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5)
“끄윽…….”
“우욱!”
광포한 살기에 여사혼을 비롯한 죄수들은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신음했다.
의형살인(意形殺人).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보여 주는 지독한 살기였다.
“시주!”
“처, 청명아! 진정해라!”
백천이 기겁을 하며 다가가 청명의 양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움찔한 청명이 천천히 앞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제야 살기를 풀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커헉!”
과도한 압력에서 일순간 풀려난 여사혼이 크게 기침을 해 댔다.
평소라면 자신이 한 실수에 대해 바로 사과했을 청명이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강림? 천마가?”
“……그, 그렇습니다! 저, 저는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미친 것들이…….”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던 것들이 드디어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왜 이 먼 북해까지 왔는가? 그리고 어째서, 하필이면 빙정을 원하는 것인가?
“원리야 알 도리가 없지만…….”
그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천마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고, 그 의식을 행하는 데 대량의 빙정이 필요하다면?
“……외지여서 북해를 택한 게 아닌 건 확실하군.”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북해, 정확히는 빙정이었던 것이다.
청명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 기억해라. 화산의 제자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마(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개소리 지껄이고 있네.”
청명이 이를 빠드득 갈렸다.
천마가 부활한다고?
‘누구 맘대로?’
청명이 두 눈을 뜨고 있는 이상 그런 꼴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놈은 목이 잘려 있는 모습이 가장 어여쁘니까.
‘빌어먹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마교의 잔당들이 천마의 부활을 획책하는 상황에 마침 북해에 도착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천마가 진짜 부활하는 사태가 터졌다면 화산은 물론이고 전 중원이 지옥으로 화했을 테니까.
하지만 화산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들만으로 저 마교 놈들과 싸워야 할 판이었다.
“으, 돌아 버리겠네!”
상황을 곱씹으며 이해한 청명은 머리를 움켜잡고 쥐어뜯었다. 가뜩이나 치렁치렁한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청명아. 괜찮으냐?”
“괜찮아 보여?”
눈을 희번덕거리며 날카롭게 물은 청명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했다.
“후욱! 후욱! 일단 좀 진정하자. 진정.”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을 찾아보자면, 어쨌건 아직 천마는 부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저 미친놈들은 권력욕도 없나?! 위에서 턱짓으로 사람을 부려 대던 놈이 곱게 뒈져 줬으면 옳다구나 하고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대체 뭔 생각으로 그 말도 안 되는 놈을 다시 살리겠다고…….”
“……아니. 애초에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냐?”
조걸의 물음에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안 된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청명이야말로 그게 가능하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기 때문이다.
‘나는 되는데 천마는 왜 안 돼?’
사실 이미 몇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를 피해 왔을 뿐, 어쩌면 천마는 이미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되살아나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청명은 되는 일이 그에게만 불가능할 리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마음이 캄캄해졌다.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 그 미친놈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생각인가?
“이것도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어쨌건 저놈들이 저 미친 짓거리를 해 대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천마가 부활한 건 아니라는 의미겠지.
“어휴!”
앓느니 죽어야지.
“여기. 여기 앉아 봐!”
청명이 바닥을 팡팡 두드리자 화산의 제자들은 말없이 일단 자리에 앉았다.
청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뗐다.
“자. 정리하자고. 그러니까, 저 마교 새끼들이 천마를 부활시키는 미친 짓을 하기 위해서 지금 북해에서 빙정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 이거지.”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빙궁은 옳다구나 거기에 협조하고 있……. 아니, 진짜 미친 새끼신가? 천마가 뭔 줄 알고 거기에 협조하고 있어? 천마가 살아나면 빙궁주 모가지부터 제일 먼저 예쁘게 잘라 버릴 텐데!”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자살 방법이 있다. 그 많은 방법들 중 굳이 그런 신화적인 자살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텐데.
“수하로 들어갈 생각 아니겠느냐?”
“사숙은 천마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는 어떻게 알고?”
“……다 방법이 있어. 바쁘니까 따져 묻지 마.”
일단 천마 그 새끼에게는 수하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
‘마교도들 숱하게 죽는 것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놈인데, 빙궁을 받아 줄 리가 없지.’
마교의 신앙은 일방통행이다.
마교도는 더없이 천마를 숭상하고 경외하지만, 천마는 마교도를 딱히 아끼고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마교도들이 천마를 따르냐고?
“그러니 미친놈들이지.”
“갑자기 뭔 소리냐.”
“아냐.”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러니까…… 여하튼 그 부활인가 뭔가가 얼마 안 남았고, 빙정이 더 필요해서 이 사람들을 그렇게 닦달하고 있었다, 이 말이잖아?”
청명이 고개를 획 돌리자 여사혼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이곳의 노역은 가혹하기 그지없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거의 사람을 죽일 기세로 재촉을 해 댔습니다. 덕분에 병이 나고 탈진하여 쓰러진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끄응. 이게 맞으면 안 되는데.”
모든 단서가 맞아떨어지며 의문이 풀리고 있는데도, 기쁘기는커녕 속이 더부룩해졌다.
“관건은 빙정이군. 그런데 그 빙정이…….”
청명은 슬쩍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과하게 캐낸 빙정이 모조리 그의 소매 안에 들어 있었다.
“……여기 다 있네.”
“…….”
화산 제자들이 모두 살짝 움찔했다.
“……더 캐내면 되는 것 아닐까?”
“여긴 이제 한동안 빙정이 안 날 거야.”
“……왜?”
“내가 싹 다 끌어모았거든. 한동안 음기가 차올라 새로운 정(精)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파 봐야 별 의미가 없어. 아주 지하 끝까지 뚫고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야.”
잠깐 고민하던 백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래.”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들이 천마를 부활시키는 데 필요한 마지막 열쇠가 다름 아닌 내 수중에 있단 거지.”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눈이 돌아간 마교도 놈들이 빙정을 노리고 그에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습이 말이다.
천마라는 이름이 얽혀 있는 이상, 그놈들은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고 발악을 해 댈 게 분명했다.
“낄낄낄낄.”
실성한 것처럼 낄낄 웃어젖히던 청명이 돌연 바닥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상황 참 더럽게 꼬였네, 빌어 처먹을!”
* * *
빙궁의 궁주실.
“빙정을 캐냈다고? 그것도 대량으로?”
“예, 궁주님.”
보고를 듣던 설천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토록 죄수들을 재촉하고도 캐지 못했던 빙정을 단번에 캐냈단 말이지?”
“……그러합니다.”
설천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짓 보고가 올라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빙정이라…….”
그는 이미 화산의 문도들에게 자신들이 캐낸 빙정을 구입해 갈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결국 그들이 많이 캤다는 빙정들은 모두 화산파의 것이 된다는 의미였다.
“웃기지도 않는군.”
중얼거린 설천상은 말과는 달리 허허 웃어 버렸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궁주님?”
설천상과 함께 자리하고 있던 이장로가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저들’이 이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설천상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장로를 노려보는 눈에 노기가 형형했다.
“그럼 내가 그놈들을 두려워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냐?”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이장로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며 부인했다. 설천상은 살짝 짜증 어린 눈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일이 꼬였군.’
그저 광산에서 시간이나 보내라고 허가한 것인데, 설마 그걸 정말 캐 버릴 줄이야.
“어쩔 수 없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설천상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당히 달래서 빙정을 내어 놓으라고 해야지. 추가로 나는 것은 모두 준다고 하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듣지 않아?”
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싸늘한 목소리가 천천히 새어 나와 대전을 울렸다.
“강제로 빼앗는 수밖에.”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쯧. 내 말을 어찌 들은 것이냐. 놈들은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하면 어찌…….”
“죽이고 빼앗는 것과 그냥 빼앗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놈들을 죽인다면 중원의 문파들이 항의를 해 오겠지만, 여기서 난 물건을 우리가 빼앗는 것을 무슨 수로 따져 묻겠느냐?”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사실 그건 애초에 빙궁의 물건이지요.”
“그렇지. 그럼 될 일…….”
그런데 말을 하던 설천상이 얼굴을 굳히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예?”
“아니지, 아니지. 혹시 모를 일이지. 놈들이 빙정을 챙겨 그대로 달아나 버릴 수도 있다.”
그 말에 이장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멍청한 소리. 빙정은 무가지보다. 아무리 반값이라고 해도 그 많은 빙정을 살 돈이 그놈들에게 있겠느냐? 설령 있다고 해도 이곳까지 들고 왔을 리가 없지.”
“아…….”
설천상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만에 하나 놈들이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생겼다간, ‘주교’의 분노가 그에게 오롯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말이다.
“빙검단(氷劍團)을 보내 놈들을 잡아 오라고 해라.”
“그곳에도 충분한 무사가 있습니다.”
“놈들을 얕보지 마라. 중원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라면, 그리 만만한 놈들이 아닐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경우조차 있어서는 안 돼!”
이장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 명하겠습니다.”
“정 반항이 심하다면 죽여도 좋다.”
“…….”
“움직여라! 어서!”
“예!”
이장로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따라오거라.”
“예!”
그의 명에 보고를 하러 왔던 이가 뒤를 따라나섰다.
궁주실 밖으로 빠져나온 이장로는 문을 닫기 전 슬쩍 설천상의 안색을 살폈다.
‘겁을 먹었군.’
논리적인 척, 담대한 척하지만, 결국엔 주교의 분노가 자신에게 떨어질까 봐 지금까지 지켜 온 원칙조차 모조리 내팽개친 것에 불과했다.
‘궁주. 그렇기에 나도 당신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거요.’
이장로는 문을 닫고 지체 없이 계단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빠르게 첨탑의 계단을 내려갔다.
“다 들었겠지.”
“예! 장로님.”
“너는 즉시 이 길로 빙검단으로 가서 궁주님의 명을 전하거라.”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장로가 품에서 장로의 직위를 증명하는 신분패를 꺼내 건네었다.
“이걸 보여 주면 문제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면 장로님께서는……?”
“나는 따로 살필 일이 있다. 지체하지 말고 움직여라!”
“예!”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사내는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이장로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뒤틀었다.
‘좋은 정보를 얻었군.’
아주 좋은 정보다.
그분들이 들으시면 더없이 기꺼워하시겠지.
사내의 뒤를 따라 걸음을 떼던 이장로는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빙궁 내부가 아닌 밖이었다.
스슷.
순식간에 성을 벗어난 그는 은밀하고도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서쪽의 성벽을 제비처럼 타 넘고 설원을 질주했다.
그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 기나긴 기다림의 끝을 장식할 최후의 조각이 바로 지금 맞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