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아무 일도 없다. (3)
“이게 무슨 짓이오!”
“무례한!”
화산의 제자들이 막 송원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청명이 남은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됐어. 진정해.”
“…….”
“뭐 확인할 게 있으시겠지.”
그러더니 히죽 웃으면서 자신의 손을 움켜잡고 있는 송원을 빤히 보았다.
“어때요? 확인 끝났나요?”
송원은 미묘한 시선으로 청명의 얼굴과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뭐든 확실한 게 좋다는 생각에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객들께서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궁주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런 꼼꼼한 사람이 수하로 있어서.”
“과찬이십니다.”
송원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여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약속드린 대로 불러 주시면 제가 빙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백천이 대표로 답하자 송원은 다시 한번 슬쩍 방 안을 둘러보고는 물러났다.
“흐음.”
청명은 송원이 닫고 나간 문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백천과 다른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물었다.
“갑자기 손은 왜 잡은 거야?”
“그러니까.”
“상처를 본다더니.”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건 속임수야.”
“응?”
청명은 자세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만만찮은 양반이네.’
다른 사람이라면 송원의 수에 바로 당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요주의 인물인 것 같았다.
어쨌든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백천은 얼굴을 굳히며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들어라.”
모두가 진지하게 그를 주목하였다.
“어찌되었건 저들이 우리를 의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
“다들 이곳이 외지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몸가짐을 조심하거라.”
“사숙.”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사숙.”
“응?”
그의 어깨에 손이 턱 올라오는 것을 느낀 백천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아니, 뭐…….”
그는 귀를 두어 번 후비고 입으로 훅 불었다.
“내가 어제 좀 이상한 광경을 봤는데 말이야.”
“…….”
“누가 날 보면서 창문을 닫더라고?”
“…….”
“누가.”
거…….
기억력도 좋으시지.
* * *
저벅. 저벅.
복도를 걷는 송원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착각인가?’
복면을 써도 체형을 숨길 수는 없다. 흉수의 체형은 분명 저 청명이란 작자와 무척 유사했다.
하지만…….
‘몸 안에 음기가 없었다.’
빙백신장급의 음한기공을 상대한 이라면 반드시 그 몸 안에 음기가 남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정갈한 기운을 가진 자라고 해도 그 기운을 반나절 만에 해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손을 잡아 확인했을 때, 저 청명이라는 자의 몸 안에는 쥐톨만 한 음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 나이에 궁주님의 공격을 상처 없이 막아 내고, 음기까지 해소해 낸다라…….’
화산신룡이 아니라 화산무신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저 청명이라는 자는 절대 흉수일 수 없었다.
하지만…….
“찜찜하군.”
“예?”
“아니다.”
의아한 얼굴로 보는 수하에게 고개를 저으며 송원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걸리는 거지?’
상대의 몸은 더없이 깨끗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영 불편한 것은 상대의 태도 때문이리라.
‘외지인 빙궁에서 조사를 받는 입장이 된다면 누구라도 최소한의 두려움이나 껄끄러움은 보여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송원이 무얼 할지 미리 알고 대비했다는 듯 말이다.
“……과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송원은 화산의 문도들이 지내는 방을 슬쩍 돌아보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는 앞을 똑바로 보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풉…….”
“…….”
“푸훗…….”
“조걸아.”
“예?”
“웃지 마라. 뒈지기 싫으면.”
“……예.”
조걸은 백천의 머리에 볼록 솟아난 혹을 보며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웃음을 참느라 부풀어 오른 볼이 금세라도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더 웃으면 진짜 맞아 죽을 것이었다.
이 머나먼 설국에 묻히는 건 사양이었다.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꾸나.”
“예. 사숙……. 푸우우웁!”
“…….”
백천이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인생…….’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이리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야야. 하지 마. 사숙 등선한다, 등선.”
“아! 하지 말라고!”
“흐지 믈르그.”
“아악!”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진정한 백천이 한숨을 쉬며 청명에게 물었다.
“해서…… 마교와 그리 친해 보이지 않았다고?”
“응.”
청명의 말에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 한이명이라는 분의 말대로라면 마교를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북해빙궁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서로 경원시한다? 그게 가능한가?”
청명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응?”
“내부의 적을 치기 위해서 외적을 끌어들이는 일이야 역사에서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잖아. 그런데 그렇다고 외적과 친할 필요는 없지.”
“……조건만 맞으면 서로 간의 관계 같은 건 의미가 없다는 건가?”
“그렇지.”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백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부분은 이해했다. 하지만 이리되니 다른 것이 걸렸다.
“조건이 맞다는 건, 마교 역시 이곳에서 얻을 게 있다는 의미잖아.”
“음.”
“나는 마교가 빙궁을 장악하고, 빙궁을 제이의 마교로 만들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마교는 대체 이곳에서 뭘 노리는 걸까?”
백천의 의문에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나야 모르지.”
“…….”
더없이 진지하던 백천의 얼굴이 씰룩 일그러졌다.
“사숙은 바보야? 내가 그걸 알면 여길 뭐 하러 와? 그냥 소림 방장한테 말해 주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시켰겠지.”
“…….”
“한 대 맞더니 머리가 나빠지셨나?”
머리가 나빠진 건 모르겠고, 머리에서 김은 확실히 나는 것 같다.
“……됐다. 너한테 물은 내가 바보지.”
“잘 아네.”
결국 열이 뻗친 백천이 막 발작하려는데 당소소가 재빨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교는 빙궁에서 뭔가를 받으려는 것 아닐까요?”
“음?”
“마교는 원래 중원의 남부를 본거지로 삼았었잖아요. 그런 이들이 이 먼 북해까지 왔다는 건, 반드시 뭔가 목적이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면 굳이 이 척박한 곳까지 올 이유가 없죠. 가까운 곳에 중원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도 많을 텐데.”
백천의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나도 그리 생각한다만.”
그 순간 청명이 손뼉을 짝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응?”
“서류! 서류 챙겼었는데! 백아야!”
청명이 소리치자 담요 속에 웅크리고 있던 백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거! 종이 어쨌어?”
청명이 묻자 백아가 고개를 빠르게 두어 번 끄덕이더니 창문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창문의 걸쇠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열더니 밖으로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과정을 멍하니 보던 백천이 물었다.
“……지금 저거 걸쇠 연 거냐?”
“영물이라잖아요.”
“…….”
대체 뭘 하면 담비가 영물이 되는지도 궁금하고, 영물이 되면 왜 똑똑해지는지도 궁금해진 백천이었다.
‘하여튼 뭐 하나 제대로 정상적인 게 없어.’
타닥.
그때 닫혔던 창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입에 종이 더미를 야무지게 문 백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거 방금 손으로 창문 연 것 같은데.’
……아니. 그러려니 하자, 그러려니.
과연 영물은 영물인지, 백아는 입에 문 종이들을 청명에게 가져다주지 않고 곧장 백천에게 넘겼다.
이건 정말 똑똑하다는 증거였다.
“……이게 뭐냐?”
“궁주 방에 있더라고. 내가 얼른 챙겨 왔지! 히힛!”
정말로 자랑스러워 보이는 사질을 보며 백천은 더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도둑질했다는 걸 저리 자랑스레 말하는 도사라니.’
원시천존이시여.
대체 화산을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대체!
하지만 도둑질은 도둑질이고, 일단 살펴는 봐야 했다.
마음속으로 도호를 한 번 왼 그는 이내 진지한 눈으로 종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촤락! 촤라라라락!
서류가 재빠르게 넘어갔다.
탁!
순식간에 그 모든 걸 다 훑어본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청명아.”
“왜?”
“너 어제 빙궁 사람들 어떻게 따돌렸냐?”
“내가 그걸 설명을 안 했던가?”
청명이 잘 물었다는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들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사람 귀찮게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저 호수에 구멍을 뚫고 아래로 숨어서 따돌렸지!”
“……호수 아래로?”
“그럼! 순간적으로 그런 기지를 보일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쟤들이 아무리 꼼꼼해도 얼어붙은 호수 아래를 뒤질 수는 없을 테니까! 크으. 똑똑하지?”
청명이 자랑스럽게 배를 쭉 내밀었다.
백천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호수 아래?”
“얼어 뒈지는 줄 알았다니까.”
“물에 들어갔다 이 말이지?”
“왜 자꾸 물어? 이게 이해가 안 돼?”
“어. 이해가 안 된다. 기껏 서류를 얻어 놓고는 그걸 물 안에 가지고 들어갔다 이 말이지?”
“……어?”
백천이 손에 든 종이들을 청명에게 집어 던져 흩뿌렸다.
“야! 이 미친놈아! 먹으로 쓴 서류를 들고 물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 아주 깨끗하게 지워졌네! 네 머릿속처럼 맑고 깨끗하게!”
청명은 종이 더미를 잡아채어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하얗다.
북해의 맑고 투명한 물은 그 안에 들어간 종이마저 아주 맑고 투명하게 바꿔 버렸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넋이 나간 듯 휘청이던 청명은 터덜터덜 화로 앞으로 가 불을 쬐었다.
“뭐 하냐?”
“마음이 추워서 몸이라도 녹이려고.”
“…….”
백천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뭐 다른 건 얻은 게 없냐?”
“사숙.”
“응?”
“있겠어?”
“……말을 말아야지.”
백천은 순간 한 손으로 머리를 탁 부여잡았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청명에게 얻어맞은 자리에 손을 대 버렸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네.”
그때 청명에게 종이를 뺏어 든 당소소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소리쳤다.
“사숙! 여기 빙정이라는 글자가 아직 남아 있는데요.”
“빙정?”
“네, 빙정. 이건 산…… 음, 산출 같은데.”
빛에 비춰 가며 당소소가 더듬더듬 단어를 읽었다. 그러자 힘없이 앉아 있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 맞다! 궁주가 장로랑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마교 놈들이 빙정을 요구하는 것 같았어.”
“빙정을?”
“응. 요구량이 너무 많아서 맞춰 주기 어렵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교가 빙정을 요구한다고?”
백천은 고민하는 듯 턱을 감쌌다.
“그럼 중원에 빙정이 돌지 않게 된 것도 어쩌면 중원과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물건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군.”
“아미타불.”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혜연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마교가 어째서 빙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외까? 그것도 빙궁마저 버거워할 정도로 많은 양을.”
“……글쎄요.”
백천은 막막한 머릿속을 붙든 채 고민에 빠졌다.
‘뭔가 맞물리질 않는데.’
사람들이 사라지는 데다, 대량의 빙정을 요구한다라…….
“마교가 북해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사숙.”
백천은 화로를 쬐고 있는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쩔 셈이냐? 정보를 더 모은다고 해도 빙궁 안에서 이 이상의 것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만.”
“그렇겠지.”
“그리고 이 넓은 북해에서 마교도의 종적을 찾아낸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때 우리가 마교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우연에 불과해.”
“그것도 맞지.”
“그럼 방법이 없잖느냐?”
하지만 방법이 없단 말에는 청명이 피식 웃었다.
“왜 우리가 찾아?”
“응?”
“그 마교 새끼들이 북해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면, 지금 한창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텐데 굳이 우리가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 소란 좀 피워 주면 지들이 알아서 찾아올걸?”
“…….”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도 몰라? 풀을 건드리면 뱀은 알아서 나오게 되어 있어.”
“그래. 그러다가 보통 뱀한테 물리지.”
“……어?”
그 말도 맞는 말 같고…….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턱을 살짝 쓸었다.
어쨌든 반쯤은 이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의아한 구석이 남았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청명은 뭔가를 생각하다 씩 웃었다.
“그 새끼들이 빙정을 찾는다며?”
“그렇지.”
“그런데 우리도 필요하잖아.”
“……그렇지.”
백천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숙.”
“응?”
“그거 알아?”
“뭘…….”
“나는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청명의 눈이 삽시간에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내 물건이 그 마교 새끼들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느니, 빙궁에 불을 싸질러 버릴 거야.”
“…….”
“지금부터 빙정은 다 내 거다. 건드리는 놈은 다 뒈지는 거야!”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