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3)
“…….”
방표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앞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빙정.
북해의 특산물이자 보물인 빙정이 그의 눈앞에, 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내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그가 빙정을 캐는 광산의 책임자를 맡은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만한 빙정이 쌓인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토록 많은 이들을 동원하여 굴을 파내도 한 달에 두세 개 캐기가 힘든 것이 바로 빙정이다. 이만한 양이면 최소한 육 개월치 이상이 아닌가?
‘그걸 사흘도 걸리지 않아 모조리 캐 버렸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세어 보세요.”
“…….”
“뭐라고 하셨더라? 열 개?”
“…….”
“아이고, 나는 눈이 침침해서 이게 몇 개인지 잘 안 보이네. 열 개가 넘나? 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연신 쏟아지는 깐죽거림에, 결국 방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넘어! 넘는다고, 이 새끼야!’
못해도 스무 개는 족히 넘겠구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지만, 결국 방표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네.”
“호오?”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인정이 빠르시네요.”
“내 입으로 한 말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이리저리 변명해 봐야 추하기만 할 뿐.”
방표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곤 말했다.
“자네의 요구대로 이들에게 휴식을 주겠네. 자네들이 떠날 때까지는 일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
“말이 다른데요?”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퉁명스레 말했다.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전에 분명히 제가 원하는 만큼 쉬게 해 준다고 했는데?”
“…….”
잠깐 말을 잃었던 방표는 떨떠름한 얼굴로 청명을 보다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청명이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는 청명의 귀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가더니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살려 주게.”
“…….”
“궁주님이 아시면 나는 죽네.”
“…….”
천하의 청명도 이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와……. 북쪽 사람들은 실리적이라더니, 그게 이런 식으로…….”
“일단 살고 봐야지.”
그의 절박한 표정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던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알겠어요. 그럼 저희가 떠날 때까지는 푹 쉬게 해 주는 걸로 하죠. 대신 약속하신 술과 고기는 진짜 제대로 챙겨 주셔야 해요.”
“그건 내 약속하겠네.”
청명이 이 정도면 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협상이란 상대가 내어 줄 수 있는 한계까지만 건드려야 한다. 이 이상으로 가 버리면 불필요한 반감과 언쟁이 뒤따를 것이었다.
그때 방표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 빙정은…….”
“손대지 마쇼!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
은근슬쩍 빙정을 향해 손을 뻗던 방표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회수했다. 청명은 바닥에 놔뒀던 빙정을 잽싸게 쓸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오, 차가워!”
오만상을 찌푸리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는 절대 빙정을 다시 꺼내 놓지 않았다.
“어으,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
“자, 그럼…….”
“자, 잠시!”
“네?”
방표가 다급하게 불러 세우자 청명은 심드렁한 시선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그…… 자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네. 그 대신에, 대체 어떻게 이 빙정을 찾아냈는지 알려 주면 안 되겠는가?”
“흐으으음.”
짐짓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던 청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좋은 술이랑 고기가 오는지 보고요.”
“……그, 그거면 되겠는가?”
“네, 되죠. 안 될 이유가 있겠어요?”
하지만 방표는 보았다.
청명이 자애로운 얼굴로 빙긋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내는 걸 말이다.
“하하하하.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만 있으면 다 되는 거지.”
중간은 워낙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었는지는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방표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노력해 보겠네.”
“말이 잘 통하네요. 헤헤.”
청명이 히죽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먼발치서 기다리던 일행이 슬금슬금 옆으로 따라붙었다.
“청명아.”
“왜?”
“……그 비법을 말해 줘도 되는 거냐?”
물론 딱히 말해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 괜히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 그거?”
청명이 피식 웃더니 비밀스럽게 속닥거렸다.
“말해 줘도 못 해.”
“……응?”
“왜냐면, 딱히 대단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던 청명이 어깨를 활짝 펴고 배를 쭉 내밀었다.
“그냥 내가 잘난 거거든.”
“…….”
화산의 제자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보다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데 혜연만은 외려 빙그레 웃으며 청명의 말에 긍정했다.
“그것 참 옳은 말이외다, 시주. 시주는 언제나 바른말만 하시는구려.”
“오. 우리 땡중 드디어 뭘 좀 아는데?”
“그런데 시주, 그거 아시외까?”
“뭘?”
“예로부터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제일 일찍 죽더이다.”
“…….”
아니, 이건 명색이 중이라는 놈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하여튼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 가지고는…….
잠깐 멍하니 그를 보던 청명은 혀를 끌끌 찼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환한 얼굴로 죄수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치만 살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저, 정말 쉬어도 되는 건가?”
간수들의 눈치를 보았지만, 평소라면 온갖 험악한 말을 퍼부었을 간수들 역시 굳은 얼굴로 보고만 있을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그저 이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오는 청명에게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청명이 입을 열었다.
“뭐 해요?”
“……예?”
“다 들었으면서 왜 그러고 있어요? 지금부터 다들 쉬면 돼요.”
“…….”
하지만 그들은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청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방표에게 말했다.
“밥은요? 밥은 언제 오는데?”
“끄응……. 지금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거 빠릿빠릿하지 못하시게.”
방표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죄수들은 모두 이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지옥의 악귀 같던 그 방표가, 저 어린 중원인의 손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방표를 닦달한 청명은 죄수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일단 그럼 이야기나 좀 해 볼까요?”
방표는 자신이 무능해 빠진 인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해가 지기 전에 술과 음식을 공수해 오는 데 성공했다.
산처럼 쌓인 음식과 술을 보며 죄수들은 저마다 입을 벌릴 수 있는 만큼 벌렸고, 청명 역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표를 향한 청명의 괴롭힘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다 나가라고?”
“네.”
“왜 그래야 하는가?”
“쉬게 해 준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거참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조금 전까지 채찍질해 대던 간수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 편하게 쉬어요? 먹다 체하겠네!”
“끄응.”
방표는 무어라 대꾸하려다 한숨만 푹 내쉬었다.
‘빙정 탐색법만 아니었다면…….’
빙정 광산의 책임자로 있는 그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찾아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방법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빙궁 내 그의 입지는 수직 상승 할 것이 분명했다.
‘신분만 아니었으면 잡아 가두고 문초라도 했을 것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빙궁주의 손님 자격으로 왔다. 빙궁주의 손님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목이 잘려 나가고 말 것이었다.
일단은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빙궁주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게 최선일 터였다.
“……알겠네. 내 그리하지.”
“자, 장로님?”
“자리를 비워 줘라!”
“그러다 탈출이라도 하면…….”
방표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탈출이라니! 이 깊은 계곡을 무슨 수로 탈출한단 말이더냐? 그렇게 걱정이 되면 너희가 위를 지키고 있으면 될 일이 아니더냐!”
그 순간 다른 간수들이 입을 연 간수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았다.
괜히 한마디 꺼냈다가 눈보라가 치는 계곡 위에서 꼬박 번을 서게 생기지 않았는가?
“잔말할 것 없다. 시행하라!”
“예!”
간수들이 모두 동아줄을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죄수들은 점차 절벽 위로 사라져 가는 간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자 죄수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쌓여 있는 음식들로 이동했다.
꿀꺽.
여기저기서 군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지만, 누구 하나 선뜻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다.
“뭐 하세요?”
“……예?”
“얼른 드세요. 다 식겠네.”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명아.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다 식었다. 얼음덩어리 같아.”
“끄응.”
청명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하튼 쉽게 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여기 적당한 동굴 같은 거 있어요? 사람들 다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라기보다는…… 저 앞쪽에 바람이 그나마 덜 들어오는 공간이 있기는 합니다.”
“아, 그래요?”
청명이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산 제자들을 흘끗 보았다.
“뭐 해? 옮겨.”
“알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산 일행이 부산하게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슬슬 눈치를 보던 죄수들도 그들과 함께 음식을 옮겼다.
그나마 덜 추운 곳으로 모두 옮겨 온 후, 청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땔감도 없나?”
“나무가 못 자라는 곳이니까.”
“에휴.”
한숨을 푹 쉰 그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폈다.
초췌한 몰골을 보아하니, 이 얼음장 같은 고기를 먹었다간 곧장 탈이 날 게 분명했다.
“쯧.”
짧게 혀를 찬 청명은 음식 쪽으로 휘적휘적 다가가 손을 뻗었다.
화아아악!
이내 그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만년한철도 녹여 버리는 열양장력이었다. 식은 음식을 데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에 쓰이기에는 너무 귀한 기운이라는 게 문제일 뿐.
“빨리 와서 드세요!”
청명이 소리쳤지만, 죄수들 중 누구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아니!”
결국 참다못한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댁들이 지금 안 먹으면 내가 이거 다시 데워야 한다고! 누구 죽일 일 있어요?”
“지, 진짜 머, 먹어도 되겠습니까?”
“빨리 드세요! 빨리!”
그 말이 신호탄이 된 듯 죄수들이 우르르 음식으로 달려들었다.
“거기 식은 건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다 데워서 줄 테니까! 사숙! 뭐 해!”
청명의 말에 백천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이미 나선 윤종이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천천히 오세요. 천천히! 음식이 모자라면 더 받아다 드릴 겁니다. 그리고 식은 건 건드리지 마세요. 저놈이 다 데워 드릴 겁니다!”
윤종이 나서자 조걸도 재빨리 그를 따라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청명이 데운 음식을 받아 든 죄수들은 멍한 눈으로 자신이 든 것을 바라본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인지…….”
“뭐든 먹어 살아남기 바빴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몇몇은 뭔가 북받치는지 눈가를 훔쳤고, 몇몇은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 댔다.
“천천히 먹게나. 체하겠네.”
“예, 예. 그래야지요. 어서 드십시오.”
서로를 위해 가며 급히 음식을 먹는 그들을 보던 백천은 옆에 잔뜩 놓인 술병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숙, 왜 그러십니까?”
“으음. 이분들이 술을 드셔도 될지…….”
약해진 몸에 혹여나 독이 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금세 풀렸다. 당소소가 해답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그렇더냐?”
“네. 원래 무인이신 분들이라, 큰 문제는 없어요.”
“그럼 됐다.”
고민을 시원하게 털어 버린 백천은 술을 동이째 날라 사람들 곁에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드십시오.”
“……술까지…….”
감격에 젖어 술을 바라만보는 죄수들에게, 백천은 재빨리 속삭였다. 흘끗 뒤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빨리 드셔야 됩니다. 여기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 하나 있어서, 이곳에 있는 음식 모두 데워지고 나면 술이 남아나지를 않을 겁……. 아니! 혜연 스님! 스님이 그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때마침 술동이 하나를 들고 은근히 뒤로 숨어들던 혜연이 백천의 도끼눈을 보고는 슬그머니 술동이를 내려놓았다.
“저는 그냥…… 맛이 어떤가만 확인해 보려고…….”
“그거 한 동이 혼자 다 먹으면 맛이 기억도 안 나겠네.”
“그러게요.”
“저 양반이 왜 저리 됐지?”
이 광산에 들어온 이후로 혜연의 새로운 면을 자꾸만 발견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음식이 어느 정도 줄고, 술도 각기 두세 잔씩 돌고 나자 경계심 가득하던 죄수들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를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희가 뭘 했다고.”
“많이 드세요.”
청명은 마지막 음식까지 따뜻하게 데운 후 천천히 내려놓았다.
“끄응……. 이것도 생각보다 힘드네.”
북해에 온 후로 자꾸 힘쓸 일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던 그 찰나였다.
“응?”
모여 있던 죄수들 중 두셋 정도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을 향해 다가왔다.
“왜요?”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보자 그들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공!”
“…….”
그 낮디낮은 자세에 청명은 움찔했다.
“……일어나세요. 밥 줬다고 절 하는 거면 세상 사람들 허리가 남아나겠어요? 얻어 처먹을 거 다 얻어 처먹고도 고개 한 번 안 숙이는 거지도 있는 판에.”
저 멀리 중원에 있는 홍대광의 귀가 가려울 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청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혹여 말씀을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두터운 털옷 차림의 노인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청명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쭉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화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특히나 그게 피차간에 도움이 되는 대화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