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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73화 (473/1,567)

473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3)

탁자에 놓인 찻잔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모여든 화산의 제자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촌장은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연륜 있는 인물답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가 상대해야 할 이가 누군지를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건지요?”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야 빤하죠. 북해빙궁이요.”

빙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촌장의 눈가가 작게 떨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촌장은 어색한 웃음을 내걸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한낱 촌로에 불과합니다. 빙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에헤이. 이 영감님이 발을 빼려고 하시네.”

하지만 청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꺾어 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사람이 측간 갈 때랑 나올 때 심정 다르다고, 이제 다 치료됐다 이거예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서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럼 얼른 이야기해 보세요.”

청명의 재촉에 촌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차마 거절할 순 없는데, 또 그렇다고 북해빙궁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기엔 적잖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백천이 슬쩍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굳이 빙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마을의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부터 말씀을 해 주셔도 됩니다.”

당소소도 그런 백천을 거들었다.

“왜 다들 바깥출입을 삼가게 된 건가요?”

“그것이…….”

백천을 슬쩍 본 촌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니 답답한 듯 그는 탄식과도 비슷한 한숨을 토했다.

“본래 빙궁은 북해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과 같았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단숨에 달려와 도와주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해결을 해 주는 곳이었지요. 그렇기에 북해인들도 빙궁을 마음 깊이 믿고 따랐습니다.”

촌장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살짝 애환과 애수가 묻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명은 심드렁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그건 됐고요.”

이런 이야기는 이미 한이명에게 충분히 들었다.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건 무슨 이야기예요?”

그 물음에 촌장이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바로 앞에 화산의 제자들이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피게 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노인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반년 전쯤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실종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사람이라면, 어떤……?”

“딱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고가 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오면서 보셨겠지만, 북해는 척박한 땅입니다. 짐승들 역시 사납고 거칠지요. 밖으로 나갔던 이들이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불안한 듯 자꾸 문 쪽을 향했다.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은 결국 슬쩍 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누가 들어오더라도 대번에 후려 까 버리겠다는 듯이.

노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사라지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흔적이 남질 않는다는 겁니다. 짐승이 사람을 공격한 경우는 어떻게든 그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뒤져 봐도…….”

청명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사람을 끌고 갔다고?’

“흐으음.”

뺨을 가볍게 긁은 그가 물었다.

“빙궁은요?”

“…….”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실종되는 상황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빙궁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그 물음에 촌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빙궁에선…… 짐승의 짓이니 괜한 소문 퍼뜨리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쓸데없이 분위기를 흐리는 자들은 반드시 참할 것이라고…….”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제로 짐승을 사냥하고 겪는 이들은 바로 이 양민들이다. 빙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짐승의 습성을 이들보다 잘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며 돌려보냈다는 건, 너무 그 의도가 명백해 보였다.

가장 얼굴을 심하게 굳힌 건 당소소였다.

“정말 빙궁이 그렇게 나왔다고요?”

“……제가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의원님.”

당소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한 지역을 다스리는 위치의 이들은 절대 민심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물론 사천당가 역시 정파치고는 악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문파지만, 결코 성도의 사는 백성들을 겁박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민심이 떠나는 순간 당가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 척박한 곳에서 사람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위협하고 짓누르려 하다니…….

“개판이네.”

청명이 혀를 찼다.

북해빙궁이 원래 그런 곳이었다면 수백 년간 북해를 지배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그 반란을 일으킨 새 궁주라는 놈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때 백천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사라진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우리 마을에서만 서른이 넘소이다.”

“서른…….”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변에 이곳 말고도 다른 촌락들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 모두 이곳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촌장은 주름진 입술을 꾹 깨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모양이었다.

“그 전에 말씀하신 마귀들이 돌아다닌다는 그 말씀은…….”

“바로 그 마귀들입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억눌린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마귀들이 부쩍 보인 이후로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심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흐으으음.”

청명이 눈을 찌푸린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지?”

화산의 제자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마귀들이야 당연히 마교도들일 것이다.

빙궁은 눈처럼 흰 옷을 상징으로 입는다. 그러니, 북해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굳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흑의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청명이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 눈에 띄고 있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흑의인들을 피하기 위해서 집에만 틀어박혔더니 괴질이 왔다……. 평소 같았으면 중원과 교역이라도 해서 나름 신선한 음식을 얻었겠지만, 그것도 안 됐다는 거로군.”

가만 정리하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희한하게 흐르는 면이 있다. 제각각 일어난 일들이 한데 얽히며 원인이 되어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빚은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청명이 뭔가 놓친 걸 발견한 듯 촌장을 획 돌아보았다.

“다른 촌락들이 있다고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거기는요? 사정이 비슷하다면 그쪽도 분명 괴질이 돌고 있을 텐데?”

“딱히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소소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럼 당장 치료해야……!”

콩!

하지만 그 전에 청명의 손을 뻗어 꿀밤을 먹였다.

“네가 그렇게 나서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으니까 제발 흥분 좀 하지 마라.”

“그래도요…….”

“다짜고짜 흥분할 일이 아니야.”

당소소를 말리는 청명의 눈이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할 수도 있겠는데?’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빙궁이 양민들을 겁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 같았지만, 청명이 주목하는 지점은 조금 달랐다.

무파는 그 지역을 지켜 주는 양민들을 버릴 수 없다.

기본적으로 무파라는 곳은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와도 같은 존재니까. 이건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 현실이다.

애초에 스스로 밭 한 번을 갈지 않고 산에 처박혀 검이나 휘두르는 것들은 흙을 파며 살아가는 이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현 빙궁주가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나름 북해빙궁의 요직 출신일 텐데 그런 이가 이러한 이치를 모를 리는 없을 터.

그렇다는 건…….

‘북해빙궁이 완전히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의미겠지.’

이미 궁주는 마교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확인해 봐야겠어.’

조금 전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징그러운 것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청명아?”

“응?”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왜?”

“아, 아니……. 네 표정이…….”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아니면…….

‘무섭다?’

지금껏 청명에게서 거의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물론 화가 나거나 심각한 일을 겪을 때마다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을 보여 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의 것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흐음.”

백천의 시선을 받으며 청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촌장을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예?”

“빙궁에서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했는데, 항의하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아이고……. 저희가 어찌 감히 빙궁에 항의를 하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목이 달아납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렇습죠. 그렇습니다.”

“……네. 일단은 알겠어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과 다른 제자들이 넌지시 물었다.

“청명아, 이 일을…….”

“흐음.”

하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청명의 얼굴은 어느새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뭐, 빙궁에 가 보지 않으면 결론이 안 날 문제네. 할 건 모두 했으니 슬슬 빙궁으로 가 보지.”

“다른 마을은?”

“어차피 날 음식만 먹이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치료법을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치료법이 나왔는데 우리가 굳이 붙어 있을 이유가 없지. 정 문제가 되면 물고기나 좀 더 잡아 주고 가면 될 일이고.”

“더, 더 잡는다고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잠잠하던 혜연이 크게 기겁을 하며 말했다.

“시, 시주! 이번엔 저를 빼 주십시오!”

“왜? 힘들어? 중생을 구제해야 할 소림의 승려께서 설마 얼음물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실 테고?”

“그런 게 아닙니다.”

혜연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엄살을 좀 떨었을 뿐, 혜연쯤 되는 무인이 얼음물에 들어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길 리는 없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리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제가 잡은 물고기도 하나의 생명인 터. 불자가 되어 살생을 한다는 것이…….”

“너는 잡기만 하고 끌어 올리는 건 나잖아. 그리고 네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들 마음을 속이기가 어렵습니다. 아미타불.”

혜연이 연신 불호를 외며 말했다.

“다른 일은 얼마든지 할 테니, 이것만은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시주.”

절실한 그의 하소연에, 청명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살생하는 게 찝찝해서 안 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곰 가죽 그렇게 뒤집어쓴 시점에서 이미 의미 없는 소리 아냐?”

“…….”

“세상 어느 중이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니냐? 너 그런 중 들어 본 적 있어?”

혜연이 입을 쩍 벌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아, 아미타…….”

“어휴, 아미타불은 얼어 죽을. 짐승 가죽 뒤집어쓰고 다니는 중을 보시면 관음보살님도 여래신장으로 턱주가리를 후려 갈기실 텐데, 어디 아미타불을 찾아!”

“히, 히익.”

혜연은 정말로 당황한 듯했다. 자신이 뒤집어쓰고 있던 곰가죽과 청명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 보는 모양이 그랬다.

“그러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인데 전혀 눈치 못 챘네.”

“……다른 스님이 입었으면 바로 이상한 걸 알았을 텐데.”

심지어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 모습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이가 없었다. 스님이 짐승 가죽을 두르고 있는데, 그걸 당연하다고 느끼다니.

“……가족이네.”

“네. 친근해서 그런가 봐요.”

“동글동글한 게 귀엽기도 하고.”

어느새 혜연도 완전히 화산에 물들어 버렸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된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으. 으으! 내가 무슨 짓을!”

혜연이 다급한 손길로 곰 가죽을 벗으려 하자 윤종이 그의 어깨를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얼어 뒈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부처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

괴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연자실 주저앉는 혜연을 보며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그때.

움찔.

타박을 늘어놓으려던 청명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번뜩이는 눈으로 문 쪽을 휙 바라보았다.

그 갑작스런 반응에 모두가 의아해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새끼가?”

나직이 중얼거린 청명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머지가 모두 밖으로 나섰을 땐 이미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청명아!”

“뭐, 뭐야! 쟤 갑자기 왜 저래?!”

“쫓아갑시다!”

모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청명의 뒤를 따랐다. 이미 멀어진 청명의 뒷모습을 쫓는 그들의 얼굴에 서늘한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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