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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64화 (464/1,567)

464화. 뭐 이딴 동네가 다 있어? (4)

쇄애애애액!

칼바람을 몸으로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무사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흰 무복.

왼쪽 가슴에 새겨진 빙(氷)이라는 글자.

‘북해빙궁인가?’

백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들이 북해빙궁을 방문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갑자기 그 소속의 무인들을 조우하게 되자 절로 긴장되었다.

‘사숙.’

‘안다.’

선자불래내자불선(善者不來來者不善)이라 했던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보아, 저들이 결코 좋은 의도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선두에 선 빙궁의 무사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켰다.

홍이명, 그리고 홍진보.

“쥐새끼 같은 것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표정보다 더 차가웠다.

‘뭐지?’

백천이 조금 의아한 눈으로 홍이명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게 언제냐는 듯 얼굴을 굳힌 홍이명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설마 이런 외지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목숨이 아깝기는 한가 보군.”

차갑게 일갈한 사내의 시선이 홍이명의 옆에 있는 홍진보에게로 향했다.

“……저 아이인가.”

홍이명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홍진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사내는 확신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라리 북해를 떠났더라면 그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을. 어설픈 미련이 발목을 잡았구나. 소원대로 북해 땅에 묻히게 해 주지.”

사내가 턱짓했다.

“죽여…….”

“아, 자, 잠시만요!”

내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던 백천이 번쩍 손을 들었다.

빙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에 백천이 슬그머니 다시 손을 내리며 헛기침했다.

“외지인인가…….”

선두에 선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급하다고 하나, 외지인까지 끌어들어다니. 북해인의 본분을 잊었느냐, 한이명?”

그 말에 홍이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입으로 감히 그런 말을 지껄이는가? 외세를 끌어들인 건 너희가 먼저였지.”

“주둥아리는 살아 있군.”

사내가 백천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아. 저희는…….”

백천이 대답하려는 순간 조걸이 순간적으로 그의 옆구리를 콱 찌르며 냉큼 답했다.

“……지나가던 상인입니다만.”

“상인?”

사내가 눈을 찌푸리며 짐수레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짐수레에 가득 실린 자루들을 보고서야 이해했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이 명을 재촉하는군. 중원과 북해의 교역이 금지된 지가 언젠데.”

“그…… 딱히 교역한 건 없습니다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어차피 죽는다.”

사내가 더 말할 필요없다는 듯 짧게 턱짓했다.

“모두 죽여라. 저 어린놈은 얼굴이 상하지 않게 목을 베고.”

“예!”

짧고 단호한 대답과 함께 빙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홍이명이 큰 손으로 홍진보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진보.”

“아, 아버지…….”

“내가 막을 테니 너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거라.”

“네?”

“긴말할 시간이 없다! 가라!”

“아, 안 돼요, 아버지! 저는…….”

“당장 가라는데 뭘 하고 있느냐!”

홍이명이 결국 홍진보를 뒤쪽으로 확 밀쳤다. 그리고 양손을 좌우로 살짝 펼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빙궁의 무사에게 맞섰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갈 수 없다.”

“뻔한 소리를 하는군.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애새끼 따위는 언제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빙호(氷狐)의 목숨을 취할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지.”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홍이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편.

“……싸우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저희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고요.”

“이따 죽인다잖아.”

“어떻게 하죠?”

“글쎄다.”

백천과 조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으니 한쪽의 편을 들기가 애매했다.

“저 아저씨 생각보다 센 것 같은데.”

“그렇지?”

“그래도 저 사람들을 혼자 상대할 수는 없어 보이죠?”

“음.”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홍이명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북해빙궁에 가는 길이다. 될 수 있으면 북해빙궁과 척을 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척을 안 지자니 사람이 죽게 생겼고, 그렇다고 척을 지자니 뒷일이 걱정이고.’

이러지도 못하는데 저러지도 못할 판이었다.

“어떻게 합니까?”

스르르릉.

그때, 그들의 귀에 검을 뽑는 소리가 스쳤다.

화들짝 놀란 백천과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렸다. 윤종이 세상 편안한 얼굴로 검을 뽑고 있었다.

“뭐, 뭘 할 셈이냐?”

“도와야죠.”

“응?”

“짐승도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는 아는 법인데, 그냥 사람도 아니고 도사가 되어서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이 새끼 또 시작이네?

“그리고 들으셨잖습니까?”

“응?”

“모두 죽이라고 했잖습니까. 보아하니 목격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좀 일찍 싸우나 늦게 싸우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죠.”

백천이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아앙!

홍이명이 있던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화산 제자들의 눈에…….

푸우우웃!

홍이명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콰당.

바닥을 구른 그는 즉시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선지피가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밭에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앞으로 내민 그의 두 손은 여전히 단호했지만, 몸을 받치고 있는 다리는 힘이 풀린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빙호도 다됐군.”

“늙었어.”

반면에 홍이명을 몰아붙이는 빙궁 무사들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아, 아버지…….”

조금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진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제 아비를 불렀다.

그러자 홍이명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획 뒤돌아보았다.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당장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혀를 무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

“가시오! 가십시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어서!”

홍이명의 말투가 바뀌었지만, 홍진보는 너무 겁에 질려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눈물겹군.”

빙궁의 무사들은 그 절절한 모습을 비웃으며 자비 없이 포위망을 좁혀 갔다.

“그리 안달복달할 것 없다. 네가 죽으면 저 어린놈도 곧 뒤를 따르게 될 테니까.”

그 말을 들은 홍이명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빙궁의 무사들을 쏘아보았다.

“너희가 빙궁의 무사라는 자부심이 있다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저분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이냐?”

“아주 잘 알지.”

선두에 선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알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뭐,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 있는 늙은이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천벌을 받을 놈들!”

“긴말할 것 없다. 죽어라!”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빙궁의 무사들이 쾌속하게 홍이명을 향해 돌진했다. 홍이명은 양손을 휘저으며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촤아아아앗!

그의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솟구쳤다. 그리고 이내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새하얀 장력이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한설장(寒雪掌)! 과연 한 수가 있구나!”

섬뜩할 정도의 한기를 품은 장력이 위협적으로 쏟아졌지만, 빙궁의 무사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 정면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그리고.

콰아앙! 콰앙!

시퍼런 도기(刀氣)를 머금은 도가 한설장의 장력을 연이어 내려쳤다.

싸리비에 얻어맞아 튕겨 나가는 눈처럼, 한설장의 장력이 깨어지고 으스러졌다.

“컥!”

십여 명의 공격을 홀로 감당하는 건 무리였는지, 홍이명은 이내 다시 피를 뿜으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빙궁의 무사들은 쉬이 그를 보내 주지 않았다.

“죽어라!”

선두에서 날아든 칼이 홍이명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고 날아들었다.

홍이명이 두 눈을 부릅뜬 바로 그 순간.

카아아아아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동시에, 날아들던 칼이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뭐?”

칼을 내지른 이의 눈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푸욱.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른 칼은 두텁게 쌓인 눈에 틀어박혔다.

“…….”

금세 자신의 목이 잘릴 줄 알았던 홍이명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 자네.”

쭉 뻗은 어깨.

곧은 자세.

더없이 영웅적인 풍…….

“……빌어먹을, 또 저질렀다!”

……모는 아닌 듯 하고.

홍이명의 앞을 가로막은 백천이 난감한 표정으로 모자 안에 손을 넣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어차피 이리 될 일이었으니까요.”

윤종이 저벅저벅 걸어와 그런 백천의 옆에 섰다.

“어차피 우리도 죽이려 들었을 건데, 언제 싸우든 마찬가지죠.”

조걸도 검을 뽑으며 윤종의 반대편에 섰다. 유이설과 당소소 역시 이미 검을 뽑아 들고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와 섰다.

“네놈들은 뭐냐? 평범한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평범한 상인은 아닙니다만.”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굳이 우리가 이쪽의 정체를 알아서 떠들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이놈이?”

조걸이 백천을 거들었다.

“그쪽도 정체를 안 밝힌 건 마찬가지지. 이 예의도 없는 것들아.”

“옳지. 우리 조걸이가 간만에 맞는 말을 하는구나?”

“그렇죠? 헤헤.”

간만에, 정말 간만에 윤종의 칭찬을 들은 조걸이 만족스런 얼굴로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빙궁의 무사들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감히 북해의 일에 관여하겠다는 것이냐? 중원인이?”

그 말을 들은 백천이 입꼬리를 씰룩하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죽인다며?”

“…….”

“웃기는 사람일세? 좀 전엔 죽인다더니, 이제는 관여하지 말라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아나.”

조걸과 윤종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사숙…… 또 시작이시네요.’

‘내버려 둬라. 버릇이시지 않느냐.’

싸우기 전에는 생각이 많은 백천이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미타불.”

그때, 마지막으로 혜연이 천천히 걸어와 그들의 곁에 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사람의 목숨은 귀한 것이외다. 제 앞에서 살생을 저지르는 걸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중놈까지?”

빙궁의 무사가 조금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차갑게 조소했다.

“중원 놈들은 건방지기 짝이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모양이로구나. 감히 북해에서 빙궁의 행사를 방해하려 들었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사내가 바닥에 꽂힌 칼을 다시 뽑아 들고는 이를 갈아붙였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치민 듯했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슬그머니 굳어졌다.

‘괜찮을까?’

‘아직 뭐가 좀 찝찝한…….’

바로 그때였다.

들썩. 들썩.

“오?”

“나온다.”

화산의 제자들이 조금 환해진 얼굴로 짐수레를 돌아보았다. 대치 중이던 이들이 시선을 돌리니 빙궁의 무사들 역시 반사적으로 짐수레를 바라보았다.

높게 쌓여 있던 동글동글한 짐들이 들썩이다 좌우로 조금씩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더 커다랗고 더 동그란 짐 하나가 불쑥…….

‘아니, 짐이 아닌가?’

몸에 털가죽을 있는 대로 뒤집어쓴 사람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더니 세상의 온갖 짜증을 다 눌러 담은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또 시간을 질질 끌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더 추운데!”

그 황당한 광경에, 빙궁의 무사들마저 일순 할 말을 잊었다.

왜 사람이 짐 속에서 나온단 말인가?

“아니, 인마! 상황 좀 보고 말해라!”

“상황이 왜? 뭐?”

“빙궁이라니까! 빙궁!”

“그래서?”

백천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터트리려다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은 폭급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빙궁을 만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놈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

“해도 되냐?”

“별걸 다 신경 쓰고 있어. 알아서 해.”

심드렁한 청명의 말에 백천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오냐!”

최후의 찝찝함마저 날려 버린 백천이 살짝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자세를 젖히며 빙궁의 무사들을 응시했다.

“들었소?”

“…….”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면, 험한 꼴은 안 보게 해 드리겠소. 우리 애들이 좀 거칠거든.”

그러자 선두에 선 빙궁의 무사가 이를 갈아붙였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리고 커다랗게 일갈했다.

“모두 죽여라!”

“예!”

빙궁의 무사들은 이제 일제히 화산의 제자들과 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똑바로 겨눈 채로 말했다.

“죽이지는 말고!”

“예!”

백천을 위시로 한 화산의 문도들이 섬전처럼 빙궁의 무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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