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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86화 (484/1,567)

486화.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1)

빙궁의 가장 높은 곳에 난 창을 통해 설천상이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외벽으로 둘러싸인 빙궁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부를 만했다. 어떤 외적도 이곳을 쉬이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설천상이 조금 더 주목하는 것은 그 강건함이 아니라 철저한 폐쇄성이었다.

“흐음.”

저 외벽 밖은 몰라도 외벽 안의 북해인들은 빙궁을 칭송하며 살아간다.

죄수들을 노역시켜 얻어 낸 이득은 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진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이들은 그의 지지자가 되어 그가 가진 권력을 강화시킨다.

완벽한 왕국.

그가 바란 완벽한 왕국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설천상의 입술 새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님.”

이내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물러 터진 당신은 이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이는 따로 있다.

형은 그걸 알지 못했다.

설천상은 이곳에 빙궁을 중심으로 한 천년의 왕국을 건설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 가만히 아래를 굽어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설천상이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순식간에 일그러뜨렸다.

“……건방짐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방 안에 드리워진 짙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칠흑과도 같은 형체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태어나는 것처럼.

설천상은 씹어뱉듯 말했다.

“이곳은 빙궁이다. 감히 빙궁의 궁주실을 함부로 침범하다니, 죽고 싶은 건가?”

“죽음이라…….”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는 가만히 설천상을 바라보다 말했다.

“협박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해 두지. 교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

설천상의 눈썹이 노기로 꿈틀했다.

저 말이 지독히 거슬리는 이유는, 단순히 허세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광신으로 영혼을 휘감은 이들은, 죽음 따위는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저 작자들은 그가 아는 중 가장 심각한 광신도들이었다.

“보고가 늦더군, 빙궁주.”

“외인들이 와 있다.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

사내.

교의 집법사자라 불리는 이의 눈에서 검붉은 혈광이 흘러나왔다.

“주교께서 빙정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음에 분노하셨다.”

주교라는 말에 설천상이 살짝 움찔했다.

‘주교…….’

저들을 이끄는 주교를 떠올리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다른 마교도들도 찝찝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주교라는 자는 다른 이들과는 그 격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말했지만…….”

설천상이 한숨을 내쉰다.

“빙정이라는 건 마음을 먹는다고 캐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산출량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지.”

“그래서?”

“…….”

그가 노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집법사자는 그 눈빛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었다.

“착각하지 마라, 빙궁주. 그건 너희의 사정일 뿐이다. 주교께서 빙정을 원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빌어먹을.’

설천상은 치미는 분노를 참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마교를 끌어들이는 일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전대 궁주의 견제를 받으며 한직을 떠도는 신세였을 것이다.

정상을 노릴 수도 없는 삶을 어찌 감내하란 말인가?

본디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마교를 끌어들여 잃는 게 있으리란 건 알았지만, 위만 바라봐 왔던 그에겐 그로 인해 잃을 것보단 얻을 게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감수해야 할 대가가 너무 뼈아프게 다가왔다.

“잊지 마라, 빙궁주.”

집법사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광기로 번들거렸다.

“우리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한낱 불신자에 불과한 너를 지원한 이유는 네게 받을 것이 있어서였다.”

집법사자가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붉은 혀가 뱀의 그것처럼 요사스러웠다.

“제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좋겠군.”

가만히 빙궁주를 바라보던 집법사자는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잊지 마라. 주교께서 노하셨다. 그분의 진노를 받는다면 너는 죽음조차 달콤하게 느끼는 처지가 될 것이다.”

“…….”

“네 목숨으로도 채 다 치르지 못할 후환을 겪고 싶지 않다면, 좀 더 발버둥 치도록 해라.”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사내의 종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말없이 그곳을 바라보던 설천상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쾅!

대리석으로 만든 탁자가 산산조각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빌어먹을 놈들이…….”

거칠어진 숨이 쏟아졌다.

마교.

한때는 이 북해빙궁조차도 멸망시키려 했던 자들.

독을 마시는 심정으로 저들을 받아들였다. 중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마신 독은 생각 이상으로 지독했고, 이제는 그의 몸을 서서히, 착실하게 부숴 가고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고 너희 뜻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마라.”

설천상의 눈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 * *

빙정광산을 책임지고 있는 빙궁의 장로 방표(房慓)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앞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허탈한 웃음을 지은 그는 조금 전 들은 말을 새삼 확인했다.

“빙정을 얼마나 캐면 여기 있는 이들을 쉬게 해 줄 수 있는지를 물은 거요?”

“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말하는 중원의 도사 놈을 한참 바라보던 방표는 송원을 바라보았다.

송원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린놈들이 방자하기 짝이 없군.’

빙정이라는 게 얼마나 캐기 어려운 물건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굳이 말로 할 것도 없다. 빙정을 캐다 죽어 나간 이들이 묻힌 곳만 보여 줘도 금세 새파랗게 질려 버릴 테니까.

하지만 방표는 굳이 이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궁주께서 이들을 이곳에 최대한 오래 묶어 두라 하셨지.’

그렇잖아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재미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열이면 되네.”

“열 개요? 겨우?”

청명의 말에 방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중원의 젊은 도장.”

“네.”

“올 한 해 동안 이곳에서 캐낸 빙정의 수가 몇인지는 알고 있는가?”

“저야 당연히 모르죠.”

“…….”

그야말로 당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방표의 눈썹이 꿈틀했다.

“봄부터 겨울까지 캐낸 빙정의 수가 겨우 스물이네. 보름에 하나도 채 나지 않는 것이 빙정이라는 의미지.”

“아, 그래요?”

방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빙정 열을 캐낸다면, 자네가 원하는 만큼 이들을 쉬게 해 주겠네. 쉬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음식과 술까지 가져다 바치지.”

말을 하던 그의 눈이 일순 스산하게 빛났다.

“대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나와 내기를 하겠다면 빙정을 다섯 이상 캘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겠다는 조건을 걸어 줘야겠네.”

“흠…….”

“어떤가?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는가?”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이쯤에서 꼬리를 말고 물러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이는 그 어지간한 이가 아니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용기씩이나.”

“…….”

돌아온 대답에, 방표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나쁜 건가?’

이만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 못 한 건가?

“……하겠다는 건가?”

“네.”

“정말로?”

“아, 거 잔소리 많으시네.”

슬슬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방표의 얼굴을 보던 윤종이 뒤에서 백천에게 속삭였다.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저 장로 분을?”

“……청명이요.”

“허허. 참으로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윤종이가 농담이 많이 늘었어.”

“아미타불. 윤종 시주께서 이런 농을 하실 줄이야.”

“…….”

하기야.

말릴 수 있으면 청명이 아니다. 청명의 탈을 뒤집어쓴 다른 무언가겠지.

백천은 슬쩍 청명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이 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믿어야지. 마음이라도 편하잖아.”

“…….”

윤종은 생각했다. 백천이 요즘 들어 참 대책이 없어졌다고.

“그럼 딱 열 개만 캐오면 되는 거죠?”

“그렇다네.”

청명이 씨익 웃었다.

“잊지 마세요. 궁주님이 약속하셨어요. 우리가 캔 빙정은 우리가 전부 반값에 사 가도 된다고.”

“궁주님께서 그리 말하셨다면 당연히 지켜야지.”

방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멀리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노역자들은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쩌려고.”

“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노역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죄수들로서는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오는 이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빙정을 캐내면 그들에게도 휴식이 주어진다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게 됐다면 누구도 이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북해의 다른 이들조차도 우리를 없는 사람으로 치는데, 저 중원인들이 대체 왜…….”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속 잊지 마세요.”

“그쪽이야말로 약속을 잊지 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한 청명은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터덜터덜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청명아.”

“응?”

“뭘 어쩔 셈이냐?”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쩌긴 어째? 캐면 되지.”

그 대책 없는 말에 백천이 무어라 한소리 하려는데,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파면 되는 것 아닙니까.”

모두의 시선이 말을 꺼낸 윤종에게로 쏠렸다.

“열흘을 파도 하나가 나오기 힘들다면, 백 일치를 파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좀 우습지만, 파고 까고, 들이받는 건 화산의 특기기도 하고.”

모두가 말을 잃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거 또 시작이네, 저거?

죄수들을 돕는다는 말에 평소와 달리 또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백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해는 가는군.’

일단…… 악해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왜 이곳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한 만큼, 윤종의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들은 노역을 하는 와중에도 이쪽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백천은 결국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하다 보면 되겠지.”

혜연 역시 반장을 하며 진중한 눈을 빛냈다.

“아미타불. 이왕 이리 된 것, 제가 제대로 힘을 한번 써 보겠습니다.”

“저도 도울게요!”

당소소가 의욕 가득 찬 얼굴로 주먹을 꽉 쥐자, 조걸도 심드렁하게 말을 보탰다.

“뭐, 까짓 거, 수레 끌고 북해로 오는 것보다 힘들겠습니까? 까라면 까면 그만이죠.”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의 의욕을 고취시키던 그때, 청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뭐가 이렇게들 무식해?”

“…….”

응?

무식?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보자 청명이 혀를 차 댔다.

“뭔 일이 있으면 머리를 써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걸 무작정 들이받고 깐다고 해결이 되나! 쯧쯧쯧.”

그러자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네가?”

“너한테만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이 새끼야!”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원성이 빗발쳤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쩔 생각?”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유이설이 물었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있는지 찾아서 거기만 파면 되지.”

“음기 너무 많아. 찾기 어려워.”

“보통은 그렇겠지.”

“……그럼?”

청명이 히죽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보통이 아니라는 말씀.”

“…….”

재수 없다.

이마에 순간 핏대가 솟은 유이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찾을 거야?”

“흠.”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고민하던 청명은 턱짓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찾으면 파는 거야 문제없겠지?”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청명아.”

“응?”

“우리는 이제 산도 깔 수 있다.”

“…….”

그거 정말 믿음직스럽네.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댄 채 눈을 감았다.

뭐?

음기가 가득해서 빙정이 어디 있는지 탐색할 수 없다고?

‘그건 너희들 생각이고.’

빌어먹을 놈의 내력.

아무짝에도 써먹을 데가 없더니, 이럴 때는 또 쓸모가 있다니까.

그의 내력은 천하에서 가장 맑은 기운만으로 모아 낸 정화다. 운기를 하더라도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은 너른 호수에서 한 수저 분량도 채 되지 않는다.

‘빙정도 음기의 정화가 극한으로 모인거란 말이지.’

서로 닮은 이들은 서로에게 끌리는 법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찾아낼 수 있다.

청명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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