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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58화 (458/1,567)

458화. 내가 그쪽은 전문가거든. (3)

파아앗!

검 끝이 흔들림 없이 앞으로 쏘아졌다.

파아앗!

다시 한번.

또다시 한 번.

수도 없이 내질러진 검 끝은 쾌속하게 나아가 정확하게 같은 곳에 멈추기를 반복했다.

‘흔들려.’

유이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얼핏 같은 곳에 멈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쉰 유이설은 매화검을 회수했다.

‘쉽지 않네.’

당가에서 만들어 준 매화검은 확실히 과거 그들이 쓰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균형감이 탁월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다.

검이 가벼워지며 더욱 현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 검 끝이 쉽게 흔들렸다.

유이설은 매화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산의 검은 남녀의 구분이 크지 않았다.

검에 힘을 싣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평범한 정파의 검과 달리, 화산의 검은 쾌(快)와 변(變), 그리고 환(幻)을 중심으로 했다.

검을 더없이 날카롭고 다채롭게 펼쳐 낼 수 있다면, 여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극의(極意)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있겠는가?

변화가 다채로운 검일수록 완벽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변화로 상대를 속이고, 현혹하는 검. 그 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화산의 검은 그저 요검(妖劍)이 될 뿐이다.

‘검 끝에 중심을 담아야 해.’

청명은 수없이 기초를 논해 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초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했지만, 최근 들어 왜 청명이 그렇게까지 강조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화려하고 요사스러운 변화에 집중할수록 검은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그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체를 이용하여 검의 무게를 잡고, 마음을 가라앉혀 자신의 검을 완전히 통제해야 한다.

‘화려한 검과 무거운 마음이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양립시켜야 하는 기분이었다.

“후우.”

유이설은 깊은 숨을 내쉬며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 끝이 매화를 피워 낸 지는 좀 되었다.

하지만 바라 왔던 경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그녀가 바라는 매화는 이 정도가 아니다. 좀 더 정교하고 좀 더 선명한…….

그래, 살아 있는 듯한 매화.

유이설의 발이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후,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연화봉이었다.

겨울이 훌쩍 다가온 듯 차가워진 밤공기를 맞으며 말없이 연화봉을 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귓가에 낯익은 파공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이 비단결처럼 바람을 가르는 소리.

이제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소리에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이윽고 연화봉에 올라선 그녀의 시야에 만발한 매화의 숲이 한가득 들어찼다.

주먹을 꽉 쥔 그녀는 그 광경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 송이, 한 송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매화.

수없이 보았음에도, 볼 때마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희고 붉게 피어난 매화들이 바람에 요동치는 것처럼 흔들리고, 다시 휘날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유이설은 그 매화를 두 눈에 거듭 새겨 넣었다.

그런데 그때, 환상처럼 흩날리던 매화가 일순 사라졌다. 마치 지금껏 그녀가 보았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아…….”

유이설의 입술을 뚫고 아쉬움의 탄성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매화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땅에 검을 꽂아 넣은 채 불만스레 주저앉은 청명의 모습이었다.

유이설은 살짝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그의 등을 응시했다.

‘하여튼…….’

벌써 몇 번이고 보았던 모습이다.

유이설의 눈에는 완벽이라 표현해도 모자라지 않을 매화지만, 정작 청명에게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때리고 싶다.’

유이설은 살짝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입을 모아 유이설이 수련광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누가 가장 수련에 미쳐 사는지.

이미 앞서 있는 이가 노력까지 가장 많이 쏟으니, 이를 따라잡는 건 너무도 막막하고 요원할 수밖에.

청명은 고민에 빠진 양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유이설은 가만 그 뒷모습을 보다 몸을 돌렸다. 고민에 빠진 무인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돌아가던 유이설은 다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다시 청명의 뒷모습을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 결연함이 스쳤다.

‘나도 언젠가는…….’

천천히 다시 산을 내려가며, 그녀는 매화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끄응.”

청명이 암향매화검을 꽉 부여잡았다.

“답답해 뒈지겠네.”

그리고 앓는 소리를 내며 검을 뽑아 무릎 위에 올렸다.

수련을 할 때마다 겪는 거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몸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건 참 짜증 나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의 청명은 과거 매화검존이 그 나이였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전생의 그 역시 화산의 역사에 남을 천재로 불렸었지만, 지금의 청명에 비하면 후기지수 수준에 불과하니까.

예전의 이 나이의 자신 따위는 손이 아닌 발로 검을 휘둘러도 때려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리 조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끄응.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지.”

청명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단은 좀 진정하자.’

찬찬히 쌓아 놓은 기본이 이제야 슬슬 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청명이 강해지는 데 처음 만들어 놓은 토대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의미다.

전생에 쌓아 놓은, 무학에 대한 드높은 이해도와 반쯤 쑤셔 박다시피 한 영단의 내력으로 여기까지 꾸역꾸역 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장인의 정신으로 곱게 빚었던 토대가 힘을 발휘할 때였다.

그럼 앞으로도 더욱 강해지겠지만…….

‘역시 너무 느려.’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수십 년 동안 수련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지난 생의 경지를 추월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수십 년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단 점이었다.

마교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중원이 마교의 흔적을 발견하고부터 전면전이 벌어질 때까지는 채 오 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보다 더 느릴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던 청명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보름달을 가만 보던 청명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장문사형.”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서 보고 있으면 말 좀 해 주쇼. 그 새끼 지옥에 떨어졌수?”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에휴, 그래. 사형이 뭘 알겠소.”

- 뭐 이 새끼야?

“……아니, 이럴 때만 대답하고 난리야.”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불안하단 말이지.’

- 기억해라, 화산의 제자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마(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진정으로 마도천하가 열릴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도…….

그 빌어먹을 놈의 마지막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돌아온다라.’

그놈은 분명 마(魔)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 될 수 있으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교와 다시 조우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니 그 말이 영 견딜 수 없게 거슬렸다.

‘마(魔)라…….’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마교가 다시 부흥할거라는 예언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그렇게만 단정 지을 순 없었다.

‘놈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마(魔)라 칭했을까?’

제대로 얘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고민해 봤자 답도 없고.”

청명은 투덜거리며 벌떡 일어나 암향매화검을 움켜잡았다.

마교가 발악을 하든, 천마가 다시 돌아오든, 결국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더 강해져야 해.”

마교가 다시 발호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천마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냉큼 그 목을 쳐 버릴 수 있을 만큼!

“나도, 화산도 아직 한참 멀었어.”

과거를 되찾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과거는 되찾는 게 아니라 뛰어넘어야 하는 거니까.

청명의 검이 다시 선명한 매화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지 않을 매화였다.

* * *

휘둥그레진 청명의 두 눈이 연신 끔뻑였다.

일단 그의 눈앞에 놓인 건 무척 익숙한 수레였다. 하지만 청명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 수레가 아니라, 위에 실려 있는 짐들이었다.

동글동글한 자루들이 수레 위로 까마득하게 쌓여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뭔데요?”

“짐이지.”

“아니…… 짐인 건 아는데…….”

이사라도 가나?

“혹시 제가 없는 사이 종남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나요?”

“종남파는 어쩌고?”

“다 패서 내쫓아야죠.”

“…….”

현영이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하는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아니, 농담한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요…….

할 말을 잃은 청명을 향해 현영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쉽게도 이삿짐은 아니다. 너희가 북해로 가지고 갈 짐들이지.”

“……그러니까 뭔 짐을 이렇게…….”

“조걸이 녀석에게 대충 설명해 두었다. 아래쪽에 있는 것들은 양털과 가죽,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들이다.”

“…….”

“그리고 위쪽에는 식량들이 실려 있다. 저 상자들은 북해에 줄 선물들이지.”

“뭔 선물이요?”

현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지 않느냐. 아무리 연통을 미리 받았을 거라고는 하나, 북해인들이 중원인을 환영할 리는 없다. 그러니 선물이라도 준비하면 조금 낫지 않겠느냐?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

심지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일행들은 남은 짐들을 계속해서 수레에 실었다.

“다 실었습니다, 장로님!”

“흐음. 빠진 것 없는지도 다 확인했고?”

“예!”

현영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야!”

“예, 장로님!”

“약재와 금창약은 모두 챙겼느냐?”

“네!”

당소소가 둘러맨 봇짐을 팡팡 때리며 씩 웃었다.

“빠짐없이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매의 눈으로 수레를 살펴보던 현영은 혹여 빠진 것은 없는지 직접 다시 한번 점검했다.

“장문인께서 신신당부하신 일이니 한 치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다. 북해까지는 먼 여정이니 필요한 것도 많을 것이다.”

“아니……. 무인이 무기나 챙기면 되는 거 아닌가.”

청명의 구시렁거림에 불꽃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게!”

“네가 밥 하냐? 어? 네가 밥 해?”

“그렇게 출발하니 풀 뜯어 먹으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 아냐, 이 잔악무도한 새끼야!”

백천과 다른 제자들의 격렬한 반발에 청명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럼 짐이야 그렇다 쳐도, 왜 또 저 수렌데? 저 수레에 짐까지 저렇게 실으면 말도 못 끄는데.”

“말은 필요 없어.”

“……응?”

청명이 고개를 돌리자 백천이 태연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 소단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북해는 너무 추워서 말들이 얼어 죽는다더군. 그러니 어차피 말은 못 데려가.”

“……그럼?”

“우리가 끌어야지.”

“…….”

청명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사숙들이?”

“뭐 저번에도 끌고 가지 않았더냐. 단련 삼아 나쁘지 않더라고. 그렇지?”

백천이 동의를 구하자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최근에는 너무 안 끄니까 좀 찌뿌둥하더라고요.”

그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대화에 청명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괜찮을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말이 얼어 죽는 게 걱정이라면 적당히 북해 근처까지만이라도 말로 끌고 그 이후에나 사람이 끌면 되는 게 아닌가?

많은 의문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지만, 이쯤 되니 아무 의미도 없는 물음들이었다. 본인들이 의지에 차 있는 걸 어쩌겠는가.

“……저건 왜 저러고 있는데?”

“응?”

청명이 찜찜하단 얼굴로 물으며 턱짓하자 백천이 그쪽을 흘끗 보았다. 수레 옆에서 넋을 놓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인물이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반야심경이 저토록 구슬플 수 있는가.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잠깐 보다 일제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엾게도.”

“정신이 나갈 만도 하지.”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 양반은 사천까지 그 고생을 하고 다녀와서 아무것도 받은 게 없잖습니까? 그나마 우린 검이라도 건졌지.”

“그래, 그렇지……. 게다가 믿었던 방장까지 자길 버리고 갔으니.”

“아미타불. 성불하소서.”

청명은 그 대화를 듣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문사형.’

아무래도 화산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여기까진 진짜로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거든요?

“모두 준비되었느냐?”

그때, 뒤쪽에서 현종이 다가오며 물었다.

“예, 장문인!”

화산의 제자들이 몸을 바로 세우며 현종을 맞았다.

“……철저히 준비한 것 같구나.”

잔뜩 실린 짐을 진지하게 살핀 현종이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아.”

“예, 장문인.”

“북해는 먼 곳이다. 각별히 주의하거라.”

“예!”

“청명이 놈이 사고 치지 않게 잘 지켜보고.”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리고 현종은 청명을 보며 말했다.

“잘할 수 있겠느냐?”

“……조금 전까지는 그랬는데 말이죠.”

청명은 흘끗 함께 갈 일행들을 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현종은 걱정 어린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만 기억하거라.”

화산 제자들의 눈빛에 진중한 빛이 서렸다.

“너희에게는 완수해야 할 임무 같은 건 없다. 조금이라도 위험해진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 이곳 화산으로 돌아오거라. 알겠느냐?”

“예, 장문인!”

말을 마친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디 몸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백천을 필두로 제자들이 수레 앞에 달라붙었다.

“혜연 스님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실어.”

“예!”

조걸이 주섬주섬 혜연을 챙겨 짐 위에 던져 올렸다.

“청명아! 너도 얼른 타라!”

“…….”

“장문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수레를 끌고 산문을 나섰다.

말없이 수레 위에 몸을 실은 청명은 풀죽은 채 늘어진 혜연과 활기차게 수레를 끄는 사형들을 바라보다 흐뭇하게 웃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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