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아무 일도 없다. (2)
“이쪽에는 없습니다!”
“발자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눈에 덮인 건지…….”
보고를 받는 이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눈보라가 친다고 해도 방금 지나간 이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 하지만 정말…….”
“그럼 달아난 이가 설마 답설무흔(踏雪無痕: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경공의 경지)에 오르기라도 했단 말이더냐?”
“……죄송합니다.”
“찾아라! 당장!”
“예!”
빙궁의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홀로 빙궁에 잠입하여 무사들을 해한 자다. 이대로 맥없이 놓친다면 빙궁 무사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었다.
‘이놈…….’
송원(宋遠)은 주먹을 움켜쥐며 눈보라가 날리는 주변을 연신 돌아보았다.
‘절대 살려 보내지 않는다.’
이건 그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타타타타탓!
다급한 발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너는 저쪽으로 가 보거라!”
“예!”
“발견하면 홀로 대적하려 하지 말고 바로 신호를 보내라! 무위가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내 역시 바삐 몸을 돌려 달려 나가려다가 순간 움찔했다.
‘이쪽은 아니다.’
그의 눈앞에는 얼어붙은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시야를 가릴 만한 엄폐물 하나 없는 이 호수를 도주로로 잡는다는 건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혹시 몰라 안력을 높여 전방을 살펴보았지만, 과연 희미한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쪽으로!”
“예!”
빙궁의 무사들이 빠르게 경공을 전개하여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빼꼼.
드넓은 얼음 평원.
그 한가운데 작게 뚫린 구멍에서 동그란 머리 하나와 작고 길쭉한 머리 하나가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란 머리가 주변을 살피는 듯 좌우로 획획 꺾였다. 이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으으으으. 얼어 뒈지겠네.”
얼음물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눈보라가 몰아쳐 뺨을 때리기 시작하니 차라리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얼굴을 내민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청명의 얼굴 주위에 새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끄응. 망할 놈의 음한기공.”
빙백신장은 북해빙궁이 천하에 자랑하는 음한기공이자, 북해빙궁을 대표하는 성명절기(成名絶技)다.
음한기공이 짜증 나는 이유는, 그 한기와 음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청명의 몸은 이 얼음물보다 더 차가울 것이었다.
“어으, 추워!”
키이이익!
“조용히 해, 인마!”
홀딱 젖은 백아가 억울하다는 듯 항의하며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청명은 그런 백아의 입을 틀어막을 뿐이었다.
“찰거머리 같은 것들!”
호수에 구멍을 뚫고 그 아래에 몸을 숨겼던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더니, 오는 길에 얼음낚시를 몇 번 해 보지 않았더라면 차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기지(奇智)였다. 게다가 이미 혜연을 통해 물속에 좀 들어가 있는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청명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 갔지?”
그를 쫓아 나온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빙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럴 때 슬그머니 돌아가면 완벽하지.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위로는 못 가겠지.”
청명은 목 아래로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앓느니 죽어야지. 야! 숨 들이쉬어.”
키이이익!
백아가 발버둥을 치며 저항하고 몸을 비틀었다. 너야 그렇다 치고, 내가 왜 굳이 물 안으로 함께 들어가야 하느냐는 항변이었다.
“잘 생각해라. 젖은 몸으로 밖에 나가면 얼어 죽는다.”
…….
잠깐 망연하던 백아가 한숨을 내쉬고는 후욱 숨을 들이쉬었다. 홀쭉하던 담비의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청명도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쉰 뒤 다시 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두꺼운 얼음 위로, 잉어처럼 자맥질하는 청명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 * *
“……괜찮을까요?”
“뭐가?”
“청명이 놈 말입니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윤종아.”
“예, 사숙.”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
백천이 득도한 도사 같은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청명이 사고를 치는 것은 자연의 이치 같은 것이고, 결국 그 사고에 휘말리면 피해를 본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 같은 것이다. 태풍은 피해야 하는 법이고, 군자는 굳이 소란에 참여하지 않는 법이지.”
“그냥 말려들기 싫다는 말 아닙니까?”
“정확하다.”
백천이 학을 뗐다는 듯 빠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 이쯤 됐으면 너희도 알 때가 되지 않았느냐. 빙궁이고 나발이고, 그놈이 작정하고 뒤집어엎기 시작하면 황궁도 감당 못 한다. 아마 보나마나 내일 아침쯤에 태연하게 돌아올 거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윤종이 영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창 쪽을 자꾸 바라보았다.
얼마나 걱정이 많이 되는지, 지금도 청명이 놈이 창을 두드리는 것 같은 환청이 자꾸 들려올 지경이었다.
똑똑.
그래. 꼭 이렇게 환청이 들리지 않는가.
똑똑.
또?
쿵! 쿵!
유이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창 쪽으로 뛰어가 지체 없이 창을 열었다.
움찔.
이윽고 펼쳐진 광경에 유이설은 답지 않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하얗게 변하다 못해 눈사람처럼 보이는 청명이 이를 고속으로 맞부딪치며 창 앞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선 몰골이 크게 다르지 않은 흰 담비가 양쪽 앞발로 몸을 감싼 채 덜덜 떨어 대고 있었다.
다다다다다다닥!
청명의 이가 서로 충돌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몰골 이상해.”
“비, 비켜 봐.”
유이설이 순순히 옆으로 나와 주자 청명이 끄응 하고 창을 타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털썩.
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창 앞에 엎어진 그는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부르르 떨었다.
“……뒈지는 줄 알았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진짜.”
“그래도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요. 태연하게 돌아온 건 아닌 것 같지만.”
“뭔 눈을 이렇게 뒤집어쓰고…….”
조걸이 혀를 차며 손을 뻗어 청명의 몸에 묻은 눈을 털었다.
“응?”
하지만 거의 털리는 게 없었다.
“사숙. 이거 눈이 아니라 그냥 얼음인데요? 애가 꽁꽁 얼었어요.”
“뭐?”
백천이 화들짝 놀라 후다닥 청명에게 달려갔다.
“아니, 이 미친놈아! 이 꼴이 될 때까지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화로! 화로 앞으로 옮겨! 담요 가져오고!”
“예!”
화산의 제자들이 부리나케 청명을 화로 앞에 던져 놓고 담요로 겹겹이 싸매어 덮었다.
백천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입을 뗐다.
“그러게, 정탐하러 갔으면 정탐만 하고 올 것이지!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워 댔느냐!”
“……동룡아.”
카악!
“내, 내가 진짜 조용히 돌아오려고 했거든?”
“그런데?”
“……저 새끼들이 나보고 마교도라잖아.”
화산의 제자들이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심했네.”
“마교에게 사과해야지. 그렇게 심한 말을.”
“……이것들이…….”
청명이 도끼눈을 떴지만, 안타깝게도 오들오들 떨기에 바쁜 청명은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조걸이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몸뚱이가 왜 그렇게 된 거냐? 아무리 추워도 몸에 얼음이 얼 정도는 아닐 텐데.”
“빙궁 무학이…… 으으, 원래 그래.”
청명이 코를 훌쩍였다.
화로 앞에 바짝 붙으니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음한기공이라는 게 원래 몸 안으로 파고들어서 사람을 얼리거든.”
“크으. 그걸 우리한테 알려 주려고 이렇게 몸으로 헌신을 하다니.”
“……너네 진짜 죽는다.”
청명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는 몸을 떨었다. 백천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괜찮으냐?”
“괜찮아 보여?”
그러자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꽥 소리쳤다.
“끄응. 등신같이 검은 옷만 입고 나가지 않았어도 이 꼴은 안 당하는 건데! 왜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지?”
“다 말렸어, 이 미친놈아!”
이 새끼는 머릿속에 빨랫방망이가 들어 있나. 뭘 이렇게 매번 깨끗하게 지우고 다니지?
“으으, 춥다.”
청명은 담요들 끝자락을 아예 모아 쥐고 끌어안으며 벌벌 떨었다. 불을 쬐단 백아가 잽싸게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진짜 괜찮으냐?”
이쯤 되니 진심 어린 걱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산 제자들의 염려 섞인 시선에, 청명은 한숨을 쉬고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내 허리를 펴고 가부좌를 틀었다.
“으…… 음한기공이고 나발이고, 내 몸을 침범할 수는 없지! 단번에 날려 버리겠어!”
청명이 운기 하는 자세를 취하자, 백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너 잘났다, 인마.
아침이 밝았다.
쿵쿵쿵쿵쿵!
밀려오는 피로에 까무룩 잠들었던 화산의 제자들은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뭐지?”
“일단 나가 볼게요!”
당소소가 재빨리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렸다. 문을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문 앞에는 무장을 한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어제 청명을 쫓았던 송원(宋遠)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당소소를 살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간밤에 빙궁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아, 밖이 소란스럽다 싶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곳엔 별일 없었습니까?”
“네. 저희는 딱히.”
말을 걸며 당소소의 표정을 살폈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쪽을 살펴도 되겠습니까?”
“……혹시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확실한 게 좋은 법이지요. 은형술이 뛰어난 이라 이 안에 잠입했을지도 모릅니다.”
“…….”
“빙궁의 다른 이들도 모두 조사를 받고 있으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속이 훤한 거짓말에, 당소소가 막 반박을 하려는 찰나였다.
“들어오시라 그래.”
등 뒤에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소소는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서며 송원이 들어올 길을 텄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한 송원이 안으로 들어온다. 예리한 칼날 같은 눈빛이 방 안 이곳저곳을 순식간에 훑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너스레를 떠는 청명에게로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담요를 둘둘 말고 있는 청명의 모습에, 송원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많이 추워 보이시는군요.”
“네. 제가 추위를 많이 타거든요.”
“무인이 추위를 탄다라…….”
“제가 익힌 무학이 좀 독특해서요.”
“그렇습니까?”
송원이 짙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도장.”
“네.”
“그 담요 안에 든 손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손이요?”
“예. 잠시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손은 왜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
“이유도 모르고 보여 드리기 좀 그런데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자 송원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이 작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저리 뻗댄단 말인가?
궁주님의 손님 자격으로 온 자들인 걸 알고 있지만, 송원은 이들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격한 마음이 말투를 거칠게 만들었다.
“그 손에 상처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는 것뿐입니다.”
“상처요?”
“예.”
흉수는 궁주님의 빙백신장을 자신의 손으로 맞받았다. 아무리 무학이 고강한 자라 해도 절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딱히 큰 의심을 품고 왔던 것은 아니지만, 무인이면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그의 의심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거리낄 것이 없다면 보여 주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뭐 그렇죠. 그런데…….”
청명이 히죽 웃었다.
“보여 주기 싫은데.”
“…….”
송원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놈이 설마 지금 나랑 장난을 치자는 건가?’
대체 간이 얼마나 크면 북해빙궁에서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거리낄 게 있다는 소리로군.”
“에이,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 그런데 보아하니 내가 흉수로 의심을 받는 것 같은데 그냥 보여 주기만 하면 억울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기를 걸죠.”
“……내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송원을 보며 청명이 실실 웃었다.
“제가 흉수가 아니면, 우리가 빙궁을 돌아다닐 때 방해하지 마세요. 간단하죠?”
청명을 노려보는 송원의 눈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빙궁 전체는 확답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원한다면 안내까지 해 줄 수 있소.”
“나쁘지 않네.”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마침내 담요 안에서 손을 꺼내 송원에게 내밀었다.
“됐어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손.
그런데 순간 송원이 벼락같이 그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뭣……!”
깜짝 놀란 화산의 제자들이 검 손잡이를 콱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