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밥 잘 주면 좋은 사람이지! (1)
“은공들께서 이리 가 버리시면 저희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몰려나온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으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이리 가 버리시면…….”
다들 아쉬움과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특히 촌장은 거의 황송하다는 얼굴로 화산의 제자들을 보았다.
병을 치료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이들은 무언가를 받기는커녕 남은 곡식마저 모조리 내어 주었다.
빙궁마저 겁박해 오는 처지에 이런 도움을 받으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초면에 은공들을 몰라 뵙고 함부로 대한 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노인장.”
연신 머리를 숙이는 촌장을 백천이 만류했다.
경계가 심한 이들이었지만, 한번 마음을 연 후로는 오히려 중원인들 이상으로 감사를 표해 오고 있었다.
다만…….
슬쩍 촌장의 뒤쪽을 바라본 백천의 얼굴이 슬쩍 어두워졌다.
‘역시 안색들이 그리 밝지는 않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괴질은 어찌어찌 치료했지만, 그렇다고 마을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발생한 폐관병은 결국 북해의 상황이 만들어 낸 것.
북해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언제고 비슷한 일이 발생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었다.
폐관병이 발병하지 않았다 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인 건 매한가지였을 것.
백천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은공. 북해빙궁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시면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화산의 제자들이 수레를 움켜잡자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살펴 가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돌아오실 때, 꼭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정말로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출발하고도 한참 동안, 당소소는 마음이 영 놓이질 않는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요?”
“……당분간은 큰 문제 없겠지. 어제 백아가 고생해서 창고를 가득 채워 놓기도 했고.”
“……그런 부분까지 닮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월척을 척척 낚아 올리는 재주가 신통하여 몇 번 칭찬을 해 줬을 뿐인데, 그 칭찬에 잔뜩 고무된 백아가 알아서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커다란 생선을 연이어 물어 왔다.
그러더니 ‘왜 더 칭찬해 주지 않지?’라는 눈빛으로 모두를 지그시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누구와 비슷하게 말이다.”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백아 덕분에 창고 하나를 그득그득 채울 수 있었다.
‘혜연 스님의 얼굴이 점점 서글퍼지는 건 좀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자처한 일인 것을.
여하튼 신선한 날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앞으로 마을사람들이 직접 낚시를 해야겠지만, 창고에 있는 생선만으로도 한동안 배를 채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날씨가 추워 상할 위험도 없을 것이고.
“듣자 하니 촌장님이 다른 마을에도 잡은 생선들을 나눠 주신다더라고요.”
“흐음. 그럼 좋은 일이지.”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는 서로 돕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다는 한이명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거외다. 아미타불.”
“그렇지요.”
그때, 걱정 섞인 대화를 듣고 있던 윤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또또. 저거 또 병 도졌네, 저거!”
그 순간 수레의 천막에서 난 작은 구멍으로 청명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그 턱 아래로 백아도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쏙 내밀었다.
“왜? 아주 여기 눌러 앉아 살지!”
하아악!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동물 한 마리와 사람 한 마……. 아니 사람 하나가 동시에 하악질을 해 댔다.
“왜? 이번에도 검 팔려고? 한철검이라 아주 비싸게 팔리겠다?”
하아아악!
“그, 그 이야기는 왜 또 꺼내고 그래.”
윤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나는 그냥…… 우리가 도울 일이 없는가 싶어서 그런 거지.”
“못 도와.”
“응?”
삽시간에 낮게 깔린 청명의 목소리에 윤종이 조금 놀라며 청명을 보았다.
“뭐, 도움을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
“그런데 그건 순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아지겠지.”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청명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삶을 바꾸는 건 남이 아니라 자신이니까.”
그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청명을 돌아보았다.
“왜?”
“……아니.”
“네 입에서 이렇게 대뜸 맞는 말이 나오다니.”
“아미타불. 해는 동쪽에서 떴습니다만.”
“근데 이것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쯧. 됐다. 말해서 뭐 하겠냐. 얼른 달리기나 해.”
혀를 찬 그는 천막 안으로 다시 머리를 쏙 감추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묘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참 희한한 놈이라니까.’
불과 이틀 전 마교도와 만났을 때는 그렇게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굴고 있었다.
헛웃음을 흘린 백천이 사제들을 독려했다.
“시간을 너무 뺏겼다. 일전에 묶어 둔 이들이 빙궁에 닿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 한다. 쉴 시간에 빠르게 움직이자.”
“예, 사숙!”
“알겠어요. 사형.”
“가자!”
모두가 수레를 더욱 힘차게 끌기 시작했다.
* * *
“저기가…….”
“맞는 것 같은데요.”
“……길었다.”
“빙궁(氷宮)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멀리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탄성을 흘렸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외벽.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의 커다란 벽 너머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성이 보였다. 중원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성채를 보고 있자니 확실히 이곳이 북해인 것이 실감되었다.
중원의 성이 드넓고 웅장하다면, 북해빙궁은 상대적으로 날카롭고 드높았다. 외벽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성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지니 마치 얼음의 성처럼 보였다.
“굉장하네요. 이런 곳에 저런 건물을…….”
“그러게.”
이 추운 날씨와 척박한 지형을 고려했을 때, 저런 성을 짓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저 성만 보더라도 북해빙궁이 이 북해에서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음.”
“으음.”
윤종이 살짝 짓눌린 듯한 얼굴을 입을 뗐다.
“뭔가 좀 겁나는 기분인데. 기가 눌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답지 않은 모습에 조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사형. 뭔 건물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부잣집 아들놈이 뭘 알아?”
“…….”
윤종이 도끼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조걸은 흠칫하며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새삼스레 감탄하며 이 성을 보는 건 백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북해빙궁이로군.”
잠깐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던 그는 아차 하며 수레를 멈추고 모두를 단속했다.
“다들 긴장해라. 야수궁주님이 미리 말을 전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저들이 어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예, 사숙.”
“최악의 경우엔 달아나야 할 수도 있다. 명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예.”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빙궁과의 관계도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마교까지 얽혀 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으으. 춥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털가죽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청명이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휘적휘적 걸어 앞쪽으로 나섰다.
“진짜 얼음 성 같네.”
간단하다 못해 성의 없는 감상을 남긴 청명이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뭐 해? 가자.”
“오냐!”
슬쩍 웃은 화산의 제자들이 이내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빙궁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새 눈보라가 그친 덕에 새하얀 외벽은 더욱 거대하고 웅장하게 보였다.
외벽 중앙의 커다란 대문 앞에 선 백천이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쿵쿵쿵쿵!
보통 이만한 문파의 정문에는 문을 지키는 위사(衛士)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 먼 북해까지 찾아올 이가 없다 여겼기 때문인지 정문을 지키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쿵쿵쿵!
“계십니까! 빙궁에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였다.
철컹!
커다란 쇳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극!
거대한 철문이 움직이며 뒤틀리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미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그 소리에 모두가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침내 반쯤 열린 문틈으로 새하얀 무복을 입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 하얀 거 정말 좋아하네.’
건물도 흰색인데 의복까지 희다. 거기에 피부까지 창백한 편이다 보니 뭔가 살짝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슨 일로 빙궁의 문을 두드…….”
말을 하던 무사가 화산 제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싹 굳혔다.
“외부인?”
“…….”
청명이 슬쩍 윤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한테서 뭔 냄새라도 나나? 저 양반은 얼굴만 보고 우리가 외부인인 걸 어떻게 알지?”
“……이 북해를 통틀어도 너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
그들이 대화를 하건 말건 무사의 일그러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감히 외부인이 북해에 발을 들인 걸로도 모자라 빙궁의 문을 두드리다니.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가 언성을 높이자, 명령이 없었음에도 안쪽에서 백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청명이 다시 물었다.
“쟤들 설마 저 추운 데서 대기하고 있었던 거야? 와, 진짜 할 짓 없네.”
“……청명아. 제발 좀…….”
윤종은 청명의 입을 때리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이 새끼는 대가리에 대체 뭐가 들었기에 이런 상황에 태연하게 이런 질문이나 해 대는 건가?
아무리 오래 보아도 알 수 없는 게 청명이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무인들은 어느새 수레를 빙 에워싸며 포위했다.
챙! 챙!
그리고 일제히 검을 뽑아 화산의 제자들을 위협하듯 겨누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천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보이려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저희가 중원인인 것은 맞습니다만,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남만야수궁주님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야수궁?”
“예.”
선두에 선 무사가 눈을 찌푸렸다.
“중원 놈들이 어찌 야수궁의 소개를 받는다는 말이더냐! 지껄인다고 다 말이 아니다!”
“정말입니다! 확인해 보시면 밝혀질 일입니다.”
재차 딱 잘라 주장하니 무사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백천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말에 틀림이 없겠지?”
“물론입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시에는…….”
그때였다.
“아, 빨리 들어가서 확인해 보시라고! 얼어 뒈지겠는데 언제까지 여기다 세워 둘 거야?”
그의 고개가 옆으로 획 돌아간다.
반쯤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떠는 청명의 모습에, 무사는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내쉬었다.
하지만 청명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딱 보니까 어차피 혼자 결정 내릴 급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괜히 서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얼른 갔다 와.”
사내의 얼굴에 옅은 살기가 어렸다.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저거부터 두들겼어야 하는 건데.’
왜 미리 입을 막아 두지 않았을까? 왜!
너무 때늦은 후회였다.
그런데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기다려라.”
“…….”
도발을 당한 것치고는 너무 고분고분한 반응이었다. 백천의 의아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사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말을 들어주는데?”
“당연하지.”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북해빙궁이 북해의 황궁 같은 곳이라면, 빙궁의 궁주는 저들에게는 왕과도 다름없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왕이 타국의 왕에게 연락을 받고 결정했을지도 모를 일을 일개 병사가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날 테니까.”
“아……. 급이 안 된다는 게 그런 말이구나.”
“그럼 무슨 말로 들었는데?”
“나는 그냥 네가 욕하는 줄 알았지.”
“…….”
청명의 눈썹이 슬쩍 경련을 일으켰지만, 백천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는 떳떳했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 아니던가. 청명의 입에서는 바른말이 나와도 바른말로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때 청명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숙.”
“응?”
“긴장해. 안에서 좋은 소식 안 들려오면 바로 칼질해야 할 테니까.”
그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제자들도 다들 안색을 굳혔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타탁.
안으로 들어갔던 이가 다급하게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모두 검을 거둬라!”
그의 명령에 북해의 무사들이 재빨리 납검했다.
“성문을 열어라! 궁주님께서 이들을 북해의 손님으로 받아들이셨다!”
무사들이 성문 쪽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실례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일이 좋게 풀린 모양이라 생각한 백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오라는 거로군.”
“…….”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며 올리는 게 보였다.
“좋지. 내가 먹이가 될지, 너희가 가죽이 될지는 봐야 아는 일이지만 말이야.”
비릿하게 웃은 청명은 열린 빙궁의 정문을 향해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