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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85화 (483/1,567)

485화. 아무 일도 없다. (5)

썰매는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를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개가 끄는 썰매라 큰 기대 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죽죽 치고 나가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사고. 얘들 정말 잘 달려요.”

“그러네.”

매사에 무감한 유이설조차도 신기한 눈으로 달리는 개들을 내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이도 있었다.

“으으으으. 죽겠네!”

“…….”

“아니! 이렇게 바람이 불면 천막이라도 좀 칠 것이지! 뭔 통뼈라고 천막도 없는 썰매를 타고 다녀요?”

“…….”

송원의 얼굴이 밀려드는 짜증으로 씰룩거렸다.

대체 무인이라는 작자가 뭐 이리 엄살이 심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정말로 한시도 쉬지 않고 덜덜 떨어 대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그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이로군.’

이상한 것은, 이놈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의연하게 썰매를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놈만 특별할 리도 없을 텐데.

“거의 도착했으니 조금만 참으시오.”

“그 말만 몇 번째인 줄 알아요?”

청명의 짜증 섞인 대꾸가 돌아오자 결국 참다못한 송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다경도 지나기 전에 다섯 번이나 물어 대니 나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잖소이까! 좀 참으시오!”

“당장 얼어 뒈지겠는데!”

“끄으으!”

송원이 화를 억누르며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러다가는 광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화병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게다가 청명인지 뭔지 하는 놈이 성질을 부려 댈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같이 하악질을 해 대는 담비 때문에 더 속이 뒤집어졌다.

송원은 이를 악물고 개들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뭐가 이렇게 갈수록 더 추워져.”

“빙정이 나는 곳은 북해에서도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오. 당연히 추울 수밖에.”

“북쪽으로 갈수록 추운 거 아니에요? 지금 가는 쪽이 북쪽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다르오.”

송원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보면 알게 될 거요.”

그때였다.

“청명아, 저기!”

옆쪽에서 썰매를 타고 달리던 윤종이 크게 소리치며 앞을 가리켰다.

“응?”

청명이 고개를 쭉 내밀어 앞쪽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쩍 벌렸다.

“와, 저게 뭐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땅에 뚫린 거대한 구멍이었다.

아니, 구멍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대기에 저 공동(空洞)은 너무도 거대했다. 커다란 전각을 몇 채는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 크나큰 계곡에 가까웠다.

마치 지옥으로 가는 입구처럼 그 입을 쩌억 벌린 공동의 모습에, 화산의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일순 말을 잃었다.

“저기가 바로 빙정을 캐내는 광산이오.”

송원의 입가가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광산이라길래 산이라도 파는 줄 알았지.”

청명의 말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설마 빙정을 캐는 광산이라는 게 이런 형태일 줄이야.

휘이이이이잉!

드넓은 동공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저 아래서 빙정을 캐는 건가요?”

“그렇소.”

“위험해 보이는데.”

“무척이나 위험하고 고된 일이지. 평범한 이들은 할 수 없을 만큼.”

송원이 계곡 아래를 향해 턱짓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온도는 낮아지고 음기는 강해지지. 빙정은 그런 극한의 환경 속에서만 캘 수 있소.”

화산의 제자들이 얼음으로 뒤덮인 주변을 연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꺼운 털옷으로 무장한 이들이 주위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청명이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 보자.”

“음.”

나머지 화산 제자들과 혜연 역시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빙정이 왜 그리 비싼지 알겠네.”

“그러게요.”

이런 환경에서 캐내는 물건이라면 빙정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송원이 그들을 이끌고 계곡 바로 앞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다. 이윽고 까마득한 계곡 앞에 서자 더없이 깊은 구덩이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어둠을 토했다.

“아래로 내려갈 것이오. 준비는 되었소?”

“네.”

“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가야 하니 조심하시오. 자칫 실수하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뼈도 추리지 못할 테니.”

내심 겁을 먹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농담이 아니오.”

“네, 알아요.”

“…….”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송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

이 절벽을 처음 보는 이들은 보통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들은 신기해하는 기색은 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쭉 내밀고 계곡 아래를 보며 중얼거렸다.

“화산 절벽의 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에이. 시커머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반까진 어림도 없습니다.”

“그럴까?”

“…….”

그들을 바라보는 송원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이들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절벽을 타 오르며 수련해 온 이들이라는 것을.

이 정도 절벽 따위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으음. 여하튼 조심하시오.”

송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절벽에 설치된 동아줄을 잡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줄을 잡고 발은 절벽에 단단히 붙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움직임이 퍽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 송원은 불현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따라오지 않고 절벽 위에서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시오, 따라 내려오지 않고? 줄은 여러 개 준비되어 있으니, 다른 줄을 잡고 내려오면 되오.”

“……그냥 내려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소! 아래만 보지 않으면 문제없으니, 어서 내려오시오!”

그러자 백천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가?”

“그러지 뭐.”

고개를 끄덕인 백천은 앞쪽에 있는 동아줄을 잡았다.

“다들 따라와.”

“예!”

그러더니 절벽을 향해, 말 그대로 훌쩍 몸을 날렸다.

“뭐, 뭣!”

송원은 너무 기겁하여 순간 줄을 놓칠 뻔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백천뿐 아니라 다른 화산의 제자들과 스님까지, 하나같이 한 손에 동아줄을 대충 휘어잡은 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타타타타타탓!

그들은 마치 절벽을 평지처럼 내달리며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

송원은 멍한 눈으로 어느새 저 멀리 달려가는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바로 옆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빨리 좀 내려가요. 굼벵이를 삶아 드셨나?”

“…….”

“쯧.”

심지어 이 말을 한 청명은 동아줄조차 잡지 않고 절벽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를 스쳐 가는 와중에 말을 거는 여유까지 보인 것이다.

저 아래로 사라지는 청명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송원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못 해 먹겠네, 진짜.’

잠시 후.

“끄응차.”

“……거, 오래도 걸리네.”

“수련 좀 열심히 하셔야겠어.”

바닥에 내려선 송원은 좌우에서 들려오는 말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마디 쏘아붙이기라도 했겠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여기가 빙정을 캐는 곳이오.”

“말 돌리네.”

“그만해라. 무안하시겠다.”

마지막에 말한 놈이 제일 밉다.

저 허여멀건…….

그때 조걸이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며 부르르 떨었다.

“사숙. 그런데 여기 진짜 장난이 아닙니다. 아까부터 몸이 으슬으슬한 게.”

“……그렇구나.”

단순히 추운 것이 아니었다. 몸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체온을 뺏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알 수 없는 음울한 기운이 뼛속까지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었다.

‘음기가 강하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사람이 이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순식간에 몸이 상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빙정을…….”

고개를 드니 마치 우물 안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이 아주 작아 보였다. 길게 갈라진 계곡 좌우로 크고 작은 수백 개의 동혈이 뻥뻥 뚫려 있었다.

‘사람이 파낸 광산이로군.’

이런 환경에서 굴을 뚫어 가며 빙정을 찾는다니…….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가혹하다.

“다들 고생이 많으시구나.”

짐승 가죽을 두른 인부들 사이로 빙궁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관리인처럼 오갔다. 저 인부들과 무인들이 합심하여 빙정을 캐는 모양이었다.

“엇! 저기!”

연신 두리번거리던 조걸은 뭔가 발견한 듯 황급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굴 쪽으로 향하던 인부 하나가 지쳤는지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관리를 하던 빙궁의 무인 하나가 다급하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도와야…….”

걱정스런 얼굴로 말하던 백천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촤아아악!

빙궁의 무인이 갑자기 소매 안에서 꺼낸 채찍을 펼쳐 들더니 쓰러진 인부를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 무슨 짓을!”

백천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인부가 쓰러져서 꿈틀거리는데도 빙궁의 무인은 자비라고는 없이 채찍으로 마구 내리쳐 대었다.

“감히 게으름을 부려!”

촤악! 촤악!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인부가 입은 옷이 쩌억쩌억 갈라지며 붉은 핏줄기로 젖어들었다.

“저……!”

백천이 달려들려 하자 송원이 슬쩍 손을 내밀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자신을 가로막은 손을 흘끗 본 백천이 사나운 얼굴로 송원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저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저 사람이 딱히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건 그쪽이 판단할 일이 아니오.”

답을 듣고도 백천이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자 송원이 가볍게 혀를 찼다.

“내 말을 이해 못 한 모양이구려. 말하지 않았소이까. 평범한 이들은 이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무슨 뜻입니까?”

그는 턱짓으로 인부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평범한 인부가 아니오. 빙궁에 죄를 짓고 노역으로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이들이지.”

백천은 인부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제대로 다시 보니 모두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반역.”

지체 없이 나온 그 짧은 대답에, 백천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여러 죄를 지은 이들이오.”

화산 제자들과 혜연의 시선이 인부들……. 아니, 죄수들에게로 향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맥없이 풀린 눈빛, 두터운 옷에 감춰진 앙상한 몸뚱이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다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용케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백천이 갈피를 못 잡는 그때,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무인이네요?”

그러자 그를 바라보는 송원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공은 금제 당했지만 말이죠.”

“……정확하오.”

“흐응.”

청명은 흥미롭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역이라.’

반역을 저지른 건 오히려 지금의 궁주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서 노역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전대 궁주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의미다.

반란이 벌어지던 날 패하고 사로잡혔거나, 그 이후 반기를 들다가 제압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빙궁이 완전히 장악되어 있다 했더니, 반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여기로 밀어 넣은 모양이로군.’

잡힌 이들은 이곳에 있을 것이고, 한이명처럼 달아난 이들은 내내 숨어 살며 북해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윤종은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죄인들이라지만, 너무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닙니까?”

“모르는 소리.”

하지만 송원은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이들은 본디 그 목숨으로 죄를 갚았어야 할 이들이오. 하지만 궁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이들에게 노역을 통해 죄를 갚을 기회를 부여하신 거요.”

“…….”

“그러니 동정할 이유 따윈 없소.”

윤종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옷깃을 잡아당기는 조걸의 눈을 보고 결국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확실히 타 문파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가혹해 보이오?”

“솔직히 그렇습니다.”

윤종이 굳은 얼굴로 답하자 송원이 피식 웃었다.

“빙정은 극한의 음기를 이겨 내고 캐내야 하는 물건이오. 이리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렵지.”

“하나…….”

윤종이 반박하려 들자 송원이 빙그레 웃었다.

“그대들도 빙정을 얻으러 온 게 아니오?”

“…….”

“재미있구려. 빙정이 필요해 이 먼 북해까지 온 이들이 빙정을 캐는 이들을 동정하다니. 당신들처럼 빙정을 원하는 이들이 없다면 이들이 풀려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노골적으로 비꼬는 그 말에 조걸은 얼굴을 굳혔다.

“그건…….”

하지만 제대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송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저들이 그리 가여워 보인다면 차라리 열심히 일을 도와 보시오. 빙정의 산출이 줄어든 탓에 저들이 노역 시간이 더욱 늘어났으니 말이오. 그대들이 빙정을 하나라도 캐낸다면 저들이 조금쯤 편해질지도 모르지.”

그러자 가만 듣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얼마나 캐면 되는데요?”

“……뭐라고 하셨소?”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죠? 가서 책임자 불러와 봐요. 얼마나 캐면 이 사람들을 쉬게 해 줄 건지 들어야겠으니까.”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주 빙정의 씨를 말려 드릴게.”

실로 자신만만한 그 목소리에, 송원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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