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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68화 (468/1,567)

468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3)

“……미치겠네.”

“가도 가도 끝이 없네.”

화산의 제자들이 끝없이 펼쳐진 얼음의 호수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이미 두 번이나 섬서와 사천을 왕래해 본 경험이 있다. 심지어 그중 한 번은 더 먼 운남까지도 다녀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는 나름 주변이 변하는 맛이라도 있었다. 같은 거리라도 풍경이 달라지고, 경관이 바뀌는 것을 보면 꽤 멀리 왔다는 실감을 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썩을 놈의 호수는 가도 가도 그 모습이 그 모습이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눈 덮인 산과 들. 그리고 얼음밖에 없다. 흡사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광? 전율이 느껴질 만큼 광활하고 눈부신 전경?

그것도 처음 볼 때나 그랬지. 몇 날 며칠 같은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신물이 나다 못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간간이 눈보라가 불어서 시야가 막히면 그마저도 사라지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롭다 여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숙.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겁니까?”

“……달린 시간을 감안하면 거의 온 것 같은데.”

조걸의 물음에 백천도 지친 눈빛으로 앞쪽을 응시했다.

의외로 몸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고 진흙탕까지 지나야 하는 중원과는 달리, 이 끝없는 얼음 호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지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얼음 위를 달리는 데 익숙해진 이후부터는 오히려 더 빠르게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도착은 하는 겁니까?”

“……이제 하얀 것만 봐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처음에는 예뻤는데.”

“그죠? 사고? 저도 처음에는 좋았거든요?”

북해에 온 지 대충 열흘 만에 왜 사람들이 따뜻한 남쪽나라를 부르짖는지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백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지금껏 수레를 끌면서 힘들다고 꿍얼댄 적은 있어도, 지겹다고 불만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그런 녀석들이 이리 말이 많아지는 걸 보면 북해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을 거다. 다들 힘을 내라.”

“예, 사숙!”

“알겠어요, 사형.”

백천 역시 지친 정신을 다잡고 수레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고개를 쭉 뺀 조걸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친다.

“어! 저기!”

“뭐가 있느냐?”

“사숙! 저쪽 보십시오. 저거 민가 아닙니까?”

“음?”

백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구나.”

눈보라가 잦아든 덕분인지 앞쪽이 확 트여 보였다. 삐죽이 솟아 있던 산들이 점차 낮아지더니, 비탈 아래로 빽빽이 모여 있는 오두막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이군.”

“민가예요!”

거의 열흘 동안 마을을 보지 못한 백천들은 사막에서 감로(甘露)를 본 것처럼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사숙! 가 보시죠!”

“오냐.”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레의 방향을 틀었다.

조걸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음…….”

윤종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흐으음.”

화산 일행은 모두 미묘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두막.

중원과는 달리, 나무로 만든 가옥들이 좌우로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중원의 어촌에서 보이는 형태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물론 가옥의 형태는 다르지만 말이다.

다만 중원의 어촌과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이 없네?”

“그러게요?”

집은 줄지어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모두 떠나고 집만 남겨져 있다?

아니. 그런 것도 아니다.

집집마다 솟아 있는 굴뚝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에서 불을 떼고 있다는 소리였다.

“원래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추우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한 사람도…….”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반적인 느낌이 뭔가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분명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임에도 생기나 활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병이 돈 마을이 딱 이랬거든요.”

“그럼 정말 역병이라도 돈 게 아닐까요?”

“역병은 무슨 역병이야. 이 추위엔 역신도 얼어 죽게 생겼구만.”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이설이 가만히 말했다.

“일단 두드려 보죠. 문.”

“음. 그러자꾸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보이는 집으로 다가갔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계십니까!”

쿵쿵쿵쿵!

“계십니까!”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백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다른 집으로 가 볼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있는 다른 집도 몇 군데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여기 대체 뭐야?”

조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북해인들은 인심이 좋다고 했었잖습니까? 인심이 좋기는커녕 각박할 지경인데요.”

조걸의 말에 윤종이 눈을 찌푸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라. 외지인의 방문이 드문 곳이니 경계가 심할 수도 있다. 그 처지가 되어 보지 않고서 쉽게 말하는 게 아니다.”

“……예.”

하지만 윤종 역시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영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집 안에 분명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렇게까지 대답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사형. 더 두드려 봐요. 두어 곳 정도만.”

“음. 그러자꾸나.”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우니 백천도 다른 집으로 향했다.

“계십니까!”

대신 조금 전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지나가던 객입니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몇 가지 여쭐 게 있어서 그러니 문을…….”

벌컥!

그리고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문이 바로 열렸다.

“아. 감사…….”

하지만 감사를 표할 새도 없었다. 백천은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열린 문 안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던 백천은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다시 손힘을 풀었다.

커다란 식칼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그걸 들고 있는 이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였다. 식칼을 잡은 앙상한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또…… 또 누굴 잡아가려고! 이 지옥에 떨어질 놈들!”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파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칼을 휘둘렀다.

백천은 적잖이 당황하여 살짝 말을 더듬었다.

“저, 저희는 그런 이들이 아닙니다. 그저 길을 잠깐 물으러 들렀을 뿐입니다.”

“누가 그런다고 속을 줄 알아?”

발작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노파의 행동에 백천이 기겁을 하며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다 늙은 노파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할머님.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썩 꺼져!”

쾅!

문이 거세게 쾅 닫혔다. 백천은 얼이 빠진 얼굴로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뭔 일이야.”

“누굴 잡아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인신매매라도 벌어진다는 건가?”

화산 제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껏 여러 도시를 방문했지만,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곳은 처음이었다.

“아미타불.”

혜연이 몇 번 불호를 외더니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단순히 외지인이라 박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백천이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혜연의 말처럼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청명아.”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청명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할 테냐?”

“흐음.”

청명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동룡이 얼굴도 안 통하는 걸 보면 상황이 심각하긴 한 모양인데.”

“이게 지금 그런 농담을 할 상황이냐, 인마?”

“농담 아닌데?”

“…….”

백천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막 발작하려 할 때, 청명이 깔끔하게 선수를 쳤다.

“그냥 가자.”

“……그냥?”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기는 하지만…….”

청명은 잠깐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린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야. 우리가 별생각 없이 한 행동 때문에 이 사람들이 더 곤경에 처할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무거웠다.

“알겠다.”

백천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사숙, 정말 괜찮을까요?”

윤종의 말에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를 겁내는데 뭘 어쩌겠느냐?”

“사람이 사람을 겁낸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습니까?”

“…….”

백천의 시선이 마을을 한차례 느리게 훑었다.

“……네 맘은 알겠지만, 청명의 말이 틀리지 않다. 우리는 외지인이야. 괜히 우리가 나섰다가 오히려 문제가 커질지도 모른다.”

“……예.”

“일단은 빙궁을 찾아보자꾸나.”

백천이 막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외, 외지에서 오셨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 오두막 뒤쪽에 반쯤 몸을 숨긴 사람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채 몸을 다 내놓지 않고, 내민 머리도 연신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예, 저희는 중원에서 왔습니다.”

“주, 중원!”

중원이라는 말을 들은 사내는 불에 덴 듯 기겁하며 다시 후다닥 오두막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몇 가지를 물으러 왔을 뿐입니다.”

“중원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오! 다, 당장 나가시오! 당장!”

“저희는 북해빙궁을 찾아왔습니다.”

“비, 빙궁을?”

사내가 다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북해빙궁의 허가를 받은 것이오?”

“정확하게 말하면 허가를 받은 게 아니라,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빙궁이 저희를 박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내의 눈에 잠깐 의심이 어렸지만, 이내 조금 풀어진 듯 몸을 조금 더 내밀었다.

“하기야…… 빙궁의 허락을 구한 이가 아니라면 이 겨울에 이 북해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 생각이 있는 이라면.”

“…….”

백천이 슬쩍 제 사제들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뻔뻔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천의 마음이 절로 훈훈해졌다.

‘어디서 이리 사기꾼 같은 철면피들만 모였을꼬.’

사기꾼들이 화산에 입문한 것인지, 화산이 사기꾼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아니……. 이거 어느 쪽이어도 문제구나.

“예. 호수를 따라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이쯤이면 빙궁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빙궁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빙궁은……. 쿨럭! 쿨럭!”

그런데 말을 하려던 사내가 갑자기 격렬히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 쿨럭! 괜찮소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쿨럭!”

사내가 온몸을 들썩이며 기침을 한 순간, 무언가 하얀 것이 튀어나와 땅에 툭 떨어졌다.

“헐?”

“이, 이가 빠진 건가?”

화산 일행은 반사적으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입을 가린 사내가 기침을 할 때마다 핏물이 흘러나왔다. 새하얀 눈 위에 피가 점점이 흩뿌려졌다.

이가 빠졌으니 피가 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사내의 창백한 안색과 앙상한 몸을 보며 그리 생각하는 건 쉽지 않았다.

“……괴질(怪疾)인가?”

“거, 거 보십시오! 역병이라니까요!”

조걸이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소리치자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려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소소야.”

“네.”

당소소가 다급하게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가만히 있어 봐요! 전 의원이에요!”

당소소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내가 움찔했다. 평소의 그녀는 그저 장난기 있고 발랄한 성격이지만, 부상자나 병자를 앞에 둔 당소소는 그 누구보다 엄해졌다.

사내를 진맥하고 그의 입을 살짝 벌려 본 당소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이 마을에서 같은 증상 있는 사람이 또 있어요?”

“예? 예에……. 두, 두 달 전쯤부터…….”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그녀가 대뜸 물었다.

“문 열어 주실 수 있죠?”

“……예?”

“마을 사람들 모두 확인해 봐야 해요. 아저씨가 설득해서 문 좀 열어 주세요! 빨리!”

곁에서 보고 있던 백천이 조금 더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무슨 병이냐?”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무슨 병이든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요. 더 많은 환자를 보고 확인을 해 봐야 해요.”

“…….”

“어서요!”

“아, 알겠소.”

그들은 사내를 앞세우고 가까운 집 쪽으로 달렸다. 모두의 얼굴이 더없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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