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4)
쇄애애애애액!
청명이 쾌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지만, 저 멀리 거뭇한 점 하나는 확연하게 보였다.
‘이거 봐라?’
거리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나름 내력을 실어 경공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속도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지금 달아나는 이의 무위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쥐새끼가…….’
청명의 눈에 북해의 겨울보다 더 시린 살기가 어렸다.
쿵!
바닥을 박차는 순간 쌓여 있던 눈이 솟구쳤다. 그 거센 반동을 완전히 몸에 실은 청명이 한 줄기 빛살처럼 달려 나갔다. 쏟아지는 눈이 마치 벽이 된 것처럼 앞을 막아 왔지만, 청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헤치며 나아갔다.
이윽고 흑의인과 청명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앞쪽에서 달리던 흑의인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획 돌아보았다.
검을 뽑은 채 달려오는 청명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
사내의 무감정한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그가 막 다리에 더 힘을 실으려는 순간.
파아아아아앗!
섬뜩한 파공음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놀란 흑의인의 시야에 눈보라를 가르며 날아드는 반월(半月)형 검기가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예기를 품은 검기는 그의 몸을 두 쪽 내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큭!”
달리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사내가 바닥을 굴러 가까스로 검기를 피해 냈다.
눈밭을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그의 앞에 멈춰 선 상대의 발이었다.
“…….”
“일어나.”
차가운 목소리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음이라도 한 겹 씌운 듯 냉막한 청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이제 왜 남의 이야기를 엿들었는지를 설명해 봐. 아니, 그 전에…….”
청명이 눈에 한기가 어렸다.
“너…… 마교 놈이냐?”
“큭.”
마교라는 말을 들은 사내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청명과 마주 섰다.
얼굴을 가린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에서 섬뜩한 예기가 흐르고 있었다.
“중원인이로군.”
“…….”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우드드득.
소매 아래로 사내의 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기이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손을 본 청명의 눈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흑살마장(黑殺魔掌)”
흑의인이 순간 움찔했다. 지금까지 침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명백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의 물음에 청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교도로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흑의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 더러운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그리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어 청명의 얼굴을 향해 검게 물든 손을 휘둘러 왔다.
카앙!
하지만 그 손은 반쯤 뽑힌 청명의 암매검에 깔끔하게 가로막혔다.
“이놈!”
카드드득!
금속보다 더 단단해진 손이 검 날을 긁어 댔다. 청명은 입꼬리를 비틀며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붉은 검기가 치솟으며 흑의인의 손을 베어 냈다.
제 손이 검에 베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듯, 흑의인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흑의인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교 놈들이 이 먼 북해까지 와서 뭘 꾸미는 거지?”
“…….”
“뭐…… 좋아. 어차피 네놈들 입에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길 기대한 적은 없었으니까. 너희는 원래 그렇지.”
신념이 굳건한 이들은 어떤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길을 꺾지 않는다. 그 신념이 더없이 확고한 신앙이라면 굳이 말할 것도 없다.
흑의인은 슬쩍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마교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잘 알지.”
청명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기괴한 웃음이 나왔다. 가슴속에 언제 이토록 비틀린 감정이 자리 잡았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수많은 감정이 연신 소용돌이치며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으며, 청명은 씹어뱉듯 말했다.
“너무 잘 알아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지. 목을 내밀어라. 반가움의 표시로 깔끔하게 죽여 주지.”
흑의인.
아니, 복면 사이로 드러난 마교도의 눈이 새파란 살기를 발했다.
“더러운 불신자 놈이 입은 살았구나. 그 목이 잘려 나가고도 지껄일 수 있는지 보겠다!”
마교도가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와 기세였다.
검은 물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맹수가 단번에 수면 위로 뛰쳐나오는 듯, 은밀하고도 쾌속한 공격이었다.
스릉!
검을 완전히 뽑아낸 청명은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햇살을 받은 검신이 희게 빛났다.
한편 마교도가 휘두른 손이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수십으로 불어난 손 그림자는 검은 늑대 떼가 양을 몰아가듯 삽시간에 청명을 뒤덮어 왔다.
그 수많은 장영(掌影)을 상대하는 청명의 대처는 아주 간단했다. 수십의 손 그림자를 하나하나 일일이 쳐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러진 검이 날아드는 새를 떨구듯 마기를 품은 장영을 하나하나 깨부쉈다.
“뭣…….”
커다랗게 뜨인 마교도의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얼마나 검을 빠르게 휘두를 수 있어야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놀랄 시간도,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장영을 분쇄한 청명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읏!”
마교도는 이를 악물고 손을 휘둘렀다. 먹처럼 새카맣게 변한 그의 손이 섬뜩한 경기를 품고, 청명의 전방을 향해 쇄도했다.
카아앙!
검과 손이 맞부딪친 순간, 쇠와 쇠가 마주친 듯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카앙! 카아앙! 카앙!
검과 손이 허공에서 연이어 충돌했다. 하지만 청명의 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반면, 마교도의 검은 손은 청명의 검에 부딪힐 때마다 길게 갈린 상처가 생겨났다.
“이익!”
이 검이 신병(神兵)이라는 알아챈 마교도는 이를 악물며 손을 잠깐 물리려 해 보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으아아아아앗!”
마교도가 소리를 버럭 질러 대며 청명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흑살마장의 장력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
스치기만 해도 살을 썩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하나.
그 손은 청명이 간단히 휘두른 검에 맥없이 막혀 버렸다.
가가가각!
뱀이 나무를 타고 오르듯, 청명의 암향매화검이 마교도의 팔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흑살마장의 기운으로 보호받지 못한 팔뚝이 베였고, 상완이 길게 갈라졌다.
“큭!”
깊게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교도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반대쪽 손으로 청명을 후려갈기려 들었다.
그 손이 청명의 얼굴을 스치려는 찰나.
청명의 몸이 빠르게 빙글 회전하더니 외려 마교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퍼어어억!
검 손잡이의 끝부분이 마교도의 턱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걷어차인 공처럼 튕겨 나간 그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털썩.
“끄으…….”
바닥에 쓰러진 마교도가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힘겨워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하군.”
“…….”
“예전과는 비할 수도 없이.”
“……예전?”
청명은 굳이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가엾구나. 너희는 오로지 천마만을 따르는 존재. 천마가 없는 너희는 결국 신을 잃은 신도이고, 왕을 잃은 신하에 불과하지.”
마교도가 핏발이 선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모시던 신을 잃은 너희가 대체 왜 아직 망령처럼 세상에 남아 있는 거냐?”
“크흐…….”
그러자 마교도의 입에서 신음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
“그분은 돌아오신다. 아니…….”
마교도의 눈은 확신이 더해진 광기로 번들거렸다.
“우리가 그분을 세상으로 다시 모실 것이다!”
“미친놈.”
“천마재림(天摩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지른 그는 다시금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앗!”
그리고 팔꿈치까지 모조리 검게 물든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빤한 공격이었다.
“멍청한!”
청명의 암매검이 날아드는 손을 후려쳤다. 하지만 검과 손이 맞닿는 순간, 마교도의 손에서 마기가 치솟는다 싶더니 어느새 검날을 덥석 움켜잡았다.
가가가각!
매서운 날이 손을 가르고 난자했다. 하지만 마교도는 흡사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짓누르며 청명과의 거리를 좁히고 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지만 청명의 눈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차가워지고, 더욱 냉정해졌다.
서걱!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검기가 날을 잡은 손을 깔끔하게 베어 냈다. 잘린 손이 튕겨 오르듯 솟구쳤다. 눈밭 위로 검은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마교도는 손이 잘린 것조차 못 느끼는 것처럼 오로지 청명만을 노리며 성난 소처럼 돌진했다.
쇄애애애액!
멀쩡히 남은 좌수에 컴컴한 마기가 서렸다. 허공을 가르는 기세가 대단하여 흡사 검은 빛살 같았다.
턱!
바닥을 강하게 짓쳐 밟은 청명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비단 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교도의 왼팔이 어깨부터 잘려 나갔다.
“죽어라아아앗!”
하지만 손과 팔을 잃고도 마교도의 기세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오히려 눈의 광기와 살기는 더해져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청명에게로 달려드는 그에게 이지 따위는 없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손이 맹렬하게 허공을 뒤덮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명백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나.
파아아아앗!
장영과 장영의 틈새를 빛살이 꿰뚫었다.
“끅.”
가슴 정중앙에 틀어박힌 검은 날아드는 속도보다 더 빨리 회수되었고, 잇따라 마교도의 가슴을 찔렀다.
서걱! 서걱! 서걱!
이 와중에도 폭풍처럼 쏟아지는 장영의 틈새로, 암매검은 독사처럼 파고들어 적을 물어뜯었다.
가슴에 십여 개의 구멍이 뚫렸지만 마교도는 달려드는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푸욱!
청명의 검이 명치를 파고드는 순간 마교도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검을 자신의 몸에 완전히 박아 넣어 더 움직일 수 없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을 수였다.
하나 그가 상대하는 이 역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수쯤이야 몇 번이고 겪어 보았다.
청명이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달려드는 마교도의 정강이를 내리밟았다.
우드득!
발목 윗부분이 그대로 부러져 나가며 마교도가 휘청였다.
“끅…….”
서걱.
명치에서 뽑힌 검이 허벅지마저 검이 가르자 더 이상 의지만으로는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쿵!
마교도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복면 사이로도 보일 만큼 퉁퉁 부어오른 그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린다. 한 손은 반으로 잘려 나갔고, 다른 한 팔은 어깨부터 잘려 나갔다.
가슴에는 십여 개의 구멍이 뚫려 숨 쉴 때마다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벌써 열 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지만, 마교도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연신 중얼거렸다.
“……재림. 만마앙복…….”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마……재림. 만……마앙…….”
꾸욱.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검을 콱 움켜잡은 청명은 서느런 눈으로 마교도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이었으면 단숨에 그의 목을 날려 버렸을 테지만, 지금 그의 검은 망설이듯 떨리고 있었다.
“천마……재림…….”
마침내 마교도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숨이 멎은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그의 몸을 눈보라가 천천히 뒤덮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청명은 살짝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러 피를 떨쳐 내고는 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빌어먹을.’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아!”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천과 그 일행이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으냐? 너…….”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무어라 더 말하려던 백천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청명의 앞에 놓인 처참한 시신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이 사람은?”
“마교.”
“…….”
백천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상대한 이의 손속이 잔인한 게 아니다. 저 꼴이 될 때까지 싸운 쪽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정말로 있었구나…….”
모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청명은 시선을 돌려 마교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달라진 게 없어.’
여전히 저들은 천마를 광신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났음에도.
‘재림이라…….’
청명은 처참한 마교도의 시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씹어뱉었다.
“잘 봐 둬.”
“…….”
“이제 이런 꼴을 지겹도록 봐야 할 테니까.”
북해의 바람보다 더 차가운 한기가 화산 제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