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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79화 (477/1,567)

479화. 밥 잘 주면 좋은 사람이지! (4)

‘저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청명의 미소를 본 화산의 제자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도 적지라고 할 수 있는 북해빙궁에서 태연히 먹고 마실 만큼 나름 간이 커졌지만, 청명이 주둥이를 터는 사태는 그런 그들의 심장마저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바짝 긴장한 그들이 청명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히죽 웃어 댈 뿐이었다.

‘아니겠지.’

‘그래도 생각이 있는데.’

그들은 살짝 떨려 오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저놈이 아무리 청명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여기서까지 사고를 치…….

“소림에서 가 보라던데요?”

“끅.”

“쿨럭!”

……고도 남을 놈이었다.

모두 일제히 경기를 일으켰다.

‘그걸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 이 미친놈아!’

‘원시천존이시여. 제발! 제발 좀! 제바아아알!’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혜연이 떨리는 손으로 연신 염주를 굴려 대었다.

도끼눈을 뜬 일행의 눈빛이 연신 날아드는데도 청명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그걸 신경 쓰면 청명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당황한 건…… 설천상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뭐지?’

물론 소림에서 이들을 보냈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다면, 그는 궁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설마 그걸 제 입으로 태연하게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궁주가 아니라 궁주 할아비가 와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소림에서?”

“네.”

설천상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소…림에서 왜 자네들을 북해에 보냈단 말인가?”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아,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요.”

“음?”

“뭐 듣기로는 소림에서 정탐하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그 양반들이 죽어 나왔다고 하던데요?”

“푸우우우우웃!”

백천이 마시던 물을 고스란히 내뿜었다.

모두의 시선이 꽂혀 들었지만, 백천은 입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청명만 바라보았다.

‘진짜 미친놈인가?’

아니.

청명이 제정신이 아닌 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겠냐마는, 미쳐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모두가 바짝 긴장하며 설천상의 안색을 살폈다.

설천상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리게 대꾸했다.

“……그건 무슨 소린가?”

“에이, 저희는 잘 모르죠. 소림 방장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

“사실 뭐 저희가 소림 방장쯤 되는 분께 이리저리 따져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시면서.”

“그, 그렇지.”

가만 듣던 혜연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따져 물었잖소!’

아니, 따져 물었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중원을 다 뒤져도 소림의 방장인 법정을 그렇게 들이받는 사람은 청명이 유일할 것이다. 그 능수능란한 법정이 기겁하여 말을 잃을 정도로 까 놓고는, 뭐?

따져 물을 수가 없어?

“입에 침이나 바르시……!”

“하하하하. 스님! 이것 좀 드시지요!”

조걸이 재빨리 혜연의 입에 채소볶음을 한가득 욱여넣었다.

설천상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인가?’

그럴 리가 있는가?

이놈이 중원에서 화산신룡으로 불리며 명성을 날리고 있는 신진고수라는 점은 접어 두고라도, 그 소림의 방장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놈을 북해까지 보냈을 리는 없었다.

그럼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걸 확인하러 왔다는 건가?”

“아뇨.”

“…….”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청명을 보며 설천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저희야 그냥 가라고 하니까 온 거죠. 저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소림 방장이 시키는 일을 거절하겠어요? 까라면 까야죠.”

듣다 못한 화산의 제자들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설마 소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줄이야.’

‘저 새끼는 양심을 중원에다 두고 왔나.’

‘원래 없잖습니까.’

북해에 오는 대가로 소림을 털어먹다 못해 기둥뿌리를 반쯤 뽑아 버린 청명이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저렇게 말하면 안 될 것을.

백천이 슬쩍 혜연의 눈치를 살폈다.

눈을 감고 있는 표정이야 평온해 보였지만…….

“스님.”

“예.”

“울지 마십쇼.”

“…….”

혜연이 어느새 촉촉이 젖은 속눈썹을 손으로 훔쳤다.

청명은 이토록 가득한 원성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겸사겸사 온 거예요. 빙궁이 어떤 곳인지 보고 견문도 넓힐 겸 해서요.”

“흐음. 그렇군.”

설천상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쭙는 건데, 소림에서 보낸 사람이 죽었다는 건 무슨 이야기예요?”

청명의 태연한 물음에 설천상은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지 모르겠군. 자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

“한 달 넘게 걸렸죠.”

“그렇지. 북해는 그만큼이나 중원에서 멀고, 또 까마득하게 넓은 곳이네. 내가 아무리 북해빙궁의 궁주라고는 하지만, 북해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법이지.”

“하긴.”

청명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져 보자면 타 문파에 감시원을 보낸 소림이 무도한 것이 아닌가?”

“아, 그건 크게 공감해요. 소림이 그런 면이 있죠. 이 양반들은 남이 지들에게 하면 화를 낼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한테 해 버린다니까요. 쯧쯧…….”

부들부들.

조걸과 윤종이 미소 지으며 혜연의 승포를 잡아 꾹 눌렀다.

‘진정하십쇼, 스님. 진정.’

‘악감정이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닐……. 아니, 꼭 악감정만으로 저러는 건 아닐 겁니다.’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궁주님께서는 모르는 일이라는 거죠?”

“그렇다네.”

“그럼 됐네요.”

설천상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은 결백하고 소림은 의심하니, 저희가 며칠 머물면서 빙궁을 돌아볼게요. 빙궁주님이 떳떳하시다면 저희가 소림에게 그 결백을 증명해 드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자 설천상이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빙궁을 돌아보겠다?”

“안 되나요?”

“안 될 이유가 없겠지.”

모두의 우려와 달리, 설천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머물러 주게. 내 마침 자네들에게 궁금한 것도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될 수 있겠지.”

“크으. 통이 크시네요! 잔 받으시죠!”

“허허. 자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구만.”

설천상의 잔에 청명이 술을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뒤 술을 단번에 넘겼다.

술잔을 내려놓은 설천상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자네들을 결과적으로 등을 떠밀려 이 먼 곳까지 왔다는 거로군.”

“아,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응? 그럼?”

“저희도 빙궁에서 구하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요.”

“물건?”

생각지 못한 말에 설천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 빙정이요. 이게 꼭 필요한데, 지금 중원에선 빙정이 씨가 말랐거든요. 어떻게 좀 구해 갈 수 없을까요?”

“……빙정이라.”

설천상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외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솔직하게 말해 주었으니, 나도 그러는 게 도리겠지. 지금 북해에도 빙정이 부족하다네.”

“……북해에도요?”

청명이 갸웃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빙정 자체가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세. 금광을 파고 들어가 금을 구하듯, 만년빙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겨우 하나 발견되는 게 빙정이지. 그만큼 귀하고.”

“아아.”

“그런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잘 나지 않는다네.”

“그럼 구할 수 없는 건가요?”

“그럴 수야 있겠는가.”

설천상이 빙긋 웃는다.

“북해인은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네. 멀리서 온 손님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빙정을 구하는 대로 넘겨주도록 하지.”

“크으! 역시!”

청명이 설천상의 손을 덥석 잡고 붕붕 흔들었다.

“통이 크시네요! 역시 북해빙궁의 궁주님쯤 되면 다들 이렇게 화통하신가 봐요.”

“허허.”

설천상은 어색한 얼굴로 잡혔던 손을 슬쩍 빼냈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이야기는 이쯤 하고, 오늘은 일단 쉬면서 여독을 풀도록 하게나.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하겠지.”

백천은 청명이 더 이상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벌떡 일어나 포권 했다.

“빙궁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가 워낙에 다망하다 보니 긴 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네. 시비를 붙여 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편히 이야기하게나. 바로 해결해 줄 걸세.”

“예! 감사합니다.”

“그럼.”

빙궁주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기척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청명은 씨익 웃었다.

“좋은 사람이네?”

윤종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인마. 제 형을 죽이고 궁주의 자리를 찬탈한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야!”

“밥 잘 주면 좋은 사람이지!”

“…….”

윤종이 말을 잃고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말해 봐야 뭣 하겠는가? 듣는 사람이 청명인 것을.

그때 묵묵히 앉아 있던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침착한 분이시군.”

“예. 지금까지 본 문파의 수장들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좀 부드럽다고 해야 할지.”

“……진짜 저 사람이…….”

백천은 설천상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들이 본 모습이 설천상의 본모습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본 바로는 그 잔악한 마교와 손을 잡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청명아.”

“응?”

“어떻게 생각하냐?”

“뭘 어떻게 생각해?”

청명의 눈에 의미심장한 기색이 스쳤다.

“지금은 모르지. 지금은.”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일단 몸 안에 마기는 없었고.’

조금 전 빙궁주의 손을 잡을 때 그의 기운을 확인해 보았지만, 마공 특유의 음습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마교에 입문하진 않았다는 뜻이다.

“일단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지.”

“그래. 그게 무어냐!”

백천이 결연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청명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의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 고기 안 먹으면 나 줘.”

“…….”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일단은 먹어야지.”

“…….”

어…….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식사를 마친 화산의 제자들이 시비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자신들이 머무를 곳을 본 그들은 놀란 얼굴로 연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진짜 좋네.”

“그러게요. 백매관도 많이 고쳐서 이제 진짜 좋아졌는데, 여길 보니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빙궁은 화려하다. 눈앞이 빙빙 돌 정도였다.

화산은 어찌되었건 도가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검소한 외양을 추구하는 편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과 힘을 과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천당가 정도는 되어야 이곳의 화려함에 대적할 수 있겠지만, 당가 역시 오랜 역사에서 느껴지는 풍취가 있는 곳일 뿐, 이처럼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지만 백천은 그 방의 화려함에 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는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냐?”

“응?”

“정말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할 셈은 아니겠지?”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청명이 빵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일단 할 건 해야겠지.”

“목표는?”

“뻔하지. 정보.”

단호하게 답하는 모양새가, 이미 생각을 마친 듯 보였다.

“저 양반들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러니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지.”

“그래. 옳은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어찌할 셈이냐?”

“뭐 새삼스레 묻고 그래?”

어깨를 으쓱해 보인 청명이 방 안에 미리 옮겨져 있던 짐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이것도 아니고. 음…… 이놈도 아니고.”

그러더니 짐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백천은 의아한 얼굴로 그런 그를 보았다.

“너 뭐 하는…….”

“오! 찾았다!”

청명이 내내 뒤적이던 짐 더미 사이에서 작은 봇짐을 하나 꺼냈다. 화산에서 출발할 때 직접 챙긴 물건인 모양이었다.

“거기 뭐 특별한 거라도 들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봇짐에서 시커먼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백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저 미친놈이!’

북해까지 오면서 저걸 챙겨 왔다고?!

“그…… 그걸 왜 또!”

“처, 청명아! 진정해라! 여긴 북해빙궁이다!”

“제발 상식적으로 살자, 제발!”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하며 말렸지만, 청명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타협의 여지란 바늘구멍만큼도 없을 듯 보였다.

“예로부터…….”

청명은 봇짐에서 꺼낸 시커먼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쓰더니 검은 야행복을 쥐고 자랑스레 흔들었다.

“정보를 얻는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지!”

아니야, 이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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