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2)
사로잡힌 빙궁도들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청명의 주장은 반만 받아들여졌다.
당소소가 챙겨 온 산공독으로 그들의 내력을 금제하고, 튼튼한 밧줄로 묶어 창고에 처박는 수준에서 깔끔한 제압이 이루어졌다.
청명은 저런 것보다는 깨어나는 족족 뒤통수를 까는 게 안정적이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던가.
여하튼 그렇게 빙궁도들을 처리한 화산의 제자들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화로 주위에 둘러앉았다.
“쿨럭!”
“아버지…… 괜찮으세요?”
“으으음.”
몇 번 기침을 토한 홍이명이 손을 뻗어 홍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아이를 안심시켰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조금 지친 것뿐이란다. 내가 지금 기침이 조금 심한 것 같으니 달여 마실 소열초(消熱草)를 구해 올 수 있겠느냐?”
“금방 캐 올게요!”
“그래, 부탁한다.”
홍진보가 재빨리 방한복을 다시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겠습니까? 이 겨울에 약초를 캔다니…….”
“소열초의 뿌리는 한겨울에도 캘 수 있소이다.”
“하지만 이 눈밭을 어찌…….”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게 좋소. 아직 저 아이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니.”
홍이명은 아이가 나간 문 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길게 끌 것 없이 이야기하지. 내 본명은 홍이명이 아니라, 한이명이라고 하외다.”
홍이명. 아니, 한이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북해빙궁의 궁도였소. 빙호(氷狐) 한이명이라는 이름으로, 북해에서는 나름 명성을 떨쳤다오.”
“그럼…….”
한이명이 백천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나는 전대 궁주를 모시는 몸이었소.”
“역시.”
빙궁의 궁도들이 한이명을 쫓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뿐이리라.
“그런데…… 전대 궁주를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아직까지 어른을 추격한단 말씀이십니까? 보아하니 다 내려놓고 초야에 묻혀 사시는 것 같은데.”
백천의 말에 한이명은 조금 쓰게 웃었다.
“도장께서는 꽤 말을 돌려 하실 줄 아시는구려.”
“…….”
“이제 와 뭘 숨기겠소이까. 다 말씀 드리겠소. 조금 전 말씀하셨다시피 저들은 나를 쫓는 게 아니라오. 진보를 쫓는 것이지.”
“저 아이가…….”
“그렇소.”
한이명이 무겁게, 더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저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오.”
무척 큰 비밀을 이야기하는 듯 침중한 어조였다. 하지만 정작 들은 이들의 반응은 딱히 대단할 게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말이라도 들은 양 뚱해 보였다.
한이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놀라지 않았소?”
“굳이요?”
“…….”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하지.”
“너무 빤하잖습니까. 일단 둘이 너무 안 닮았는데.”
“그러게. 쟤는 좀 잘생겼잖아.”
“…….”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한이명에게, 백천이 결정타를 넣었다.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그걸 모를 수가…….”
그런데 그때.
“뭐? 아들이 아니라고?”
“…….”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화로 앞에 딱 달라붙어 불을 쬐고 있던 청명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편견이 없는 건지…….”
“……눈썰미가 없는 거지.”
“눈도 없을지 모르죠.”
화산 제자들이 속이 터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이명이 살짝 표정을 가다듬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하나…… 그 아이의 비밀은 그게 전부가 아니외다.”
그의 눈이 더없이 단호해졌다.
“놀라지 마시오. 저 아이의 진짜 이름은 홍진보가 아니라 설유백(雪惟白)이오. 저 아이가 바로 전대 궁주의 아들이자, 북해빙궁의 정당한 후계자요.”
그러자 화산의 제자들이 뚱한 얼굴로 말없이 그를 보았다.
한이명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소?”
“빙궁의 무사들이 노인장보다 애를 더 신경 쓰던데요.”
“그럼 그럴 만도 하죠.”
“……바보가 아니고서야 무슨 사연이 있다는 걸 모를 수가…….”
하지만 그때였다.
“뭐? 걔가 전대 궁주의 아들이라고? 세상에!”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깜짝 놀란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바보가 있긴 있네.”
“그냥 남한테 극단적으로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 그게 맞을지도.”
모두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아이가 지금 궁주의 조카가 되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한이명의 눈빛이 어둑어둑해졌다.
“현 빙궁의 궁주인 설천상은 빙궁도들의 완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저 아이의 존재가 더없이 거슬릴 수밖에. 언젠가 저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자리를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백천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이명의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전대의 궁주가 선정을 베풀었고 북해인들의 마음이 여전히 그에게로 향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전대 궁주의 아들이 나타났을 때 그를 지지할 확률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으음.”
분위기가 살짝 심각해졌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한이명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럼…….”
청명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한이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아까 걔가 북해의 왕자 같은 건가요?”
“……왕자라기는 좀 그렇지만…….”
“호오?”
청명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어렸다.
그 표정을 본 백천의 마음에 불안이 스쳤다.
‘저건 저놈이 나쁜 생각 할 때의 얼굴인데?’
대체 뭘 하려고…….
“그럼 북해의 사람들은 여전히 전대 궁주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건가요?”
“……그렇다네. 그걸 알기에 설천상이 저 아이를 끊임없이 찾아내려 하는 게지.”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나갔던 설유백이 눈을 털며 들어섰다.
“아버지. 소열초가 근처에 있었…….”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몸을 날렸다. 그러더니 설유백을 덜렁 들어 자신의 옆구리에 끼고는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야, 인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청명은 외침들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설유백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북해빙궁의 후계자라 이거지?”
“야! 그 말은 하면 안 된다잖아!”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설유백은 당황하여 청명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욕심이 뚝뚝 묻어나는 청명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아이는 영문을 모르고 몸을 떨었다.
“도, 도장?”
“흐흐흐흐.”
청명이 군침 도는 듯 입맛을 다셨다.
“요걸 어떻게 써먹지?”
요리조리 사람을 돌려 보는 게 숫제 물건을 품평하는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기겁하며 말렸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애부터 내려놔, 인마!”
“사숙, 사숙!”
“응?”
“이거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어디다 써먹어?
“……청명이 일단 침착해라.”
“아니, 뭐……. 정 쓸데없으면, 빙궁에 가져다주면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 미친놈아!”
“제발 좀 사람답게 굴라고, 사람답게!”
설유백은 이제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청명은 결국 입맛을 다시며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쩝……. 아무래도 아쉬운데.”
설유백은 풀려나자마자 전력으로 달려 한이명의 뒤에 숨었다. 그 겁먹은 눈망울을 본 모두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양심의 가책이…….”
“미리 감금시켰어야 하는 건데.”
맹견을 목줄 없이 풀어놓았다가 아이가 개에게 물리는 걸 본 기분이었다.
더 이상의 불상사(?)는 막겠다는 듯, 유이설과 당소소가 입맛을 다시는 청명의 앞쪽을 슬쩍 가로막았다.
“저 아이가…….”
백천은 겁먹은 눈으로 눈치를 살피는 설유백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았다.
짐작은 하고 있지만, 사실을 듣고 나니 사람이 조금 달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마교 때문에 집을 잃은 아이라.’
미묘하게 화산의 상황과 조금 겹쳐 보였다.
아, 물론…….
“너 혹시 빙궁 구경 가고 싶지 않니?”
“아, 좀 꺼지라고! 이 미친놈아!”
“이게 미쳐 가지고! 애를 유괴하려고!”
“빙궁보다 네가 더 무섭겠다!”
“아미타불! 마구니가 낫지! 마구니여, 그간 비교하여 참으로 미안하외다!”
……청명은 전혀 아닌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헛기침을 한 백천은 화산을 대표하여 한이명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닐세. 보아하니 그대들도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으니.”
그새 청명이란 인간을 거의 파악해 버린 한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면,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위험할 텐데.”
백천의 물음에 한이명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렇게 우둔하진 않네. 북해빙궁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처지에 은신처를 한 곳만 두었을 리 있겠는가. 이제 새로운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니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아……. 그럼 다행입니다.”
백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찝찝했던 마음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나는 이만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
그 축객령 아닌 축객령에 화산의 제자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이명은 몸이 불편한 듯 확실히 전보다 움직임이 느렸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신데.”
“괜찮네. 이정도야.”
한이명이 빙그레 웃었다.
“수년 간 빙궁의 추적을 피하느라 이런 일은 심심찮게 겪었다오. 이번은 무척 위험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리 걱정할 것 없네.”
한이명이 화산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괜한 일에 말려들게 했으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혹여나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그건 걱정 마세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돕기로 한 것도 우리고,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우리니까요.”
“……감사하외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사양하겠소.”
“에이, 왜요.”
“절대 사양하겠소.”
만난 이후로 가장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한이명이었다.
“그럼…….”
“살펴 가시오. 그리고 빙궁에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해 주길 부탁하오.”
“혹여 말이 나온다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감사하겠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뵙겠습니다.”
화산 일행이 수레를 끌며 한이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숙, 창고에 박아 둔 빙궁도들은 괜찮을까요?”
“소소야. 산공독이 며칠 정도 지속되느냐?”
“해약이 없으면, 못해도 칠 주야는 갈 거예요.”
“……그 정도면 죽진 않겠지?”
“설마요.”
“에이. 그렇지. 그래도 무인인데 설마 칠 주야 묶어 놨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 대화를 가만 듣던 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보통은 죽지, 보통은! 이 마귀 같은 것들아!‘
어찌된 것이, 이 양반들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가?
자신도 이들에게 물들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걱정되는 혜연이었다.
물론…… 이미 늦은 걱정이었지만.
“칠 주야라……. 저들보다 먼저 빙궁에 들어야겠구나. 오해가 있었다고 하면 되겠지.”
“네. 사람이 상한 것도 아니니 야수궁주의 소개를 받고 온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손을 흔드는 한이명과 그 옆에 선 설유백의 모습을 보며, 백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이한 인연이군.”
“그러게요.”
미묘한 안쓰러움에 자꾸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진짜 빙궁 가 보고 싶지 않아?”
“저, 저 미친놈이!”
“……빨리 가죠, 사형. 이러다가 진짜 애 유괴하는 꼴 보겠어요.”
“아무리 미쳐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확신하세요?”
“……빨리 가자.”
수레가 격하게 출발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짐 더미 위에 올라탄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멀어지는 한이명과 설유백을 빤히 보았다.
‘후계자라…….’
- 그대가 매화검존이오?
“어쩐지 더럽게 닮았더라.”
청명은 짐 더미에 머리를 툭 기댔다.
홍진보의 얼굴은 과거 그가 보았던 북해빙궁주를 틀에 박아 찍은 것처럼 생겼다.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과연.
‘불쌍하긴 하지.’
마교의 행사는 후환을 남기지 않는 걸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전대궁주의 다른 가족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저 아이는 가족 친지 하나 없는 처지고, 유일하게 남은 친지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숙부뿐이라는 뜻이다.
청명은 이제 점처럼 완전히 멀어진 설유백의 모습을 보았다.
“흐음.”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뭐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가 품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더니 백아를 쏙 꺼내 들었다.
“기억했지?”
백아가 까만 눈을 빛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라면 찾을 수 있지?”
다시 한번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못 찾기만 해 봐. 아주 목도리를 만들어 버릴 테니까.”
청명이 씨익 웃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재미있는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