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2)
‘으…….’
내력이 빠져나간 육체에 음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진짜 장난 아니네, 여기.’
왜 더 추운 북쪽이 아니라 여기에서 빙정이 나는지 알 것 같았다. 한기와 음기는 비슷하지만 성질이 다르다. 이보다 더 추운 곳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음기가 강한 곳은 흔치 않을 것이다.
청명이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그의 내력은 흡사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극대화한 감각이 계곡의 아래, 또 아래로 향했다.
‘섬세하게.’
중요한 건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음기 가득한 계곡에서 빙정을 찾는 것은, 새하얀 백사장에서 다른 모래보다 조금 더 하얀 모래 한 톨을 찾아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작정 훑어 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반드시 있다.’
하지만 청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리 탐색하고 또 탐색을 해도, 빙정의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만한 범위를 살폈음에도 빙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정말로 씨가 말라 더는 이곳에 빙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못 찾는다고?’
청명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 떠나서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끄응. 이렇게까지는 하기 싫었는데.’
청명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음기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음기와 한기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 새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헐…….”
“사숙, 쟤 왜 저럽니까? 뭔 일 나는 거 아니에요?”
“……이,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걱정 어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스으으읏.
음기에 자신을 동화시킨 청명은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뜨거운 곳에 있으면 더 차가운 것과 덜 차가운 것을 구분할 수 없다. 스스로 차가운 곳에 있어야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곳이다.
섬세하게 벼려진 기운이 칼날처럼 주변을 뒤졌다.
‘반드시 있다!’
이만한 음기가 있는 곳에 빙정이 없을 리가 없다. 빙정이 모두 사라졌다면 이곳의 음기도 그 씨가 말랐단 뜻일 테니까.
그러니 반드시 있다!
그 순간.
움찔.
기운을 내뻗은 청명의 몸이 작게 경련했다.
마치 심해를 유영하는 듯 차갑고 음울한 음기 속.
한 줄기의 청아함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하지만…….
“여기!”
청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옆으로 후다닥 달려가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쿵!
“사숙! 여기야!”
“찾았어?”
“그래! 여기 있다! 여길 파면 돼!”
백천이 준비해 둔 곡괭이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좋아! 얼마나 파면 되냐?”
“한 삼십 장(90m)만 파면 될 것 같아.”
“그래, 삼……. 뭐, 이 새끼야?”
삼십 장?
산도 깔 수 있다고 했더니, 진짜 산을 깔 판이네?
“……더 위쪽에 있는 건 없냐?”
“찾아봐야지.”
“……그럼 일단 이건 보류하고.”
청명이 빙그레 웃는다.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까.”
“…….”
백천이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보는 순간, 옆에 있던 윤종이 백천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여길 까면 된다는 거지?”
“응.”
“좋아! 여긴 내가 깔 테니, 너는 빨리 다른 빙정 찾아봐! 열 개! 열 개다!”
윤종이 눈을 희번덕대며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앙!
딱딱하게 얼어붙은 대지는 내력을 불어넣은 곡괭이로도 쉽사리 패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되면 열 번 후려치면 된다.
카앙! 카앙!
곡괭이에 얻어맞은 땅이 마치 쇳조각처럼 부러져 튀기 시작했다.
“사형! 저도 돕겠습니다!”
조걸도 쇠 곡괭이를 단단하게 틀어쥐고 윤종과 함께 땅을 파기 시작했다.
카아앙! 카아아앙!
순식간에 허리까지 파 들어간 두 사람은 흡사 광인처럼 눈을 희번덕대며 곡괭이를 휘둘렀다.
조걸은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으아아아아! 빌어먹을!”
“허리를 펴지 말고 작업하란 말이야! 곡괭이질 백 번 하고 하늘 한 번 봐!”
“사, 사형, 이거 생각보다 힘든…….”
“닥치고 까!”
조걸이 움찔하여 윤종을 바라보았다.
‘눈이 갔네.’
이 양반은 한 번씩 이상한 쪽으로 맛이 간단 말이야.
그때였다.
“아미타불. 윤종 시주, 조걸 시주. 이만 멈추시오.”
“……응?”
혜연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스님?”
“잠시 나와 보시오.”
“…….”
두 사람은 군말 없이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청명이면 몰라도 혜연이 쓸데없는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혜연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는 열흘이 걸려도 빙정에 닿는 곳까지 팔 수가 없소.”
“그럼…….”
“아미타불.”
눈을 감고 불호를 왼 혜연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불자답지 않은 새파란 안광이 빛났다.
“땅이 쇠처럼 단단하다면!”
우우우우우우웅!
이윽고 그의 몸에서 황금빛 서광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쇠도 부숴 버리면 될 일! 오오오오오오오!”
혜연의 우수가 눈부신 금광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이전에 본 적 있던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아, 아라한신권?!”
콰아아아아아아앙!
자타공인 천하제일문으로 평가받는 소림이 세상에 자랑하는 무학. 소림칠십이절예 중 하나인 아라한신권이 혹한의 대지에 작렬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떨리고, 바닥이 산산조각이 나며 튀어 올랐다.
그 위력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냐마는…….
“……저걸 땅 파는 데 쓰네.”
“소림의 방장이 보셨다면 뒷목 잡으셨을 것 같은데.”
“하지만 효과는 최고네요.”
베고 자르는 일이야 혜연이 화산의 제자들을 따를 수 없겠지만, 부수고 깨는 쪽으로는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지막지한 내력과 어마어마한 권력이 쇠처럼 단단해진 대지를 두부처럼 으깨고 부쉈다.
“파내십시오!”
“가자!”
백천과 다른 제자들이 저마다 손에 삽을 들고 구덩이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조각조각 으스러진 흙과 돌덩이들을 순식간에 파낸 후 재빨리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오오오!”
콰아아아아아앙!
혜연이 다시 아라한신권을 날렸다. 동시에 계곡이 뒤흔들렸다.
“……저게 뭐 하는 거지?”
“세, 세상에?”
기겁한 인부들이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들 역시 무인이었지만, 저런 식으로 땅을 파는 것은 살다 살다 처음 보았다.
“대, 대체 저 스님은 뭐 하는 분이시기에, 번쩍하고 나면 땅이 저리 으스러지는가? 설마 소림인가?”
“내력이 얼마나 강하면…….”
놀란 것은 곁에서 지켜보던 송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원의 후기지수들은 다 저런 실력인가?’
중원의 무학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북해 역시 절대 그에 뒤지지 않는다 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단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스님의 실력이 저 정도라면, 저기서 뒷짐을 지고 있는 화산신룡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인가?
“아미타불!”
불호를 욀 때마다 혜연의 눈이 불을 뿜었다.
“오오오오오!”
닥치는 대로 권을 휘두르며 바닥을 부수는 그의 모습은 실로 경이로웠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 모습에서 전혀 다른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스님, 신나 보이지 않습니까?”
“……쌓인 게 많으셨겠지.”
“혜연 스님이 무슨 생각으로 주먹질을 하는지 저는 알 것 같은데요.”
과거 비무대회에서 보았던 혜연의 권은 침착함 그 자체였다. 무거움과 중도를 지킨 소림의 권. 말 그대로 불자의 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콰아아아아아앙!
“폭급하네.”
“……성격 다 버렸네요.”
그들은 허공에 신나게 튀는 돌덩이들과 흙을 아련히 바라보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훔쳤다. 동병상련이라고, 지금 혜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들밖에 더 있겠는가?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혜연을 도우며 땅을 파 내려갔다.
모두가 그 광경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 이 상황에 단순히 놀랄 수만은 없는 이들도 존재했다.
“자, 장로님.”
죄수들을 통솔하던 빙궁의 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방표를 불렀다. 방표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보다가 움찔하여 고개를 돌렸다.
빙궁의 무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크흠. 놀랍긴 하구나.”
무학의 궤가 다르다고는 하나, 혜연의 내력과 드높은 권의 경지는 빙궁의 장로인 그조차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방표는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파 내려간다고 빙정을 캘 수 있으면 누가 이 고생을 하겠느냐? 저건 의미 없는 힘 낭비일 뿐이다. 물론 저 짓을 여러 번 반복한다면 빙정을 발견할 확률은 조금쯤 높아지겠지만, 사람인 이상 저걸 계속할 수는 없다.”
“아아.”
“그리고 저런 식으로 땅을 파면 빙정이 있다고 해도 가루가 되어 버릴 게 분명하다.”
“그렇습니다.”
“내버려 둬라. 곧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니.”
짐짓 태연히 말을 끝낸 방표는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찾아낼 리가 없다.’
북해에서 평생을 산 그도 할 수 없었던 걸, 이제 막 중원에서 온 놈들이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해낼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만! 거기까지!”
청명이 버럭 소리치자 흙투성이가 된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아직 더 파야 할 것 같은데.”
“빙정 다 날려 먹을 일 있어?”
청명은 깊게 파인 구덩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서선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가만히 살폈다.
“흐으음.”
냄새가 난다. 냄새가…….
챙!
청명의 허리춤에서 암향매화검이 뽑혀 나왔다. 더없이 날카로운 보검이 휘둘러지자, 쇳덩이처럼 단단한 땅이 찰흙 갈라지듯 갈라졌다.
서걱! 서걱! 서걱!
땅을 네모반듯하게 자른 그는 자른 암석을 통째로 뜯어냈다.
“끄응차!”
화산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쪼르르 다가왔다.
“거기냐? 빙정이야?”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여기 원래 춥습니다.”
“아, 그렇지.”
청명은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뜯은 암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아주 신중히, 천천히 부수었다.
후두두둑.
단단한 암석이 바짝 마른 흙더미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조심스런 손길로 암석들을 떼어내길 수차례.
마침내.
“오!”
“뭐가 있다!”
암석 안에 숨어 있던 빙정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흰 보석이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빙정이다!”
“찾았다!”
“세상에, 진짜 있네?”
화산의 제자들이 놀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진짜 이리 단숨에 찾아 버릴 줄이야.
청명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빙정을 소매 안에 쑤셔 넣었다.
“엣헴!”
“이야! 청명아!”
“진짜 대단하다. 이걸 어떻게 찾았냐?”
“이건 정말 한 번씩 이해 못 할 짓을 한다니까?”
쏟아지는 찬사에 청명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걸 누르려다 보니 아예 파들파들 경련이 일 정도였다.
“크흐흠. 뭐 대단한 일 했다고. 이 정도야 뭐.”
“일단 올라가자.”
화산의 제자들은 밝은 얼굴로 구덩이 벽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네놈도 한 번씩은 쓸모가 있구나.”
“……동룡이 많이 컸네?”
“원래 키는 내가 더 컸지. 그럼 이제 다음 빙정을 찾아야지! 어디냐? 어딜 파면 되냐?”
“아……. 그게 좀 문제가 있는데.”
“걱정하지 마라! 뭐든 다 팔 수 있다!”
“그래?”
청명이 싱긋 웃으며 저 옆쪽을 가리켰다.
“저기.”
“응? 어디?”
“저기.”
“…….”
백천의 시선이 청명의 손끝을 타고 움직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 절벽에 가 닿았다.
“……저기?”
“응. 한 오십 장만 파면 될 것 같아.”
“…….”
“참고로 저긴 이렇게 못 파. 후려치다 절벽 무너지면 신선이 와도 못 살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뭘 묻고 그래?”
청명이 싱긋 웃는다.
“조심스레 한 삽 한 삽 파 들어가야지.”
“…….”
“시작해. 오늘 내로 끝낼 테니까.”
청명의 산뜻한 말에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쉽다 싶었다.’
그럼 그렇지.
……썩을.
“시간 끌지 말고 시작하십시다!”
삽을 들고 절벽으로 돌진하는 윤종을 보며 백천의 입에선 절로 한숨을 푹 터져 나왔다.
“앓느니 죽어야지.”
터덜터덜 걸어가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는 빙궁의 장로 방표는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그런 그의 귓가로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세요?”
흠칫 놀란 그가 돌아보니 청명이 씨익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먹일 고기랑 술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
어디 나한테 내기를 걸어? 뒈지려고.
낄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