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5)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 자줏빛 띤 검을 가만히 비추었다.
살짝 주름진 손이 새하얀 천으로 검신을 천천히 닦아 내었다. 이미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하지만, 검을 닦는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치 하나의 숭고한 의식을 거행하듯, 닦아 낸 부분을 다시 닦아 내고, 광을 낸 부분을 더욱 문질러 댔다.
“……거 그러다 닳겠습니다.”
“크흠.”
날아드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현종이 낮게 헛기침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몰랐다.
현영이 작게 혀를 찼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좋다기보다는…….”
자하신검을 내려다보는 현종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조금 더 적절하겠구나.”
현영은 슬쩍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굳이 현종을 그 이상 타박하진 않았다. 화산인 장문인인 현종에게 화산의 신물이었던 자하신검이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예상이 가기 때문이었다.
현종은 가만히 하얀 천을 내려놓고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다만 한편으로는…….”
“예?”
검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유하기 그지없었다.
“신물이 화산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로구나.”
“…….”
“세상 모든 것은 나름의 이치를 품기 마련이다. 전란의 시대에 사라졌던 검이 이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에이. 뭘 또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십니까? 쫄딱 망했던 화산이 다시 잘나가게 되어 돌아온 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현영의 말에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신검이 뿜어내는 자줏빛이 눈을 감아도 그 앞에 어른거렸다.
이 검은 화산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검이다. 화산과 함께 수많은 일을 겪었고, 화산이 큰일을 겪을 때마다 언제나 선두에서 그 모든 업화(業火)를 받아 내었던 검이다.
“신물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다고 하지.”
“…….”
“늙은이의 걱정으로 끝난다면 좋겠구나.”
현종은 마침내 검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보며 현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현종의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장문인의 속을 헤아리는 건 평생을 함께해 온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참을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던 현종이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아이들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더냐?”
“그놈들이 언제 재깍재깍 연락할 때가 있긴 했습니까?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이건 도무지 고쳐지질 않습니다.”
“허허허. 그게 어디 아이들 탓이더냐. 서찰 하나 보낼 틈도 없이 닦달해 대는 놈이 있어서겠지.”
아이들을 휘몰아치고 있을 청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신물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다…….’
스스로 한 말이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신물이 그러하다면 사람 역시 그러할 터.
생기를 잃고 말라 가던 화산에 청명이 든 것 역시 그러한 이치 아니겠는가?
“북해라…….”
현종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햇살은 더없이 따사롭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는 이제 쌀쌀함을 넘어 차갑기까지 했다. 북해의 공기는 필시 이것보다 더 차갑겠지.
“아이들이 잘 해내겠지?”
“걱정도 팔자십니다. 어디 청명이가 우리를 실망하게 한 적 있었습니까?”
“그래서 걱정이구나.”
“……예?”
현종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슬프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아이들일 뿐이다.”
“…….”
“이제 나이가 찼으니 아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젊고, 아직은 더 배워야 할 나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벌써부터 화산이라는 큰 짐을 등에 지고 있구나.”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일에마저 관여하려 하고 있다.
흡사 미리 정해진 운명이 그러했단 듯, 굳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말이다.
“마교라…….”
질기고도 끔찍한 악연이다.
“마교는 지금껏 그 아이들이 상대해 온 이들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렇겠지요. 다름 아닌 그 마교니까요.”
“아이들이…….”
하지만 현종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현영이 먼저 입을 뗐다.
“장문인.”
“…….”
“본디 아이를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아이의 부모입니다.”
현종이 고개를 들어 현영을 바라보았다.
현영은 힘주어 말했다.
“잘 이겨 낼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현종이 가만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손질을 마친 자하신검이 들려 있었다.
“또 수련을 가십니까?”
“틈이 났으니 그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현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최근 장문인의 수련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재경각이 제 역할을 해 주고, 외부의 일은 은하상단이 맡아 주면서 생긴 시간을 수련에 할애하는 것이다.
“거, 뼈도 성치 않으실 나이에.”
“……아직은 단단하다.”
현종이 가볍게 웃었다.
“늙어 주책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고 싶단다.”
“주책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현영은 왜 그가 갑자기 수련에 매진하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만인방의 일이 현종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문도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장문인이 마지막에는 문도들에게 보호를 받았다. 제자들이 자신을 뛰어넘었음을 뿌듯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으나, 현종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제자들을 지키고 싶으신 거겠지.’
현영도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언젠가 죽어가는 화산의 제자들을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나약함 때문에 그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차라리 혀를 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살아 뜬 눈으로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장문인.”
“으음?”
“이왕 수련하실 거라면 운검이 놈과 함께 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놈도 요즘 무학을 재정립한다고 열심히…….”
“……괜찮다.”
“아니, 왜요? 함께 수련하면 더 수월하게…….”
“……괜찮대도.”
마치 떫은 감이라도 먹은 것처럼, 현종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떨떠름함이 피어 있었다.
“그놈이 하는 수련을 감당하기에는 내 뼈마디가 그리 여물지 않다.”
“좀 전에는 단단하시다더니.”
“끄응.”
현종이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하늘에서 소담스레 내리기 시작한 눈꽃들이 맞이해 주었다.
“……북해는 춥겠지.”
현종이 살짝 눈을 감았다.
‘고난이 너희를 너무 힘겹게 하진 않아야 할 터인데.’
아이들은 더 단단해져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맞이하는 화산 역시 그들이 떠날 때보다 더욱 강하고 넉넉한 곳이 되어 있어야 한다.
지친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 * *
“……어때?”
“뭐가요?”
“분위기 말이야.”
“보세요.”
백천이 살짝 떨리는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제 청명이 보여 준 모습이 괜히 백천을 불안하게 했다.
‘굉장히 심각해 보였는데.’
청명이 제대로 검을 들었을 땐 평소의 얼빠진 모습이 아니란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의 청명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니 불안할 수…….
“또 낚시야?!”
불안함을 애써 누르며 청명을 확인한 백천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아, 아니! 저…… 저놈이 대체 혜연 스님을 뭐로 취급하는 거냐?”
잠시나마 청명을 걱정한 자신을 책망하며 백천이 당장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붙잡았다.
“백천 시주. 저는 여기 있습니다.”
“응?”
획 돌아보니 정말로 혜연이 멀끔하게 서 있었다.
“어? 스님?”
“아미타불. 그, 다행히…… 저는 아닙니다만.”
“그럼…….”
백천이 떨리는 눈으로 다시 청명을 돌아보았다.
혜연이 물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안심이 되는 게 아니라 더 불안해졌다.
스님은 여기에 있는데 도대체 낚싯대가 왜 지난번과 비슷하게 생겼지……?
“……그럼 물에다 뭘 넣어서 낚으려는 거지?”
“그러게요.”
“빈 낚싯대는 아닐 텐…….”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화산 제자들의 동공이 일제히 확대되며 크게 흔들렸다.
“배, 백아!”
“아이고! 백아야!”
“저 미친놈이 기어코! 으아아아아!”
그새 백아에게 정이 단단히 들어 버린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눈물을 쏟을 기세로 청명에게 달려갔다.
저 미친놈이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지, 어찌 그리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한 것을!
“청명이 이 미친놈아! 백아, 우리 백아 어쨌냐!”
“응?”
일제히 우르르 달려오는 화산 제자들의 기세에, 청명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뭐야, 갑자기?”
“백아! 백아 어쨌느냐?”
모두의 시선이 간절했다. 설마, 도사가 아닌 그냥 인간이라도 그렇게까지는 못 할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 백아? 저 안에.”
청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얼음에 뚫린 구멍을 향해 턱짓했다.
“히이이이이이이익!”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백천이 황급히 달려들어 청명이 쥔 낚싯대를 움켜잡았다.
“아, 왜 이래!”
“야, 이 미친놈아! 사람이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지! 어떻게 그 쪼그만 걸 물속에다…….”
그때였다.
부글부글부글!
잠잠하던 수면에 기포가 마구 솟아오른다 싶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솟아올랐다.
“응?”
그리고.
파아아아아앗!
다시 한번 파도가 치는 듯 물이 일렁이더니 그 안에서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커다란 잉어가 솟구쳐 올랐다.
“으악!”
“헐?”
“저, 저게 뭐야?”
집채만 하다는 말은 과장이지만, 못해도 소만 한 크기였다. 영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용이 승천하듯 허공으로 솟구친 잉어는 크게 몸을 뒤틀더니 이내 빙판 위로 곤두박질쳤다.
텅!
얼음 위에 떨어진 잉어는 격렬하게 펄떡거렸다.
하지만 그 잉어는 백천과 그 일행의 시선을 잡아끌지 못했다.
물론 사람보다 더 커 보이는 잉어는 진귀하다. 하지만 설사 그 두 배는 더 큰 잉어라고 해도, 거대한 잉어의 대가리를 의기양양하게 한 발로 꾹 누른 작은 담비보다 더 진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청명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어어. 죽이지는 말고.”
키익?
“살려서 잡아 오라니까.”
키익!
앞발로 잉어를 짓누르고 있던 백아가 까만 눈을 반짝이다 재빨리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젖은 털을 세차게 털었다.
잉어를 내버려 둔 채 재빨리 청명의 발치로 도도도 달려가 달라붙는 얼굴에 애교가 가득했다.
“쯧.”
작게 혀를 찬 청명은 백아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가볍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젖은 털이 순식간에 말라 버리며 평소보다 더 보송보송해졌다.
“…….”
그 기괴한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저거 영물이었지.
청명 전용 난로 겸 목도리로 사용된 지 꽤 오래되어 잊고 있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집채만 한 범 싸대기도 쳐 날리던 놈인데.’
‘동물계의 청명이었지. 아니, 영물계의 청명이었나.’
걱정하고 노심초사했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한 마리 더?”
키이이익!
청명이 묻자 백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뒷발로 바닥을 콩콩 내리밟았다.
“두 덩이 떼 줄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을 번쩍인 백아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
와…… 저거 용감한 것 보소.
멍하니 보고 있던 조걸이 중얼거렸다.
“원래 담비가 생선도 잡아먹습니까?”
“원래 도사도 대가리를 깨지는 않으니, 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 뭐 다 떠나서 아무려면 어떠냐…….”
“……우문현답이네요.”
할 말을 잃은 백천은 백아가 사라진 얼음 구멍을 멍하니 보다 청명을 향해 물었다.
“청명아.”
“응?”
“……백아가 원래 물고기를 잘 잡는 거냐?”
“그래도 꼴에 영물인데 뭘 못 잡겠어?”
“…….”
그건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남만야수궁의 그 쟁쟁한 영물들을 하도 괴롭히고 때려서 그 야수궁주 맹소가 제발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던 놈이 백아다.
그런 놈이 뭘 못 잡겠는가?
하지만 이쯤 되니 새로운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럼 혜연 스님은 왜 물에 넣었던 거냐?”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저 땡중이 내가 저거 데리고 월척 좀 잡겠다는데,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느니, 인간의 길에서 너무 벗어나면 안 된다느니, 개소리를 지껄이더니 차라리 지가 물에 들어가겠다잖아.”
“…….”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땡중 소원 못 들어줄 것 있냐고.”
백천이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혜연이 세상 다 살아 버린 듯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눈가가 촉촉한 것 같았다.
“……아미타불.”
혜연을 향해 위로의 불호를 외어 준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물속에 들어가서 거의 영물급 물고기를 낚아 오는 담비가 잘못된 것인가? 그런 담비를 지키겠다고 기꺼이 얼음물에 몸을 던진 중이 잘못된 것인가?
‘그냥 청명이 놈이 잘못된 걸로 하자.’
그게 제일 속 편하니까.
그 순간 다시 수면이 뒤흔들리더니 백아가 조금 전보다 더 큰 잉어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입에 문 거대한 물고기를 획 던져, 먼저 낚아 왔던 물고기 옆으로 날린 백아가 청명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배를 까뒤집고 아양을 떨었다.
“그래. 네가 땡중보다 낫다.”
“…….”
백천은 그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될 대로 되라지. 빌어먹을.
“……그런데 갑자기 웬 낚시냐?”
“다른 마을도 있다며.”
“응?”
“보나마나 또 비실비실해서 숟가락 들 힘도 없을 텐데, 적당히 잡아 주고 가야지.”
청명이 턱짓으로 잉어들을 가리켰다.
“저만큼 큰 놈들이면 쉽게 얼지도 않을 테니, 적당히 싸 놓으면 다른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신선하겠지. 이것만 해 주면 우리는 더 해 줄 게 없어.”
백천이 잠깐 눈을 깜박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은?”
“응. 맞아.”
청명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이제 가자고. 북해빙궁인지 뭔지. 무슨 꼴이 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