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밥 잘 주면 좋은 사람이지! (3)
북해빙궁주 설천상은 수하들을 대동한 채 눈보라가 밀려들어 오는 회랑을 걸었다.
차가운 칼바람이 연신 몸을 할퀴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북해의 사내는 추위에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궁주님.”
등 뒤에서 들려온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설천상이 발걸음을 멈췄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저들을 환대하시는 것입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으나, 설천상의 미간은 내 천(川)자를 그렸다.
“이유랄 것도 없다.”
답하는 목소리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저놈들이 이곳에 온 의도야 빤하지. 빙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겠단 의사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더더욱…….”
“어리석은지고.”
설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장로를 돌아보았다.
“저들을 누가 보냈을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소림이겠지.”
설천상의 입에서 소림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림이 힘이 없어 지금껏 빙궁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놈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지.”
현재의 소림은 과거처럼 지배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중원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절이라면, 빙궁도 감히 북해에서 소림의 감시를 밀어 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입지가 약해진 소림의 지시에 따라 이 먼 북해까지 올 문파가 없다. 때문에 소림은 단독으로 북해를 상대해야 한다. 그건 저 소림에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리고 설사 이긴다 해도, 홀로 북해까지 왔다가 큰 피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소림은 중원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릴 것이다.
“우리가 저들을 건드리면 명분을 주게 된다.”
“명분이라면…….”
“화산신룡. 그리고 소림의 혜연.”
일순간 설천상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 둘이 북해에서 동시에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대문파들이라 해도 북해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가 어렵겠지.”
“……소림이 그것까지 생각하고 저들을 보냈단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소림의 혜연은 그 소림의 방장이 애지중지하는 기재라고 들었습니다만……. 세인들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
“그래, 백 년. 길다면 긴 시간이고, 중요하지.”
설천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장로를 돌아보며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천년소림에게 있어 한 명의 기재는 그저 기재일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림의 입지겠지.”
“으음.”
장로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소림의 방장은 가장 아끼는 제자를 사지가 될 수 있는 곳으로 보냈다는 뜻이 아닌가?
‘실로 비정하고 무시무시하군.’
천하를 운용하는 이들에게 독심(毒心)이 필수라고는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우리가 저들을 해한다면 소림은 좋은 명분을 손에 넣고, 빙궁을 압박해 올 것이다.”
“하나, 궁주님. 중원의 압박 따위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 말에 설천상은 고개를 돌려 장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매서운 눈빛에 말한 이는 금세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짜증 어린 얼굴로 한심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던 설천상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중원이 두려운 게 아니다. 소림이 두려운 건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저들과 싸워 봐야 얻을 게 없다는 점이지. 당장 중원으로 진출할 수 없다면 이겨 봐야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다. 저놈들을 잘 대접해 보낸다면 소림은 빙궁으로 쳐들어올 명분을 잃게 된다.”
“아아.”
뒤를 따르던 빙궁의 장로들이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궁주님이십니다!”
“저들이 궁주님의 심계와 혜안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빙궁의 천년 영화가 머지않았습니다.”
쏟아지는 찬사에, 설천상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하나 그의 내심은 표정과 전혀 달랐다.
‘머저리 같은 것들.’
이 간단한 것 하나를 고려하지 못해서 이런저런 질문이나 늘어놓는 꼴이라니.
빙궁을 빠르게 장악하기 위해서 능력보다는 무조건적 충성을 바칠 이들로 주변을 채웠다.
그러다 보니 장로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아부나 떨 줄 알았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골치가 아파진 설천상이 짜증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어찌 하고 있느냐?”
“술과 음식을 내어 주었더니, 멋모르고 실컷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의심도 없이?”
“예. 딱히 경계심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 멍청한 놈들이었나?”
잠깐 중얼거린 설천상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리고 싸늘한 냉소와 경멸이 어렸다.
“야수궁주 맹소가 소개까지 한 이들이라 조금 긴장했거늘, 그래 봐야 따뜻하고 풍족한 곳에서 살아온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한 것인가.”
본디 척박한 대지를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그럴 능력이 안 되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뒤를 지키던 장로 중 하나가 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설천상은 그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더냐?”
“궁주님…….”
지적받은 이는 뭔가 어정쩡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 뭔가 좀 다릅니다.”
설천상의 눈썹이 꿈틀한다.
다르다?
“무슨 의미인가?”
“그, 긴장감이 없다기보다는…… 그게…….”
더듬거리는 말투에 살짝 짜증이 치민 설천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대로 말을 해 보아라. 무슨 의미냐!”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결국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 설천상은 말을 꺼냈던 이를 잠깐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별다른 질책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면 알겠지.’
마침 그곳으로 향하던 차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연회장에 들어선 설천상의 눈이 못 믿을 광경을 본 것처럼 점점 커졌다.
‘뭐지?’
이곳은 북해빙궁이다.
북해. 그래, 북해. 저 중원으로부터 이역만리, 척박한 땅.
빙궁이 지배하는 땅에 들어온 외부인은 누구라도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대범한가와는 딱히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익숙지 않은 자연과 문화 앞에 누구나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니까.
때문에 이제껏 북해빙궁을 방문했던 외지인은 딱히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여 왔다.
한데…….
‘뭐지, 저것들은?’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제껏 그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생경한 상황이었다.
꿀꺽! 꿀꺽! 꿀꺽!
중앙에 앉은 이가 커다란 술병을 통째로 쥐고 나발을 불어 대고 있었다.
힘차게 약동하는 목젖을 보고 있자니 설천상의 목이 절로 시원할 지경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술병을 쾅 내려놓은 이는 입가를 쓱 문질러 닦으며 세상 다시없을 호쾌한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 술 죽이는데?!”
중앙에 앉아 낄낄대는 그는, 당연하게도 청명이었다.
술병을 바라보는 눈에 흡족한 기색이 가득했다.
중원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독한 술이 더없이 마음에 드는 듯 연신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앞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덥석 잡아 시원하게 뜯기 시작했다.
“고기! 고기다!”
찹찹찹찹찹.
순식간에 고기를 분쇄해 버린 청명은 다른 고기를 노리고 손을 뻗었다.
싹!
하지만 그가 노리던 고기를 누군가가 재빨리 낚아채 갔다.
“어쭈?”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고기를 낚아 간 조걸을 노려보았다.
“내 고기에 손을 대? 위아래도 없이?”
“청명아. 네가 아래다.”
“아, 맞다.”
살짝 청명을 경계하던 조걸은 이내 고기를 게걸스레 뜯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촉촉한 고기야……! 말라비틀어진 육포가 아니라 진짜 고기! 크으! 입에서 살살 녹네, 녹아!”
“좀 조용히 좀 먹어라. 조용히!”
조걸을 타박하면서도 윤종 역시 정신없이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심지어 제자들이 정신을 놓으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지적하던 백천도 입 한 번을 열지 않고 미친 듯이 음식을 욱여넣고 있었고, 한쪽에 앉은 유이설과 당소소도 식탁 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과격하게 음식을 쓸어 넣어 댔다.
“밥! 밥!”
“젠장, 너무 맛있어……!”
조걸은 아예 고기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황홀해했다.
“여기까지 와서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구나!”
“……곡식도 챙겨 왔는데 밥도 못 지어 먹었지.”
“저 마귀 같은 놈이 빨리 가야 된다고 하도 재촉해서, 생쌀만 씹어 먹지 않았습니까!”
북해로 오는 동안은 바삐 이동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고, 마을에 도착해서는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본격적으로 밥을 지어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도사라는 사람들이 궁핍한 환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쑨 죽에 숟가락을 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화산의 제자들은 무려 한 달여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화산에서는 삼시 세끼 고기를 뜯던 이들이 생쌀에 마른 육포나 씹고 지냈으니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그런데 마침내 눈앞에 제대로 된 음식이 나왔으니 눈에 뵈는 게 없을 만도 했다.
다만 한 사람.
깨작.
오직 한 사람만이 제대로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숟가락이 접시 위를 이리저리 오가며 훑다 힘없이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스, 스님…….”
뒤늦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화산의 제자들이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혜연을 보았다.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하기로 작정했는지, 빙궁에서 내온 식탁 위에는 오로지 고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볶은 고기, 삶은 고기, 튀긴 고기, 구운 고기…….
물론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진수성찬이었지만, 중인 혜연의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세상 다시없을 서글픈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던 혜연은 결국 구색 갖추기용으로 놓인 볶은 야채를 집어 오물오물 씹었다.
“……다른 것 좀 해 달라고 해 볼까요?”
“아미타불…….”
혜연은 촉촉한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다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단다! 먹자!”
“예!”
다시 전투 같은 식사가 계속되었다. 혜연은 멍한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권해 보지. 딱 한 번만 더…….’
그걸 매정하게 단번에 자르나? 이토록 매정하게?
당황하여 멍해진 건 혜연뿐만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주 설천상은 말 그대로 황망히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화산파면 도가 문파 아니었나?’
아무리 중원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북해라고 하지만, 아주 기초적인 정보가 잘못될 리는 없었다.
‘대체 세상 어느 도사가 술을 저리 퍼마시고, 고기를 저리 걸신 든 것처럼 뜯어 댄단 말인가?’
그 술병에 자꾸 눈독을 들이는 저 중놈은 또 뭐고?
왜 장로가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크으! 이제 좀 살 것 같네.”
결국 숙수들이 탈진할 만큼 고기를 퍼 넣은 청명이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술병을 움켜잡았다.
“……그렇게 먹고 술이 또 들어가냐?”
“동룡아, 동룡아. 밥 배와 술 배는 따로 있는 법이란다.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다니. 쯧쯧쯧.”
청명이 히죽 웃고는 흡족하게 젖혔던 고개를 내렸다.
“오?”
그러다 뒤늦게 문가에 서 있는 설천상을 발견했다. 청명은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주님 오셨네요!”
“…….”
“크으!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환대를 해 주실 줄이야!”
“……그, 그런가?”
설천상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 북해에서 땀을 흘린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도 몰랐다.
‘좀…… 모자란 놈인가?’
중원과 북해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다. 아무리 저들이 맹소의 소개를 받고 왔다고는 하나, 이곳은 결국 저들에게 있어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저놈은 이곳이 제 안방이라도 되는 양 천연덕스럽게 굴고 있지 않는가?
“한잔하실래요?”
“…….”
“이거 술 좋더라고요. 아주 기가 막혀요.”
그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설천상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로군.”
그리고 슬쩍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화산의 제자들 맞은편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고 앉을 때는 비로소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그래. 배들은 충분히 채운 것 같으니, 이제 이야기를 해 보지.”
빙그레 웃는 낯으로 물음을 던졌다.
“북해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그 질문에,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