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4)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자꾸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윤종이 얼굴을 붉혔다.
“자꾸 이러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저희가 뭘 했다고…….”
“아닙니다.”
선두에 선 이가 윤종의 손을 잡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 조금의 휴식과 따뜻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저희에게는 그 이상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윤종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맞잡은 손이 너무도 거칠었다. 오랜 노역으로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진 손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정말 감사……. 쿨럭! 쿨럭!”
감사를 표하던 이가 입을 가리고 돌연 크게 기침을 해 댔다.
“……죄송합니다. 간만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서 그런 모양……. 쿨럭!”
“괜찮으십니까?”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윤종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보다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음기에 많이 상했어.’
멀쩡한 무인이라 해도 이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결국은 병이 나고 말 터인데, 내공을 금제당한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따듯하게 데운 술을 좀 드시고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리로 돌아가는 사내를 보던 윤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조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
“음?”
“청명이 놈이 사형도 모시고 오랍니다.”
“갑자기 왜?”
“글쎄요. 그놈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윤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꽤 오랜 시간 청명과 함께해 온 그들이지만 여전히 청명이 하는 일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 청명이 놈이 죄수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려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 보자꾸나.”
“예.”
두 사람은 계곡 이곳저곳에 뚫린 동혈 중 하나로 향했다. 입구는 조금 좁아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찬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계곡보단 한가운데보단 나았다.
안쪽에는 이미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 몇몇 죄수들이 보였다.
“왔으면 앉아.”
“무슨 일이냐?”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청명의 말에 윤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더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앞에 사람을 두고 그들끼리 이야기를 오래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먼저…….”
윤종이 앉기가 무섭게 청명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넙죽 절하며 입을 열었다.
“은공들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화들짝 놀란 윤종이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보다 청명이 조금 더 빨랐다.
“고마우시면 쓸데없는 예의는 빼 주셨으면 좋겠네요. 저희 바쁜 사람들이거든요.”
“알겠습니다.”
노인이 가만히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은공들께서는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시지요?”
“네. 화산파예요.”
“화산. 화산…….”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에 화산이라는 이름은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북해에도 화산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이곳에 감금되어 노역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 만도 했다.
그때의 화산은 명성을 잃고 몰락해 있었으니까.
백천이 그런 노인을 도와주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문파이니, 괘념치 마십…….”
“뭐? 화산이 안 유명하다고?”
청명이 날카롭게 자르고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백천은 떨떠름한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화산이 유명했던 건 아주 오래 전 아니냐.”
“나도 알아.”
“그런데 왜?”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난단 말이야.”
“…….”
백천의 뺨이 짜증으로 미미하게 씰룩거렸다.
‘나는 이 새끼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니, 예전에도 몰랐으며 지금도 모른다가 맞겠지.
“여하튼 화산을 모르시면 지금부터라도 기억해 두세요. 앞으로 들을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에 있는 저희가 외부 소식을 들을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청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러게 왜 죄를 지으셔선.”
“…….”
청명에게 눈치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죄라는 말이 나오자 노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저희는 죄인이지만, 죄를 지은 적은 없습니다.”
“…….”
“반란에 맞서 궁주를 지키려 한 것이 죄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게 어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백천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얼핏 듣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들은 전대 궁주의 수하들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지금의 궁주인 설천상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제압되어 이곳으로 끌려왔겠지.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다…….”
청명이 슬쩍 중얼거리며 뺨을 긁적이더니 물었다.
“여기 지금 사람이 얼마나 있죠?”
“백여 명쯤 됩니다.”
노인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뒷말을 붙였다.
“처음에는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이 정도의 인원이 이곳에서 죽어 나갔다는 뜻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에 백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가 무언가 더 말하기도 전에 청명이 선수를 쳤다.
“그런데 저희한테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
“도와달라는 건가요? 여기서 빼내 달라고?”
노인은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요?”
주름진 입가에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여사혼(汝思混)이라고 합니다. 과거 저는 북해빙궁 대장로의 신분으로 궁주님을 모셨지요.”
“예?”
백천은 화들짝 놀라 노인을 새삼 다시 보았다.
이 추레한 노인이 빙궁의 대장로였다고?
문파마다 조금씩 차이야 있겠지만, 대장로라는 호칭은 문파의 서열에서 최소 다섯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는 이를 지칭할 때 쓴다.
화산으로 치자면 현상이 대장로가 된다. 장로들 중 가장 윗사람이 바로 현상이니까.
그런데 그런 높은 신분을 가진 이마저 이리 죄수가 되어 간수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처지라니…….
“옛일입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여사혼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회한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빙궁의 무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금제를 당해 더는 내력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요.”
여사혼이 고개를 내젓는다.
“평범한 금제법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들여 풀어 보겠지만, 우리를 금제한 이들은 다름 아닌 그…….”
“마교라고요?”
말을 멈춘 여사혼이 눈을 부릅떴다.
“알고 계셨습니까?”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자 여사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무학 체계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몇 년 동안이나 금제를 풀어 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풀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으음.”
백천이 갑갑한 마음에 신음을 흘렸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저희는 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건 시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뭔데요?”
여사혼이 굳은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의 처지를 알려 주십시오.”
“네?”
“이곳에 핍박받는 북해인이 있다는 걸, 중원에 알려 주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잠깐 그를 멍하니 보던 청명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뭔 의미가 있어요?”
“지금의 궁주는 악마 같은 이입니다.”
엉망진창으로 부르튼 여사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빙궁에 장벽을 쳤습니다. 과거의 빙궁은 성벽을 두르고 북해인을 나누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드넓은 북해 전체를 보듬고 보살피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궁주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 성벽 안으로 받아들이고, 성벽 밖에 있는 자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백천은 오면서 봤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그 높은 성벽이…….’
설마 그런 용도였을 줄이야.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편안한 삶을 주고, 따르지 않았던 이들은 가혹하게 수탈하며, 심지어는 저 마교의 손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반항하는 이는 모조리 이곳으로 끌려와 가혹한 노역 끝에 죽게 됩니다. 이런 자가 어찌 빙궁의 궁주일 수 있습니까?”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심하긴 하네요.”
“예. 그러니 알려 주십시오. 이 북해의 상황을 중원에! 소림이든 무당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그들이라면 저희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청명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는 알겠네요.”
“……예?”
“당신들이 왜 졌는지.”
여사혼의 쪼글쪼글한 눈이 부릅뜨였다.
“중원에 알리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중원에는 협의지사들이 가득하다 들었소! 아니, 협의가 아니더라도 마교와 그 큰 전쟁을 벌였던 중원인들이 마교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도 그저 가만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정말 중원이 이곳의 상황을 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정말로?”
청명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여사혼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청명도 그런 그를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뭐라도 해 보고 싶은 그 심정은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는 지푸라기일 뿐이다.
“중원은 북해를 돕지 않아요.”
“…….”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에 손을 내밀 만큼 그리 대단한 이들이 아니니까.”
여사혼은 입술을 짓씹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저 사람들이 왜 순순히 절벽 위로 올라갔는지 알아요? 여러분이 우리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
“우리가 그 말을 들어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단 걸 알기 때문이죠.”
그런 것쯤은 여사혼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다른 이에게서 듣게 된 여사혼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 말로도 부족했다.
“중원은 빙궁을 도울 이유가 없어요. 빙궁을 지키기 위해서 대신 목숨을 걸 이유도 없고요. 설사 이곳에 마교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한차례 봤으니까.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중원을 지키려 했던 문파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그 멍청한 짓거리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그걸 본 이들이 자신도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리가 없었다.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나직이 말했다.
“똑똑히 알아 두세요.”
“…….”
돌연 느껴지는 그의 기이한 박력에, 여사혼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화산의 제자들조차 그 기세에 눌려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대신 지켜 주지 않아요. 아무도 대신 싸워 주지 않아요. 지키고 싶다면 자기 손으로 움켜잡아야 하고, 싸워야 한다면 내 피를 흘려야 해요.”
“……소협.”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망연히 청명을 보던 여사혼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소?”
허망함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내력을 쓸 수 없는 반편이에 불과하오. 그리고 더는 빙궁의 문도들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을 거요. 이미 지금 궁주의 손에 장악되었으니까.”
청명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몸은 쓰지 못한다 해도, 눈과 귀는 있겠죠.”
“……예?”
“그 마교 놈들 급한 성미에 빙궁까지 빙정이 옮겨지길 차분히 기다렸을 리는 없고, 분명 여기서 빙정을 받아 갔을 텐데요?”
“……정확합니다.”
역시나.
청명은 살짝 얼굴을 구기며 빠르게 물었다.
“혹시 뭐 들은 것 없어요? 그놈들이 빙정을 어디에다 쓰려는지, 그 용도 같은 거?”
여사혼이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빙정을…… 글쎄요.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청명의 어깨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허탕인가.’
뭔가 단서라도 하나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저, 저기.”
그때였다.
지금까지 여사혼의 뒤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관련이 있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요?”
“예. 하지만 워낙 황당한 말이라, 이게 정말 관련이 있을지는…….”
청명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말씀해 보세요. 뭐든 좋으니까.”
“예. 그…… 제가 빙정을 날라 가는 역할을 해서 마교도 놈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때 그놈들이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고요?”
마른침을 삼킨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천마의 재림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세상에 천마가 다시 강림할 것이다.”
청명은 말이 없었다.
그저 미동도 하지 않고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사내를 보고 있던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아 그리 보일 뿐, 청명은 마치 멈춰 버린 시간 속에 선 사람처럼 굳어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청명아?”
백천이 조심스레 청명을 불렀다.
그 순간.
“……라고?”
“예?”
“천마가 재림?”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묘하게 뒤틀린 입은 흡사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지옥의 악귀 같단 표현으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지독한 살기가 청명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