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밥 잘 주면 좋은 사람이지! (5)
휘이이이이이잉!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내린 밤에 시야까지 막히니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스슷.
짐승마저도 누비기를 두려워할 그 혹독한 어둠 속.
밤보다 더 검은 야행복을 걸친 이가 빙궁의 새하얀 담장 위를 유령처럼 누볐다.
턱.
삐죽이 자라난 성의 귀퉁이에 모습을 숨긴 그는 의미심장하게 양팔을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몸을 끌어안듯 휘감았다.
“끄으으……. 얼어 뒈지겠네!”
야행복은 챙겼는데 추위는 예상 못 했다.
복면 속 청명의 이는 내내 절로 맞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음을 냈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도 추워서 덜덜 떨던 판인데, 얇은 옷만 걸치고 이 야밤에 밖으로 나왔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키이!”
“조용히 해, 인마!”
그 얇은 옷 안에 들어가 있는 백아가 도무지 이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듯 청명의 턱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몸을 덜덜 떨어 댔다.
“키익! 키익!”
그리고 대체 왜 옷을 이렇게 입었냐는 듯 원망스런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원래 추운 데 사는 놈이 뭔 엄살이 이리 심해?”
무인이면서 추위에 덜덜 떠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원래 청명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는 혹독한 인간이다.
청명은 백아의 머리를 꾹꾹 안으로 눌러 넣고 옷을 재차 잘 여미었다.
“끄응. 빨리 하고 가야지.”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야행복 안에 솜이라도 채워야겠단 결심과 함께 청명이 몸을 움직였다.
다다다닷.
그의 발이 매끈한 성의 외벽을 박차고 올랐다. 벽면이 얼어붙어 미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화산의 깎아지른 절벽도 평지처럼 누비는 청명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
촤아아아악!
어……. 문제가 되네?
발이 미끄러지며 만들어 낸 작은 소음에, 성 안을 순찰하던 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창을 열었다.
휘이이이이잉!
하지만 창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눈보라에 황급히 창을 다시 닫아 버렸다.
“웬 눈보라가 이렇게…….”
눈발이 단단한 나무창을 연이어 때려 대었다. 덜컥거리는 소리에 혀를 찬 그는 얼굴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올 겨울은 유난히 더 추운 느낌이라니까.”
그리고 의심을 거두며 순찰을 계속했다.
한편 슬쩍 안쪽의 상황을 살핀 청명은 벽에 달라붙어 조심스레 다시 벽을 기어올랐다.
“끄응.”
본디 이런 성을 기어오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만, 등 뒤를 때려 대는 망할 눈보라가 문제였다. 이건 눈이 아니라 숫제 우박 수준이다.
‘내가 북해에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영활하게 벽면을 타고 오른 끝에 이윽고 성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선 청명은 최대한 눈보라가 덜 몰아치는 쪽으로 붙은 다음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안쪽에서 이미 들은 적 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운 좋게 이리 한 방에?
위부터 샅샅이 훑어 내려갈 생각이었건만, 아무래도 빙궁주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청명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키…….”
“쉿.”
손가락으로 백아의 머리를 꾹 밀어 넣은 청명이 씨익 웃으며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는 기감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안쪽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는 둘.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상대로 빙궁주의 것이었다.
“놈들은?”
설천상의 질문에 빙궁의 일장로인 냉벽위(冷壁衛)가 즉각 입을 열었다.
“처소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흐음.”
설천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재미있는 놈들이야. 특히 그 화산신룡이라는 놈.”
그의 후한 평가에 냉벽위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도 경박한 놈이 아닙니까? 감히 궁주님 앞에서 그리 뻣뻣하게 굴다니. 어린놈이 명성을 얻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냉벽위의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났지만, 정작 설천상은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과연 그럴까?”
“……궁주님의 생각은 다르십니까?”
그는 턱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말했다.
“실력이 없는 방자함은 오만함이지만, 실력이 동반되는 방자함은 자신감이지. 내 눈에는 놈이 그리 오만해 보이지 않더군.”
“……그래 봐야 후기지수에 불과한 것을요.”
“겨우 후기지수쯤 되는 수준의 이를 야수궁주가 소개할 리가 있을까?”
“그건…….”
냉벽위가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야수궁주 맹소.
새외오궁은 그간 중원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간의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설천상도 맹소에 대해서는 웬만큼 아는 편이었다.
“맹소는 우습게 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설천상은 딱 잘라 말했다.
그 야수궁주가 저 화산신룡을 콕 집어 북해에 소개했다는 것은 저자가 여간 범상치 않단 뜻이리라.
다만…….
‘새로운 시대라…….’
설천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꿈같은 이야기를 지껄이더군.”
따뜻한 남쪽에 사는 야수궁이 북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새외오궁이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운남의 야수궁과 북해의 빙궁은 그 상황부터 문화까지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적당히 상대해 주면 될 일이다. 괜한 문제를 만들지 마라.”
“예, 궁주님.”
한편 건물 외벽에 붙은 청명은 덜덜 떨리는 턱을 꾹 누르며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도움될 말이나 하라고.’
여하튼 윗대가리라는 것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데 귀재다.
다행히 청명이 얼어 뒈지기 전에 설천상이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동태는 어떤가?”
그들이라는 말이 나오자 방 안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외벽에 달라붙어 있는 청명도 확연히 느낄 만큼 말이다.
“그들 역시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다만…….”
“다만?”
냉벽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그들이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예전에도 음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지만, 지금은 잔뜩 독이 오른 담비 같습니다.”
“독이 오른 담비라.”
설천상이 눈을 찌푸렸다.
“마귀 같은 것들이…….”
냉벽위가 슬쩍 설천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궁주님. 저는 아직도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됐다.”
“하나…….”
“됐다고 했을 텐데?”
설천상이 순식간에 한기를 뿜어내자 냉벽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냉벽위가 과하리만치 사죄를 해 옴에도 설천상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있지.”
“…….”
“하나는 선택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냉벽위가 생각하기에도, ‘그 일’은 설천상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은 수하로서 할 일이 아니…….
“죄송할 것 없다.”
그때 설천상이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감쌌다. 흰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이 귀신같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건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
설천상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화산의 제자들 앞에서 보여 주던 사람 좋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비틀리고 뒤틀어진, 보는 이를 절로 섬뜩하게 할 미소였다.
“형님은 훌륭한 궁주셨지.”
“…….”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이 빌어먹을 혹한의 대지에서 훌륭한 궁주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이제 곧 북해의 주민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궁주님!”
냉벽위가 그 자리에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차가운 살기를 내뿜던 설천상이 한기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그게 저 마도(魔道)의 버러지들과 손을 잡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궁주의 차가운 목소리에 냉벽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 궁주시여.”
“…….”
“저들의 무도함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북해의 신민들이 저들을 두려워해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고, 마을에는 괴질이 돌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민심이 흉흉해지지는 않을지.”
이미 흉흉해질 대로 흉흉해진 지 오래였지만, 감히 설천상에게 곧이곧대로 보고할 엄두가 나지 않는 냉벽위였다.
“……사람이 사라진다는 그 일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설천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놈들이.’
저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는 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저들이 그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안주할 땅, 그리고…….
“일단은 내버려 둬라.”
“하지만…….”
“주의는 시키겠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놈들을 압박했다간 괜한 문제를 빚을 수 있다.”
“…….”
냉벽위가 살짝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설천상은 굳이 그런 그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빙정은 어찌 되었느냐?”
“최대한 산출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요구가 너무 과하여…….”
“흐음.”
설천상이 잠깐 눈을 내리깔며 생각하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더 많은 빙정을 캐내라.”
“……예.”
사실 그러기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냉벽위는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다. 설천상이 그 사실을 몰라서 이리 지시하는 게 아니란 걸 때문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
설천상의 눈이 차게 빛났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무학이 완성되는 날, 저놈들은 물론이고 저 중원의 콧대 높은 놈들도 모두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오로지 그날만을 기다리며 감내하고 또 감내하겠나이다.”
“흥.”
설천상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원에서 온 놈들이 빙궁을 들쑤시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일단은 그놈들의 시선을 끌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하찮은…….”
그때, 설천상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다. 냉벽위가 영문을 모르고 그런 궁주를 유심히 보았다.
“……궁주님?”
순간 설천상이 지체 없이 벽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콰아앙!
벽이 그대로 뚫리며 벽의 일부가 산산조각 나더니 밖으로 튕겨 나갔다.
“구, 궁주님?”
벽에 뚫린 주먹만 한 구멍을 통해 눈보라가 밀려들어 왔다. 매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잠시간 보던 설천상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과민했나 보군.”
“…….”
“수하들을 시켜 벽을 고쳐 두도록.”
“예!”
그는 벽 쪽을 다시 한번 쏘아보고는 큰 보폭으로 걸어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냉벽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았다.
‘궁주님께서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시는구나.’
이해는 한다만…….
“후우.”
한숨을 내쉰 그마저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와, 놀래라.’
뻥 뚫린 구멍 옆 벽에 등을 바짝 댄 청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 아저씨 예민하시네.’
바람이 이리 불고, 눈보라가 치는 와중에 그의 기척을 발견할 줄이야.
이는, 설천상의 무위가 그가 예상했던 이상이라는 뜻이다.
“어으! 추워!”
일단 무위고 나발이고 얼어 뒈지겠다.
청명이 벽을 빨빨 기어 뚫린 구멍으로 다가갔다. 눈을 붙이고 구멍 안쪽을 들여다본 그는 이내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발견했다.
“야. 나와 봐.”
“키익?”
품에 손을 넣어 백아를 잡아 꺼냈다. 그러자 백아가 양쪽 앞발을 다 동원하며 청명의 옷을 부여잡고 절대 나가기 싫다는 듯 저항했다.
“……아, 요즘 목이 좀 시려서 목도리가 필요한데.”
협박을 동원하니 백아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결국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의 손에서 뛰어내린 백아는 뚫린 구멍을 통해 안쪽으로 섬전같이 쏘아져 들어갔다.
턱.
그리고 순식간에 서류를 물고 나와 청명에게 넘기고는 재빨리 그의 옷 안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흐음.”
청명은 서류를 잘 챙겨 넣고 슬쩍 웃었다.
‘마교와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라 이거지?’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청명을 동하게 한 건 하나였다.
- 중원에서 온 놈들이 빙궁을 들쑤시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일단은 그놈들의 시선을 끌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해라.
“아, 들쑤시지 말라 이거지?”
크으.
이거 또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면 들쑤시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안 그렇소, 사형? 낄낄.”
- 너 안 춥냐?
“와 씨! 얼어 죽겠네.”
청명의 몸이 유령처럼 아래로, 또 아래로 부유하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탓!
잠시 후 바닥에 내려선 그가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웬 놈이냐?”
어? 들켰……!
쾅!
“아아아아아아아악!”
청명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쭉 뻗은 다리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빙궁의 무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생각하고 때렸어야 하는데, 발이 먼저 나갔다.
이거 참 안 좋은 습관인데.
“누구냐!”
“침입자다!”
눈보라 속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짝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청명은 위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숙소가…….’
오! 저기.
소란에 놀랐는지, 때마침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백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복면을 쓴 청명의 눈과 백천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좋아. 일단은 저기로…….’
그때.
청명을 바라보던 백천이 빙그레 웃더니 손을 뻗어 창문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탁.
미련 없이 닫아 버렸다.
“…….”
굳게 닫힌 숙소 나무창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와…….”
저 새끼 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