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내가 그쪽은 전문가거든. (5)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법.
아무리 먼 길이라도 꾸준히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 끝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천 리가 아니라 이천 리가 되면 말이 조금 달라지고, 삼천 리가 되면 말이 또다시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육천 리쯤 되면, 완전히 다른 범주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거, 도착할 수는 있는 겁니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
청명이 화산에 등장한 이후로, 화산의 제자들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라는 게 뭔지를 끊임없이 주입당해 왔다. 때문에 그래도 어찌어찌 여정을 이어 나갈 순 있었다.
하지만 근성과 오기만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버렸다.
“으으으…….”
“……히익.”
조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마저도 얼어 버려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코…….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습니다, 사형.”
“……나는 손에 가…… 감각이 없다.”
혀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미묘하게 혀 짧은 소리가 났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말 그대로 연신 후려쳤다.
춥다, 춥다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뭔 놈의 바람이 이리 분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고.”
이가 덜덜 떨리다 못해 서로 부딪혀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았다.
기온이 낮은 건 이해할 수 있다. 북쪽으로 가면 당연히 추워질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바람이 이렇게까지 분다는 말은 없었잖은가?
온몸이 칼에 베이는 것 같고, 눈알이 금방이라도 얼어서 깨어질 것 같았다.
“이게 칼바람이구나.”
“만인방 새끼들 칼은 칼도 아니었네.”
조걸이 덜덜 떨며 옆을 돌아보았다.
“스, 스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시주. 저는…….”
“머리도 없어서 더 추우실 텐데.”
“…….”
혜연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묻는 듯한 눈으로 조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조걸의 표정을 보니 화가 난다기보다는 살짝 서글퍼졌다.
“사, 사고……. 여, 여기 원래 이렇게 추운 거예요?”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당소소는 특히나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전신을 양털로 싸매고 그 위에 가죽까지 둘렀건만,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은 가죽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나도 몰라.”
유이설이 꽁꽁 얼어붙은 입을 간신히 움직여 작게 중얼거렸다.
“놀라워. 여기 사람 산……다는 게.”
“……그러게요. 전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사고.”
모두 살면서 처음 겪는 엄청난 추위에 점점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예?”
조걸이 눈을 부릅뜨며 백천을 돌아보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못 이겨 다시 실눈을 떴다.
“사숙이 모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라고 북해에 와 봤겠느냐? 대충 어림짐작할 뿐이지.”
“그래도 들은 건 있을 것 아닙니까?”
“……이쯤이면 슬슬 뭐가 보여야 할 텐데.”
백천이 고개를 돌려 짐수레를 바라보다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청명이 놈은 어디 갔느냐?”
“예? 저기에 있……. 응?”
조걸이 여전히 실눈을 뜬 채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이 어딜 갔지?”
“오다 떨어뜨린 것 아니냐?”
“……그놈이 어디 떨어질 놈입니까. 그렇게 살면서 지옥에도 안 떨어지는 놈인데.”
“그렇긴 하지. 그럼 이놈이 대체 어딜…….”
그때 유이설이 손잡이를 놓고 수레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위로 훌쩍 뛰어올라 높이 쌓여 있는 짐들을 좌우로 휙휙 걷어 내기 시작했다.
“사고?”
마치 토끼가 굴을 파듯 짐 사이로 파고 들어간 유이설이 다시 고개를 획 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없어.”
“응? 없다고?”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안에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진짜 어디 갔지?”
“정말 오다 떨어뜨린 거 아니냐?”
“안 떨어진다니까요. 그 찰거머리 같은 놈이 떨어지겠습니까?”
“얼어서 떨어졌을 수도 있지.”
“어? 그건 생각 못 해 봤는데?”
조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유이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곳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더니.
턱!
쌓여 있는 자루 중 커다란 걸 획 잡더니 단숨에 짐들 위로 던져 올렸다.
“사, 사고? 갑자기…….”
꿈틀.
“…….”
그런데 짐 위로 던져진 자루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백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설마?”
쏜살같이 달려간 백천이 자루를 잡고 확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남은 양털과 가죽, 모포들이 마구 뒤얽혀 있었다.
백천은 지체 없이 안에 든 양털과 가죽들을 마구 꺼냈다.
그리고.
턱!
이내 손에 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백천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데 이 새끼가!”
그는 버럭 소리를 치며 손에 잡힌 것을 단숨에 뽑아내었다. 그러자 익숙한 대가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새끼가 사숙이랑 사형들은 칼바람 맞아 가면서 수레 끌고 있는데! 하다하다 이제는 자루 안에 처들어가 있어? 당장 안 기어 나와?”
하지만 곧장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발악을 했어야 할 청명이 놈이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살짝 들었다.
잠시 후 덜덜 떨리는 조그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 동룡아.”
“…….”
“추, 춥다.”
“…….”
“너, 너무 추워. 으으으으.”
청명은 떨어진 양털들을 잽싸게 주섬주섬 주워 챙기더니 다시 자루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이가 없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백천이 황급히 청명을 다시 붙잡았다.
“나오라고!”
“춥다고! 얼어 뒈지겠어!”
“이게 어디서 엄살이야!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이 짐 자루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나? 아무리 자루가 커도 그렇지.”
“청명이잖습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아무리 추워도 짐 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나? 무겁지도 않은가?”
“청명이니까요.”
“……그것 참 만능이네.”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청명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어떻게든 납득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당장 안 기어 나와?”
“하아아악!”
“이 새끼가 이제는 하악질까지 해 대네! 미쳐 가지고!”
“……나 아냐.”
“응?”
백천이 얼떨떨한 눈으로 자루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털 사이에서 양털보다 더 하얀 털뭉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를 드러냈다.
“하아아아악!”
“…….”
그 광경을 보는 백천의 눈은 흡사 나라를 잃은 사람의 것 같았다.
“……하나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이제 두 놈……. 아니, 두 마리가 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대체 무슨 죄를…….
백천은 백천대로 속이 썩어 들어갔지만, 청명도 나름 변명거리가 넘쳤다.
“으으으으으! 빌어먹을,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과거에는 한서불침의 경지에까지 올랐던 청명이다. 기운이 흘러넘치니 한기가 감히 그의 몸을 침탈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건 옛날이야기고!
“어, 얼어 뒈지겠네!”
오히려 한서불침이었던 게 더 문제였다. 수십 년을 추위를 모르고 살았더니, 도무지 이 상황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손을 내밀면 칼로 손을 저미는 것 같다니까? 이걸 어떻게 버티라고?
“내공 좀 돌리면 나름 버틸 만하잖아! 이 새끼야!”
“그게 안 된다고, 그게!”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내력은 천하에서 가장 정순하고 순도가 높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출력은 어마어마하게 높은데 양은 쥐꼬리만 하다는 뜻이다. 그 내력으로 몸을 데우면 안 그래도 얼마 없는 내력이 더 줄어들겠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식으로 내력을 낭비하란 말인가? 당장 마교 놈들이 칼 물고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에이, 빌어먹을! 왜 쓸데없이 이런 내력을 쌓아 가지고!”
싸울 때 좋은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아무짝에도!
“하아아아악! 하아아악!”
그 와중에도 백아는 자루 안으로 들어온 백천의 손을 연신 날카로운 발톱으로 파바박 후려쳤다. 그러더니 잽싸게 양털 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저기…… 사숙.”
“응?”
“원래 백담비는 추운 데서 사는 동물 아닙니까?”
“나도 그런 걸로 아는데.”
“근데 쟤는 왜 저러는 겁니까?”
“난들 알겠냐. 남만에서 살다 보니 저리된 모양이지.”
“……따뜻한 남쪽서 살더니 배가 불러 가지고.”
백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백천의 신경이 백아에게 쏠린 틈을 타, 청명은 양털과 가죽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 들어가 다시 자루 입구를 조이기 시작했다.
“나오라고, 이 새끼야!”
“나 얼어 죽는다니까!”
“얼어 죽긴 개뿔이! 북해에 있는 내내 이러고 다닐 거냐?!”
“사숙!”
“응?”
“잘 부탁해!”
“나와!”
백천이 쉬이 물러서지 않자 청명이 끄응 소리를 내며 자루에서 목만 쏙 빼냈다. 그리고 기웃기웃 주변 광경을 확인했다.
“뭔 보이는 거라곤 허연 것밖에 없어.”
설원.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설원이었다. 이렇게 춥지만 않았어도 장관이라고 감탄했을 절경이었다. 하지만 내내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다 보니 하얀 지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북해빙궁인지 나발인지, 이 정신 나간 새끼들. 대체 뭘 주워 처먹겠다고 이런 데서 살고 있어?”
“……네 막말에 동의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한철이나 빙정 같은 게 왜 생기는지 알 것 같다. 이런 바람에 천년만년 얻어맞다 보면 철도 성질이 나빠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제쯤 도착할 때가 됐을 텐데?”
“아직 먼 모양이다. 바다가 안 보여.”
“응?”
청명이 빼꼼히 내민 고개를 돌려 백천을 보았다.
“뭔 바다?”
“북해(北海)잖아. 아무리 추워도 바다는 안 언다며. 그럼 물이 보여야 하는데, 아직 안 보인다니까.”
“끅…….”
청명이 속이 터진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대고 흔들었다.
“야, 이 무식한 인간아! 북해가 바다냐?”
“……아냐?”
“호수라고, 호수! 북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
“호수를 왜 북해라고 부르는 거지? 그럼 북호(北湖)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바다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라고!”
“아, 그래서?”
백천이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호수면 얼겠구나.”
“그렇지.”
“그럼 얼어붙은 커다란 호수를 찾…….”
백천이 주변을 돌아보다가 가만히 청명을 다시 바라본다.
“……무슨 수로?”
“…….”
보이는 것은 새하얀 평원밖에 없다.
이곳에서 얼어붙은 설원을 찾으라는 말은 사막에서 황토를 찾으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청명이 손을 쏙 빼 머리를 긁적였다.
“잘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청명아.”
“응?”
“옷 챙겨 입고 나와라. 뒈지기 싫으면.”
“…….”
죽으란 말을 들은 것처럼 청명이 얼굴을 구기는 찰나였다.
“사숙!”
“응?”
“저기 사람 아닙니까?”
“응? 사람?”
백천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이 설원의 대지에 도착하기 전 북쪽의 초원 지대를 지날 동안은 아주 드물게 사람이 사는 듯한 움막을 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설원에 들어온 뒤로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라니?
“어디?”
“저기! 저기요!”
백천은 윤종이 가리킨 방향을 아주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디에…….’
“음?”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확실히 저 멀리에 검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곰 아냐?”
“곰치고는 좀 덩치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백천은 잠시간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가 보자. 사람이든 곰이든 여기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쿠당탕탕!
“응?”
고개를 돌린 백천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 미친놈이 그새 파낸 짐 사이로 기어 들어가 짐을 무너뜨리고 숨어 버렸다.
“사람답게 좀 살자, 이 새끼야! 사람답게!”
“……이제 진짜로 좀 포기하십쇼, 사숙.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습니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서 이러잖아!”
“……그도 그렇긴 하지만.”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인 백천이 결국은 한숨을 푹 쉬곤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수레의 손잡이를 움켜잡는 표정이 결연했다.
“일단 가 보자!”
“예!”
화산의 제자들은 수레를 끌고 빠르게 내달렸다. 다행히 평원이라 수레를 끌고 가는 건 그리 힘들지 않을 듯했…….
“악! 다리가 푹푹 빠져!”
“사숙! 수레바퀴가 눈에 파묻혀 잘 안 나갑니다!”
“아아악! 돌부리가 있었어!”
백천이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을까?
정말 이 임무를 달성하고 화산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북해, 북해. 말만 들었지…….”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게 그저 매순간 놀라울 뿐이었다.
한참의 고난 끝에 사람으로 보이는 것 근처까지 다가간 백천은 저도 모르게 수레 손잡이를 놓았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 이게 다……?”
그들의 눈앞엔 생전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투명한 얼음.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흡사 얼음의 사막 같기도 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그럼, 이게 호수가 언 거라고?”
“호수가 얼마나 크다는 이야기야?”
“……예쁘다.”
중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황홀하고도 놀라운 광경에,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
“사숙! 저기!”
“음?”
호수 위에서 앉아 있던 곰인지 사람인지 모를 이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원인인가?”
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익숙한 한어(漢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