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484화 (482/1,567)

484화. 아무 일도 없다. (4)

“빙정을 직접 캐고 싶다 하였는가?”

청명을 바라보는 설천상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아침부터 접견을 신청하기에 무엇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청명은 이렇게 대뜸 뜻 모를 이야기를 꺼내었다.

“네.”

청명은 한없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천상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이보게. 빙정을 어찌 캐는 줄은 아는가?”

“모르니까 가서 해 보려는 거죠.”

“…….”

설천상은 잠깐 말을 잃고 청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 중원에서 온 도사라는 놈은,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사람의 신경을 긁어 대는 재주가 있었다. 따져 보면 그리 기분 나쁠 말이 아니거늘, 왜 이리 울컥하게 되는 것인가?

‘번거로운 놈이로군.’

그의 입장에서는 이놈들이 조용히 지내다가 중원으로 돌아가서 빙궁에 별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해 주는 게 최상이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닐수록 골치 아파진다.

하지만 반면에…….

설천상은 묘한 표정으로 청명을 보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빙정이란 말 그대로 극음의 기운이 모인 정(精)일세. 겉으로는 보석 같은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보석도 아니고 광물도 아닐세.”

“네, 알고 있어요. 빙정은 이미 본 적이 있거든요.”

혼원단을 만들 때 빙정을 이용하며 봤었다.

하지만 설천상은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잘 모르는 것 같군.”

“네?”

“여기서 중요한 건, 빙정은 극음의 기운이 모여 만들어지는 물건이라는 걸세. 빙정이 나는 곳은 북해에서도 가장 가혹한 한기가 몰아치는 곳이라는 의미일세.”

그는 살짝 겁을 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더구나 그 빙정을 캐내기 위해 이겨 내야 할 것은 추위뿐만이 아니네.”

“…….”

“자네도 무인이니 적당히 기운을 뻗으면 극음의 기운 정도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게 그리 쉽다면 왜 빙궁이 빙정을 캐내는 데 그 고생을 하겠는가?”

설천상은 화산의 제자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혹한의 대지는 그 자체로 극음을 띠는 곳일세. 극음의 대지에서 극음의 정을 기운으로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지. 그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끝도 없이 파고 또 파야 하네. 요행을 바라야 하는 물건, 그게 바로 빙정일세.”

화산의 제자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빙정을 캐낸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자네들이 직접 빙정을 캐겠다는 건가? 이곳에서 편히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내어 주겠다 했는데도?”

하지만 청명은 그의 위협에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너무 태연한 대답에, 설천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기다리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빙정의 산출이 줄었다는 건,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거잖아요. 그 말인즉, 빙정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의미고요. 그러니 저희가 가서 도우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스레를 떠는 청명의 입가엔 내내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만히 대접만 받고 기다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요.”

가만 듣던 설천상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살짝 가라앉은 시선으로 눈앞의 화산신룡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흡사 저의를 탐색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그의 입이 열렸다.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선선히 답한 설천상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을 대접하는 입장에서는 만류하고 싶지만, 객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막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네. 저희도 그쪽이 속 편해요.”

시원시원하게 답하는 청명을 보며 설천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되자 백천이 앞으로 나서서 포권 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리라 할 것도 없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하나 객의 입장에서 함부로 부탁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급한 마음에 떼를 쓴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당하고 정중한 인사에 설천상은 새삼스럽게 백천을 다시 보았다.

‘좋은 자세로군.’

화산의 제자들을 딱히 좋게 보지 않는 그의 입장에서도, 백천의 자세는 감탄할 만했다.

자신을 낮추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그건 말투나 공손함과는 다른 문제였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무인의 자세다.

반면에…….

“그런데요.”

물러섰던 청명이 다시 불쑥 고개를 내밀자 설천상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분명 같은 문파일 텐데.’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생활을 했을 텐데, 어찌 이리 천양지차로 차이가 나는가?

더구나 이자가 아니라 저‘놈’이 화산신룡이라고?

설천상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하건 말건, 청명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태연히 늘어놨다.

“그럼 저희가 캔 건 저희가 구입해도 되는 거죠?”

“……빙정 말인가?”

“네. 주기로 하셨으니까요. 어차피 제대로 못 캘 거라면서요. 그럼 저희가 캐낸 만큼은 구입해도 별문제 없잖아요.”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는 시늉을 하며 작게 속삭였다.

“저희가 캔 거니까 반값에 주시면 더 좋고요.”

설천상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하게나.”

“헤헤. 감사합니다.”

청명이 헤실헤실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내 따로 언질을 주어 빙정을 캐는 곳으로 안내해 주도록 하겠네. 출발은 오후가 될 테니 그 전까지 쉬어 두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깊게 포권 하고는 물러났다.

그들이 방에서 모두 빠져나가자 지켜보고 있던 장로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물었다.

“궁주님. 저들을 빙정 광산으로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우려됩니다.”

“내버려 둬라.”

하지만 설천상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광산이 남에게 내보이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지만, 저놈들이 빙궁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느니 차라리 광산에 처박혀 있는 쪽이 낫다.”

“그러다 빙정을 많이 가져가게 되면…….”

장로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 북해도 빙정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꺼낼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빙정이 부족한 이유를 떠올리게 만드니까.

설천상은 그런 장로의 말을 노련하게 받아 냈다.

“애송이 놈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빙정을 캐내겠느냐?”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젊을 때는 객기를 부리기 마련이다. 세상의 쓴맛을 덜 본 놈들 눈에는 뭐든 쉬워 보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현실이라는 건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다.”

그가 살짝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중원에서 승승장구해 온 젊은 후기지수들이니 겁나는 게 없겠지. 하지만 북해의 땅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저놈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천장을 올려다보는 설천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애송이들 중 세상의 쓴맛을 너무 과하게 본 인간이 한 놈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 * *

“……그쪽이?”

“…….”

“거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

묵묵히 선 송원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왜 내가?’

고수가 즐비하다는 북해빙궁에서도 나름 실력을 인정받는 송원이었다. 젊은 나이에 빙궁의 경호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뛰어난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애송이 놈들 안내나 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가 안내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빙궁 내부의 일이지, 이들을 빙정 광산까지 안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체 궁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하지만 명령은 절대적이다. 송원에겐 이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한가하신가 봐요?”

“…….”

이 신경을 긁어 대는 작자만 없었어도 이렇게 속이 쓰리지는 않을 것을.

“출발하겠습니다.”

청명을 단호하게 무시하는 송원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지간히 수양이 깊은 이들에게도 청명의 비꼼을 무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이미 중원의 수많은 이들이 몸으로 증명한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빙궁의 이 젊은 무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현명하다.’

‘과연,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신뢰가 간다.’

화산의 제자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쏟아지자, 송원은 영문을 모르고 흠칫했다.

‘중원의 무인들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래도 교역을 위해 북해에 들른 상인들은 정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빙궁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어딜 가는 거지?”

“광산으로 가는 거 아냐?”

“그럼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지. 왜 뒤쪽으로 간단 말이냐?”

백천의 의문에, 청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개소리 같은데.”

“……근데 이 새끼가?”

“아니. 진짜 개소리 같다고.”

“응?”

이를 악물었던 백천이 뭔 소리냐는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그때, 그의 귀에도 청명이 말한 소리가 들려왔다.

컹컹!

“……응? 진짜 개소리네?”

갑자기 웬 개 짖는 소리가…….

그들의 의문은 금세 밝혀졌다.

컹! 컹컹!

뒤쪽에 있는 공터에는, 사람 두엇은 탈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썰매 여러 대와 개들이 묶여 있었다.

“……웬 개?”

“개썰매입니다. 말이나 소가 다니기 힘든 눈길에서는 개가 끄는 썰매가 가장 빠릅니다.”

“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던 멋진 생김새의 개들을 보며 모두가 감탄했다. 풍성한 털과 날카로운 눈빛이 퍽 인상적이었다.

“와, 멋있다!”

조걸이 신난 얼굴로 개들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커엉!

순간적으로 개가 조걸의 손을 콱 물려 들었다. 그는 기겁하며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그의 얼빠진 모습에 송원이 나직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겉모습은 개처럼 보여도, 늑대의 피가 흐르는 놈들입니다. 거의 늑대라고 봐도 좋겠지요.”

“…….”

“얌전히만 있으면 별일 없을 겁니다.”

“얌전히?”

말을 듣던 청명은 피식 웃었다.

“그래 봤자 개지 뭐.”

“……괜한 객기를…….”

송원이 만류하기도 전에 청명은 으르렁대는 개들을 향해 휘적휘적 다가갔다. 썰매에 묶인 개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청명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보며 송원은 속으로 다시 한번 비웃었다.

물론 무인이니 개에게 물려 심하게 다치지는 않겠지만, 망신은 좀 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가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빼꼼.

청명이 입은 옷의 목 부근이 들썩이고 꿈틀거린다 싶더니, 이내 새하얀 담비 하나가 얼굴을 쏙 내민 것이다.

키이이이이이익!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이까지 드러내었다.

“……허허.”

송원은 황당함에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런데,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깨갱!

캐애애앵!

송원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이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청명을 향해 달려들 것 같았던 개들이 기겁을 하며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 덜덜 떨어 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완전히 얼다 못해 오줌을 지리는 것들까지 있었다.

“아니…… 저게 무슨…….”

늑대의 피가 섞인 개가 담비한테 겁을 먹는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 이놈들이 왜 이래!”

“정신 차려라, 이놈들아!”

개를 끌고 온 썰매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개들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개들은 익숙한 썰매꾼의 손길에도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토독.

그 순간 청명의 옷에서 빠져나온 백아가 바닥에 사뿐 내려섰다. 그리고 개들을 둘러보며 눈을 부라렸다.

개들은 움찔하며 아예 꼬리를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움츠렸다.

“아니, 이놈들이 대체…….”

집채만 한 대호도 때려잡는 영물을 평범한 개들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개가 아니라 완전한 늑대였다 해도 상황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탁!

개들이 우습다는 듯 앞발로 땅을 한차례 친 백아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더니 청명을 당당히 바라보며 몸을 일자로 쭉 세웠다.

“뭐?”

“…….”

하지만 원하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백아는 청명의 다리를 타고 올라 다시 그의 옷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송원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썩 놀랍지도 않은 듯 태연해 보였다.

“안 가요?”

“……가야지요.”

송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썰매를 가리켰다.

“타십시오.”

화산의 제자들이 두셋씩 나뉘어 썰매에 올라탔다. 송원은 가장 선두에 있는 썰매에 올랐다.

“잘 부탁드려요.”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는 청명을 보니 뭔가 속에서 자꾸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

그는 슬쩍 이를 갈며 썰매를 출발시켰다.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