는, 이상하게도 저 울음소리의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 말로 옮긴다면, ‘야, 이 미친놈아. 이 넓은 데서 냄새 하나로 사람을 어떻게 찾냐?’쯤 될 것이다.

“못 찾아?”

…….

“못 찾는다고?”

…….

백아의 뒤통수에선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진짜?”

청명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백아는 아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익! 키이이이! 키이!

“옳지. 그래야지.”

청명은 흐뭇하게 웃으며 백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그럼 간단하네.”

그가 고개를 획 돌려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래 남의 문파 일에는 어지간해선 끼어들지 않는 편인데,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뭘 하려고?”

“뭘 하긴?”

청명은 히죽 웃었다.

“마교 새끼들을 족치는 거지.”

“……병력이 부족하지 않느냐?”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빙궁에 널린 게 병력인데!”

“너, 너…… 설마?”

“그래.”

청명이 눈에 새파란 귀화가 어렸다.

“그 설소백인가 뭔가 하는 꼬맹이를 찾아서 꼭두각……. 아니, 잘 이용해서 빙궁의 무사들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 그리고 빙궁을 이끌고 마교 새끼들을 싹 다 쓸어 버린다!”

힘 있는 목소리로 굵고 짧게 설명한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간단하지?”

“어……. 아주 간단하네.”

뒈지는 게 좀 더 쉬워 보인다는 것 말고는 다 괜찮네.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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