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1)
“끄윽!”
“끅!”
짧은 신음과 함께 빙궁의 궁도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럴 때마다 초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솟았다.
제 절반도 살지 않았을 듯한 어린놈들에게 쓰러지는 수하들을 차마 욕할 수도 없었다. 지금 그도 눈앞에 있는 허여멀건 놈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
초겸이 살짝 움찔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력 차는 명백했다. 저놈이 그를 상처 없이 제압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초겸은 이미 숨이 끊겨 북해의 바람에 차게 식어 가고 있을 터였다.
“이놈들…….”
그가 분노와 당혹으로 얼굴을 붉히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서 있는 건 그뿐이었다.
“감히 북해에서 빙궁의 무사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쪽이 먼저 건드리셨는데?”
“닥쳐라!”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는 청명이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초겸은 두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았다.
“단 한 놈도 북해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처절히 후회하며 죽어 가게 해 주겠다!”
“그 실력으로는 무리실 텐데.”
“빙궁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너희를 천참만륙하여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의 밥으로 줄 것이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의 위협을 듣던 백천의 눈빛이 살짝 묘해졌다.
“……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긴 합니다만.”
“뭐냐?”
“그런 말을 들으면 곱게 보내 드릴 수가 없잖습니까.”
“…….”
어느새 윤종과 조걸이 슬그머니 좌우로 나서서 초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곤란한데.”
“쓱싹(?) 해 버릴 수도 없고.”
초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중원 놈들이 비열한 웃음을 띠며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포위해 오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거기에 소름 끼칠 만큼 무감한 얼굴로 뒤를 틀어막는 여검수까지 확인한 초겸은 이를 꽉 사리물었다.
그리고 굳게 마음을 다지며 눈을 번뜩였다.
파아아아앗!
포위망이 완전해지기 직전, 그는 섬전처럼 몸을 날렸다. 조걸이 반사적으로 검을 찌르려 했지만, 부상을 불사하며 역으로 도를 휘두르는 초겸을 차마 찌르지 못했다.
조걸을 따돌린 초겸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속도를 높였다.
“너희는 북해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초겸을 보며 조걸이 다급하게 물었다.
“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의외로 백천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초겸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 아니! 사숙이 아니라 누구라도 말입니다!”
“쫓긴 해야지.”
백천이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뭐,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싶네.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하니까.”
“예?”
“……죽이지는 않겠죠?”
“그러길 바라야지.”
백천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냥 여기서 쓰러지는 게 나을 텐데 말이야.”
그의 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쇄애애애액!
초겸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길을 쾌속하게 나아갔다.
‘어디서 저런 놈들이……!’
패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만한 실력을 가진 이들이 단체로 북해로 들어왔다는 건 분명 무슨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한이명과 함께 있었다.’
한이명 자체야 별문제 될 게 없지만, 그가 보호하고 있는 어린놈의 존재는 북해에 커다란 우환이 될 수 있다.
저 중원 놈들이 그걸 노리고 한이명과 함께 있는 거라면 당장 조치를 취해야 했다.
“어떻게든 빨리 궁에 가서…….”
“궁에 가서요?”
“당장 알려야…….”
어?
초겸의 고개가 부러질 듯 위로 꺾였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맑고 투명한 하늘이 아니라, 검고 어두컴컴한 무언가였다.
‘이게 뭐…….’
응?
신발?
콰드드드득!
전력으로 달리던 초겸의 얼굴에 동그란 털신발의 밑창이 틀어박혔다.
“끄…….”
초겸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추락했다.
털썩.
쌓인 눈 속으로 푹 파묻힌 그의 몸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푹.
눈밭에 내려선 청명이 양손으로 몸을 감싸며 이를 달달 떨었다.
“어우! 추워 뒈지겠네, 진짜!”
안 그래도 추운데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오느라 체온이 더 떨어졌다. 청명은 원독에 찬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초겸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래도 칼 좀 휘둘러 봤다는 놈이 수틀렸다고 쪽팔리게 도망을 쳐?”
“…….”
“하여튼 요즘 것들은 강단이 없어, 강단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끄으으.”
초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이…… 이놈이!”
그는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우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할 말을 잃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전신에 털가죽을 뒤집어쓰다 못해 둘둘 말아 놔서 거의 동그란 모양새를 보니 위기감과 황당함이 동시에 밀려든 것이다.
저 우스꽝스러운 꼴로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나름 신법에는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북해의 설로를 달리는 건 일반적인 길을 달리는 것과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러니 평범한 신법으로는 그를 따라올 수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놈이 특별히 빙궁의 신법을 익혔을 리는 없잖은가?
초겸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며 도를 들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놈을 쓰러뜨리고 빙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보자보자 하니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구나!”
“뭐 그렇게 우습지는 않고.”
“뭐?”
“그냥 좀 만만한 정도?”
“…….”
자존심을 아예 박살 내는 그 말에 초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대대로 내 버르장머리는 고친 사람이 없다는데 그러네. 포기 좀 해.”
청명이 피식 웃으며 팔을 뒤로 뻗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더듬.
“어? 이거 어디…….”
더듬더듬.
“아…….”
옷을 너무 두껍게 입어서 검을 못 찼었지?
깜빡하고 두고 왔네.
청명이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초겸을 보았다.
“저, 죄송한데…… 금방 가서 검만 좀 가져오면 안 될까요?”
“되겠냐?”
초겸이 두말없이 청명에게 달려들어 도를 내리쳤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기운이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죽어라아아앗!”
극한의 음한지기(陰寒之氣)를 품고 휘둘러진 도가 청명의 정수리를 향해 그대로 쇄도했다.
“아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청명이 날아드는 도를 막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초겸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
검수가 검을 두고 다니다니. 이런 한심한 짓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게다가 당장 줄행랑을 쳐도 모자랄 판에 맨손으로 도를 막겠다고?
‘멍청한 놈은 약도 없는 법이지!’
초겸의 도는 금방이라도 일 격에 청명을 쪼개 버릴 듯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청명의 손과 그의 도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초겸은 자신의 도가 청명의 손을 순식간에 양단해 버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덥석!
“억?”
초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의 도가 너무도 깔끔하게 청명의 손에 잡혀 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전력으로 휘두른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잡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잡힌 도를 당겨 보았지만, 청명의 손에 잡힌 도는 마치 거인에게 붙들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놀란 심장을 달랠 생각도 못 하는 그의 귀에 심통이 가득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인정이 좀 있어야지! 내가 검 좀 가지고 오겠다는데 치사하게 그걸 막아?”
“…….”
“에라!”
콰아아앙!
청명이 그대로 초겸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버렸다.
발이 얼마나 강하게 틀어박혔는지 초겸의 몸은 잠깐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차마 눈 뜨고는……. 아니, 귀를 열고는 들을 수 없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털썩!
땅에 그대로 곤두박질친 초겸은 아예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쯧.”
청명은 짜증 어린 얼굴로 터덜터덜 다가가 허공으로 애처롭게 들린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끄응. 저기까지 또 어떻게 가나. 어휴, 추워!”
질질질질.
새하얀 눈 위로 긴 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초겸의 몸으로 그은 긴 선이.
“저기 오네.”
“……보라니까. 사냥개한테 물렸잖아.”
“사냥개가 아니라 미친개겠죠.”
조걸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여기서 얌전히 얻어맞고 기절했으면, 저 꼴은 안 당했을 텐데…….
‘가엽게도.’
적이지만 측은지심과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 춥다고! 진짜!”
청명은 질질 끌고 온 초겸을 빙궁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집어 던졌다. 기절해 버린 몸뚱이가 획 날아가 철푸덕 널브러졌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도사라는 놈이!’
‘사람을 존중해야지!’
하지만 청명에게 그런 걸 따져 묻는 건 소용이 없다 못해 허무한 일이다.
“그거 하나 제때 제대로 못 잡아 가지고! 어?”
“네가 잡을 줄 알았지.”
“여하튼 하나같이 빠져 가지고!”
“……네가 제일 빠졌어, 새끼야.”
백천이 고개를 내젓고는 몸을 돌렸다. 부상을 입은 홍이명을 당소소가 돌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백천의 물음에 홍이명이 깊이 탄식하더니 입을 열었다.
“……도움에 감사드리외다.”
“별말씀을요.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면 언젠가는 내가 도움을 받을 때도 오는 법이죠.”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홍이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언젠가’가 이리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네.”
화산의 제자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그들을 위해 수레를 수리하느라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홍이명은 홀로 아이를 대피시키고 빙궁의 궁도들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북해의 얼음에 묻히는 신세가 되지 않았겠는가?
작은 호의를 베푼 대가로 더없이 큰 보답을 받은 두 사람이었다.
백천이 당소소에게 슬쩍 물었다.
“어떠냐?”
“내상을 조금 입기는 했지만,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에요. 이삼 일 정양에 들면 회복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예요.”
“음.”
백천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르신…….”
그리고 슬쩍 입을 떼며 홍이명과 홍진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단 부르기는 했는데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애매했다.
“그…….”
백천이 살짝 주저하고 있으니,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아저씨.”
“…….”
“아저씨나 우리나 상황이 좀 꼬인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
“특히…….”
청명의 시선이 홍진보에게로 향했다.
“쟤들 하는 짓을 보니, 아저씨가 아니라 쟤를 노리고 온 것 같던데?”
그러자 홍이명이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서 진한 고심이 느껴졌다.
“……일단은 들어가세나. 바람이 차니.”
이번엔 백천이 청명 대신 대답했다.
“그러시죠. 하지만…….”
“걱정할 것 없네.”
홍이명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이리된 이상 모두 설명해 줌세. 어차피 그대들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놈들은 어떻게 하죠?”
그때 조걸이 쓰러져 있는 빙궁의 문도들을 향해 턱짓했다.
“이대로 두고 가면 깨서 달아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안으로 옮깁니까?”
“집도 좁은데 걔들을 어디다 둬.”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청명이 추위에 떨며 집 옆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겨울을 대비해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서 크고 튼튼한 놈을 하나 꺼내 왔다.
“그걸로 뭘 하려고?”
“뭘 하긴. 이거…….”
그때 마침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빙궁의 무사 하나가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
“으……. 으으……. 대체…….”
퍼어어어억!
털썩.
“…….”
장작으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자 꿈틀대던 빙궁도의 움직임이 말끔하게 멎었다.
“봤지?”
“…….”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깬다 싶으면 뒤통수 까서 다시 기절시켜. 잘 까면 푹 재울 수 있어.”
“…….”
청명의 패악은 북해에서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