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5)
하루가 가고 이틀이 흘렀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소소야.”
백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좀 쉬어라.”
“아직 괜찮아요, 사숙.”
“사람을 고치는 이가 먼저 쓰러지면, 남은 이들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
“네가 멀쩡해야 병자도 살지 않겠느냐.”
“……그럼 조금만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질을 바라보며 백천은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의 가장 큰 집에 마련된 병소(病所)에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과 아이들이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당소소는 한시도 쉬지 않고 그들을 살폈다.
달인 약을 먹이고 쉴 새 없이 침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의 병세는 쉽사리 나아지질 않았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청명이 혜연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딱히 뭐 이상해 보이는 건 없었어.”
“확실한가요?”
“눈밖에 없어. 아, 얼음이랑.”
“…….”
혹시나 싶어 혜연을 바라보았지만, 혜연 역시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샅샅이 뒤져 보았는데, 원인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소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다가온 청명이 그녀에게 들고 온 그릇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좀 전에 달인 보약.”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먹였어요.”
“아니. 너 먹으라고, 너.”
“…….”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병자 같아. 너나 먹어.”
“괜찮…….”
“먹어!”
“먹으라고!”
“말 좀 들어 처먹어!”
사형제들이 일시에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지르자 당소소가 움찔하더니 마지못해 약그릇을 받아 들었다.
“머, 먹으면 되잖아.”
그리고 약을 단번에 꿀꺽꿀꺽 넘겼다.
“……써.”
혀를 쏙 내민 그녀는 살짝 복잡한 표정으로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이틀간, 저들은 당소소가 밤을 지새우면 함께 자지 않았고, 당소소가 바삐 움직이면 함께 쉬지 않고 도왔다.
정말 미련스럽지만…… 힘이 되었다.
미련스럽지만.
당소소의 앞에 걸터앉은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래. 좀 짚이는 게 있느냐?”
당소소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짐작 가는 바도 없느냐?”
“……네. 중원에서 이런 병은 본 적 없었어요.”
“으음.”
윤종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모르는 병세면 결국엔 치료도 어려운 게 아니냐.”
“……병세도 병세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증상이 없는 이들도 다들 심하게 굶주렸어요.”
“…….”
“이게 몸이 안 좋아서 생기는 병인지. 병이 생겨서 몸이 안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일단은 가져온 곡식으로 죽을 써서 나눠주고 있으니, 의식이 있는 이들은 차도가 좀 생기지 않겠느냐.”
“그럼 좋을 텐데…….”
말끝을 흐린 당소소는 양손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하지.’
무력한 기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열심히 의학을 배워 둘 것을. 이곳에 그가 아니라 아버지, 그러니까 당군악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니, 굳이 당군악까지 갈 것도 없이 의학을 제대로 배운 의원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무력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자책하지 마.”
그때 그녀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자 청명이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도 이뤄지지 않는 거라면 그건 사람의 책임이 아냐.”
“…….”
“거꾸로 말하면 자책이라는 건 할 수 있는 걸 모두 해 본 다음에야 꺼낼 수 있는 말이야. 넌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아니요, 사형. 아직…… 아직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자책할 시간에 고민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자책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만 후회는 오래도록 사람을 짓누른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
“예.”
당소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던 화산 제자들이 함께 머리를 쥐어짜며 의견을 내놓았다.
“……풍토병인가?”
“촌장은 이런 병을 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럼 정말 마교놈들이 일부러 병을 퍼뜨린 건가?”
“어…… 그건 아닐 거야.”
“응?”
모두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 새끼들은 그렇게 똑똑하거나 잡기에 능하지 않거든. 그냥 미친놈들이라.”
“…….”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지 않는가.
“그럼 대체…….”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이설이 입을 열었다.
“아냐, 역병.”
“응?”
백천이 유이설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사매, 그게 무슨 말이야?”
“역병은 약한 사람한테 더 옮아요.”
“그렇지.”
“촌장, 멀쩡했어.”
생각지 못한 말에 백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러고 보니…….’
촌장은 당장 내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약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는 병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게 역병이라면 왜 그처럼 나약한 노인을 피해 간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멀쩡한 노인이 몇몇 있었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백천은 새삼 놀라며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이더니.’
그 와중에도 자세히 주변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그 노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더냐?”
“모르겠어요, 그건.”
그런데 그때 청명이 대뜸 입을 열었다.
“어? 나 알 것 같은데?”
“응?”
백천의 고개가 부러질 듯 획 돌아갔다. 이건 유이설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다. 저 청명이 놈이 그런 걸 보고 있었다니.
“뭐냐?”
“노인인데 병에 안 걸린 사람들 말하는 거잖아?”
“그래!”
“부자야.”
“응?”
청명이 씨익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원을 그려 보였다.
“돈이 많더라고. 이 마을에서는 나름.”
“…….”
백천의 얼굴에서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바랄 걸 바라야지.’
모두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청명에게 기대를 접었다.
“아니, 표정들이 왜 그래?”
“아니다.”
“아미타불. 탓해 무엇 하겠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인 것을.”
“그럼 네 눈에는 우리가 다 대머리로 보이겠네? 어?”
“아, 아미타불! 이건 민 거외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모두가 청명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한 사람, 당소소만은 그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부자였다고요?”
“응. 나름 잘사는 것 같던데? 그래 봐야 촌로지만…….”
“……잠깐만.”
당소소가 혼자 뭔가를 중얼거렸다.
“부자라는 건 먹을 게 많다는 거고. 그럼 영양이…… 아니지. 굶주림 때문이라면 약과 죽을 먹이면 차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러더니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 거기, 잠시만요!”
“네?”
그나마 상태가 좋아 간호를 돕던 마을 사람 하나가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이 마을, 저희가 왔을 때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잖아요.”
“예, 그렇죠.”
“그게 괴질이 유행한 다음부터 그런 거였나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 전부터 그랬어요.”
“왜요?”
“……사람이 자꾸 실종이 되고, 외부에 검은 옷을 입은 마귀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생겨서 몇 달 전부터는 다들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이요? 그럼 그 전에는요?”
“그 전에는 평소처럼…….”
“머, 먹을 건 어떻게 하나요?”
“지금은 겨울이라 대충 말린 고기와 비축해 두었던 곡식으로 어떻게든 나고 있습니다.”
당소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거……?”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입을 서서히 벌렸다. 황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천이 조금 다급히 물었다.
“뭔가 생각난 것이 있느냐?”
“……생각은 났는데, 아니…… 이게 왜 양민들에게?”
“응?”
당소소가 벌떡 일어나더니 환자들의 상세를 다시 살폈다.
“……맞아. 맞잖아, 이거? 이, 이게 왜?”
환자들의 몸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본 그녀는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사, 사숙.”
“응?”
“이, 이게 이 사람들이 걸릴 병이 아닌데, 그런데 증상은 똑같거든요?”
“뭔 소리냐! 좀 제대로 말해 보거라.”
“이거…… 이거 폐관병(閉關病)이에요.”
“응?”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폐관병이라니, 그런 병도…….
“아앗!”
하지만 조걸은 들어 본 적이 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어? 그게 왜?!”
“그렇죠?”
“……이게 왜?”
둘이 왜냐는 물음만 주고받으니 답답해진 백천이 재촉했다.
“뭐냐! 같이 좀 놀라자!”
“사숙! 폐관병입니다, 폐관병!”
“그러니까 그게 뭔데?”
“폐관을 오래 한 사람이 걸려 나오는 병 말입니다!”
“……그런 것도 있어?”
조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쳤다.
“벽곡단 쌓아 놓고 몇 년씩 폐관 하는 명문세가 같은 곳에서 한 번씩 후기지수들이 걸려 나오는 병이에요! 귀신이라도 씐 듯이 무기력해지고,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잇몸이 무너지면서 이가 빠지고!”
“……증세가 완전 똑같은데?”
“그런데 이거 주화입마의 일종이라고 알려진 건데, 이 사람들이 왜……?”
백천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윤종을 보았다. 윤종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시선을 주고받은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소소과 조걸은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폐관병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병이잖아요? 후기지수 같은.”
“아니야, 아니야. 생각해 보면 폐관을 하는 나이 든 사람은 그냥 고수라서 병이 안 걸리는 걸 수도 있잖아.”
“아, 그러네요! 이 사람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으니까!”
그때, 청명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병이야?”
“네! 이게 다른 이름으로는 세가병이라고도 불려요.”
“왜?”
“벽곡단과 육포 같은 걸 엄청 쌓아 놓고 몇 년씩 폐관할 수 있는 곳이면 명문세가밖에 더 있어요? 그러니까 명문세가들의 후기지수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아……. 병이구나. 그게 병이었어.”
청명이 미묘한 표정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성 없다고 팼는데.’
미안하다, 사제들아.
나는 몰랐지…….
‘말을 하지 그랬니.’
아무리 말을 해 봐야 당시의 청명이 들을 리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치료법은 있어?”
“네! 엄청 간단해요.”
“뭔데?”
“채소요!”
“……엥?”
당소소의 얼굴은 이제 화색을 넘어 환희가 넘실거렸다.
“이 병은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 만큼 위험하지만, 그 치료는 너무 쉬워요! 신선한 채소나 날 음식, 아니면 과일을 먹이면 돼요!”
“아……. 그렇게 간단해?”
“네! 치료는 엄청 간단해요. 그냥 밥만 먹으면 나았거든요.”
“……그런데 채소가 약인 건 어떻게 알고?”
“나와서 몸 챙긴다고 고기만 먹은 사람은 죽었어요.”
“…….”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청명의 얼굴에 살짝 죄책감이 스쳤다.
“병이 정확히 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어요!”
당소소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깊은 고민이 해결된 순간이니 그럴 만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청명의 얼굴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아, 그래?”
“네!”
“그런데 그 채소는 어디서 구하고?”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당소소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네?”
청명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이 겨울에?”
“…….”
“이 눈밭에서?”
“…….”
“중원까지 갔다 오면 여기 사람들 다 죽었겠는데?”
“…….”
당소소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 안 돼…….”
차라리 범을 잡아 오는 게 나을 지경이다. 이 겨울에 북해의 어디에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만큼 채소나 과일을 구한다는 말인가?
기껏 찾았던 희망이 순식간에 지하까지 처박혔다.
아니, 차라리 병을 모르는 때가 낫다. 치료법을 알지만 쓸 수 없는 것보다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망연자실한 당소소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리는데, 잠자코 있던 유이설이 불쑥 말했다.
“다시.”
“……네?”
“치료법, 다시.”
당소소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채소나 과일.”
“그거 말고. 또?”
“네?”
“하나 더 있었잖아. 네가 말했어.”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화들짝 놀란다.
“날 음식!”
“그래.”
당소소가 눈을 크게 떴다.
폐관병은 명문세가에서나 볼 수 있는 병이라 웬만한 의원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명문 당가 출신인 그녀는 꼭 알아야 하는 병이었다.
대부분은 채소나 과일로 치료를 하니, 날 음식이라는 말은 당가의 의서에 쓰인 대로 외웠을 뿐이다.
“나, 날 음식이면…….”
“있잖아, 저기.”
유이설의 손이 창 너머를 가리켰다.
호수.
드넓은 북해의 호수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생선도 날 음식. 굽지만 않으면.”
“아!”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그 열렬하고 뜨거운 눈빛을 받은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청명아!”
“빨리 가서 잡아 와라!”
“많이! 최대한 많이!”
“신선해야 하니까 어떻게든 살아 있는 채로 잡아오세요! 어떻게든!”
청명이 더없이 밝은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형. 장문사형.’
이제는 이것들이 절 너무 자연스레 부려먹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산이 이렇게 거꾸로 돌아가도 되는 겁니까?
-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서 잡아 와, 인마!
……사형은 내가 선계 가면 두고 봅시다.
내 반드시 그 수염 다 뽑아 버린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