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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81화 (479/1,567)

481화. 아무 일도 없다. (1)

“사숙?”

“음?”

“바깥이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물음에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아무 일도 없다.”

“…….”

화산의 제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굳게 닫힌 창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칩입자다!”

“쫓아라!”

굳이 들으려 했던 건 아니지만, 단련된 그들의 청각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소리에 섞여 오는 사람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이런데도 아무 일도 없다니!

얼굴을 굳힌 조걸이 백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아무 일도 없네요.”

“그렇지?”

“네. 좀 쉬어야겠습니다. 오늘 피곤해서.”

“나도 그렇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는 그때였다.

“빙검대를 불러와라!”

“저기다! 절대 놓치지 마라!”

바깥쪽에서 자꾸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벌떡!

혜연이 낯빛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들을 모아 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창문으로 향했다.

“스님. 뭐 하시는…….”

꾸욱. 꾸욱.

모두가 혜연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짐 속에서 꺼낸 천으로 창틈 사이를 꼼꼼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아미타불. 잠을 청해야 하는데, 이리 소란스러워서는 안 되지요.”

아…….

윤종이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불 끌까요?”

“…….”

새삼스레.

이들이 화산의 제자와 그 일행임을 완벽하게 실감하는 백천이었다.

“아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쾅!

검을 뽑고 달려드는 이를 그대로 걷어찬 청명이 성질을 부려 댔다.

추워서 좀 확인 안 하고 대충 내려왔더니, 하필 그 밑에 사람이 있나.

“썩을 눈보라 같으니!”

자꾸 눈보라가 몰아쳐서 세상이 다 허여멀건데, 하필 흰 옷 입은 놈들이 돌아다니니 잘 보이지도 않…….

“어?”

청명의 눈동자가 순간 지진을 일으켰다.

잠깐만. 세상이 다 하얗다고?

그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까맣네.

아주 까매.

이거 정말 눈에 잘 띄겠는…….

“저기다!”

“저기 저 검은 놈이다! 잡아라!”

청명이 허허 웃었다.

“대가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그 대가리가 설마 내 대가리일 줄이야.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에서 시커먼 옷을 입고 있으면 당연히 눈에 띄지. 어쩐지 빙궁 놈들이 하나같이 허연 옷을 입고 다니더라.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

청명은 의미 없는 생각들을 집어치우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는데.’

어차피 백천이 창문을 닫지 않았어도 지금 상황에 처소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빠르게 달아나는 게…….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아앗!

섬뜩한 소음과 함께 새파란 검기가 눈보라를 가르며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쭈?’

한가락 하는 놈인…….

“아 씨! 내 검!”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뒤졌던 청명이 경악하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잠입을 위해 검을 놓고 왔던 게 이제 떠오른 것이다.

“너무 추워서 건망증이 도졌나. 자꾸 까먹네.”

나이를 감안한다면 건망증보다는 치매를 걱정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몸뚱이는 젊으니까.

‘아니, 차라리 다행이지.’

반사적으로 검을 썼다면 의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가 화산에서 왔다는 건 절대 들켜선 안 되니까.

“둘러싸라!”

“이놈!”

몰려온 빙궁의 무사들이 청명의 주변을 넓게 에워싸며 포위했다. 매섭게 겨눠진 검들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연히 보여 주고 있었다.

“쯧.”

청명은 혀를 차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포위를 당하기는 했지만, 딱히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포위당한 채 수십 명씩 썰어 버리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오히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날뛰는 맛이 있었는데.’

그 지랄 같은 마교 놈들을 하나하나 족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는데.

‘에효.’

추억을 곱씹던 청명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힘없는 눈으로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얘들이 뭔 죄가 있나.’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빠져나가야…….

하나, 그때였다.

“그 검은 옷!”

“응?”

포위한 이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날카로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교에서 나온 놈이냐?”

“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교도가 이곳에 잠입한 것이냐!”

“…….”

부릅떠진 청명의 눈에 천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교?

마교?

지금 나보고 마교 놈이라고 한 건가?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우드드득.

청명의 주먹에서 기이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알 수 없는 섬뜩함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교?”

청명의 목소리가 아주 천천히 새어 나왔다.

“너희……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못 할 말을 했지.

너흰 다 뒈졌다, 이 새끼들아.

눈을 까뒤집은 청명이 빙궁의 무사들에게 미친 듯 달려들었다.

콰앙!

“……주먹.”

콰아아아앙!

“……이건 발인가?”

“머리로 받은 것 같은데요?”

“아니. 이건 팔꿈치다, 팔꿈치. 무조건 팔꿈치.”

화산의 제자들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상황을 유추하고 있었다.

그런 사형제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으로 보던 당소소는 차마 누구도 꺼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사숙.”

“응?”

“……이거 진짜 괜찮은 거예요?”

백천은 흐뭇하게 웃으며 막내를 바라보았다.

“괜찮을 리가 있나.”

“…….”

당소소의 뺨을 타고 땀이 한 방울 주륵 흘렀다.

“그럼…… 뭐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떻게든?”

“네.”

“어떻게?”

“…….”

백천이 다 내려놓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소야.”

“네.”

“다 알면서 왜 그러느냐. 저놈이 사고 치는 걸 사람이 무슨 수로 막아?”

“…….”

옆에서 듣던 윤종이 백천의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천재지변이다. 사람은 태풍을 못 막아.”

“태풍은 그래도 피할 데라도 있잖습니까.”

“그도 그렇네.”

하지만 당소소는 자꾸 식은땀이 나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사천당가 출신은 그녀는 타 문파에서 난장을 부리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사천당가에 괴한이 난입하여 한가운데서 사람을 패 댄다고 생각해 보라. 당가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다.

‘청명 사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저 사람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나?

쾅! 쾅! 쾅! 쾅!

“아예 올라탔네.”

“어휴. 상상도 하기 싫다.”

화산의 제자들이 진저리를 치며 창 쪽을 바라보았다.

쾅! 쾅! 쾅! 쾅!

눈을 까뒤집은 청명이 눈밭에 쓰러진 이에게 올라타 양쪽 주먹을 내리쳤다.

“교? 교오오오? 다시 말해 봐, 새꺄!”

이 새끼들이 미쳐 가지고?

뭐?

마교?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마교라면 무덤에서도 공중 삼 회전을 하며 뚫고 올라오는 인간이다.

그런데 나보고 뭐?

교도오오오?

청명의 눈은 어느새 완전히 까뒤집혀 새하얀 흰자만 남았다.

“살다 살다 이런 욕은 또 처음 들어 본다! 야, 이 새끼야! 나도 별별 욕을 입에 담고 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정도는 지켰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렇게 심한 욕을 할 수가 있어!”

쾅!

팽그르르 회전한 허리에서 전달된 힘이 주먹에 완벽하게 실렸다. 그 힘을 온전히 전달하여 쓰러진 이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린 청명은 과감하게 연타를 날렸다.

“죽어!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얻어맞는 이의 고개가 좌우로 확확 꺾였다.

“저, 저 미친놈이!”

“뭐 해! 덮쳐!”

너무 당황스러워 공격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던 빙궁의 무사들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획!

그러자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달려드는 이들을 보았다.

“오냐!”

쓰러진 이를 내버려 두고 벌떡 일어선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맨손으로 덥석 잡았다.

차가운 한기가 손끝으로 밀려들었지만, 용암처럼 불타오르는 청명에게 그런 한기 따위는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챙!

검날이 단숨에 부러져 버렸다.

내력을 잔뜩 실은 검이 부러지자 무사는 눈이 찢어져라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어, 어떻게?’

검기가 실린 검을 맨손으로 잡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심지어 부러뜨린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퍼어어어억!

턱주가리에 정권이 꽂힌 이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일격으로 무사 하나를 날려 버린 청명은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광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에, 빙궁의 무사들은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 마공인가?”

“…….”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이 진짜?

이게 중원에서도 알아주는 도가 무학이다, 이 새끼들아!

- 내 눈에도 그렇게는 안 보인다.

“아, 왜 이럴 때 나와요! 들어가!”

버럭 소리를 지른 청명이 앞으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무사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주먹으로 얻어맞고 옆구리를 걷어차인 무사들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마, 막아라!”

“젠장,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빙궁 무사들은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청명은 자신이 왜 화산광견……. 아니, 화산신룡으로 불리는지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지원해라!”

“웬 놈이냐!”

굳게 닫힌 빙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끝까지 몰린 청명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개를 돌리며 그 광경을 확인했다. 내내 폭주하던 몸이 움찔했다.

튀어나오는 이들을 재빠르게 훑은 그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 튀어나오는 놈들은 밖을 순찰하던 어중이떠중이들과 격이 달랐다. 빙궁의 진짜 정예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개미 떼처럼 밀려나오는 것이었다.

‘에이. 이건 안 되지.’

화도 낼 때 내야지.

‘토끼자!’

이 정도면 난장은 피울 대로 피웠으니, 슬슬 문제가 커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이 이역만리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재빠르게 주변을 훑은 그는 포위진의 틈을 찾아내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헉!”

청명이 빛살같이 달려드는 순간, 빙궁의 무사가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하지만 청명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검의 옆면을 가볍게 밀어 냈다.

퉁!

검은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옆쪽으로 튕겨 나갔다. 무사의 활짝 열린 가슴으로 파고든 청명은 그의 명치에 그대로 어깨를 박아 넣었다.

콰득!

무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청명은 숨도 쉬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삽시간에 몸을 틀어 그와 위치를 바꾸고 몸뚱이를 걷어찼다.

콰앙!

발차기를 날린 반동으로 허공에 몸을 띄운 청명은 바람을 타고 빙궁 밖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잘 있어라! 이 새끼들아!”

아, 물론 진짜 갈 건 아니고.

청명이 낄낄대며 몸을 날리던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오.

작은 파공음이 귓가를 스쳤다. 청명이 뒤를 획 돌아보았다.

그리고.

부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물레가 돌아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빙궁의 입구에서 새하얀 기둥 같은 장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빙백신장(氷白神掌)?’

북해빙궁을 대표하는 무학이자, 천하일절의 음한기공으로 불리는 빙백신장.

그 장력이 지금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실린 기운이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맨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쯧!”

슬쩍 눈살을 찌푸린 청명은 몸을 틀며 양손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이내 움찔하며 그만두었다.

‘어 씨! 안 되지!’

반사적으로 매화산수(梅花散手)를 시전하려 했는데, 이건 누가 봐도 눈에 너무 띈다.

안 그래도 눈보라가 이렇게 몰아치는데, 거기에 붉은 꽃잎들이 휘날리면 이건 뭐 확인이고 뭐고 필요 없을 지경일 테다.

‘아, 왜 무공을 다 이따위로 만들어 놔서!’

청명은 짜증 어린 얼굴로 내력을 바꾸었다.

이내 그의 손에 청록색의 기운이 어렸다. 매화산수 대신 죽엽수(竹葉手)를 전개한 그는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날아드는 빙백신장을 힘껏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런!”

문으로 나오자마자 빙백신장을 날린 설천상이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입술을 꽉 깨물었다.

허공에서 빙백신장과 충돌한 복면인이 마치 망치로 후려친 조약돌처럼 허공으로 훨훨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쫓아라!”

“예!”

“신장(神掌)에 명중되었으니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얼어 죽기 전에 반드시 산 채로 찾아와라!”

“예!”

빙궁의 무사들이 두 눈에 살기를 머금고 달려 나갔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설천상은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내 내력을 역이용해 도주했다는 건가?’

“간이 부은 놈이로군. 음한기공이 어떤 건 줄 알고.”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 날아간 복면인이 어떤 놈인지 몰랐다.

그에게는 참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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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연재 1주년입니다.

앞으로도 영혼과 인생을 갈아 넣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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