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내가 그쪽은 전문가거든. (2)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법정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먼 섬서까지 왔음에도 법정은 겨우 하루를 머무르고 날이 밝자마자 떠날 채비를 마쳤다.
현종이 만류해 보았지만, 법정은 완강했다. 소림의 방장이라는 자리는 천하에서 가장 바쁜 자리 중 하나니까.
그런 와중에도 이 먼 섬서까지 굳이 방문했다는 사실이 법정과 소림이 북해의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리 서둘러 가시니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
현종의 말에 법정이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척이나 온화했다.
……좀 과할 정도로 온화했다.
‘그런 말을 하려면 표정이라도 좀…….’
어떻게든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려 하는 것 같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종이 저토록 싱글벙글 미소 짓는 원인을 본 법정은 나지막이 신음했다.
도포를 입은 현종의 허리에, 익숙한 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하신검.
협상을 위해 가져왔던 화산의 신물 자하신검이 어느새 그의 손에서 현종의 허리로 넘어간 것이다.
‘깎아 주지는 못하겠지만 물건은 놓고 가라니. 이 지옥에 떨어질 것들!’
법정은 딱 맞붙어 으득으득 갈리는 이를 필사적으로 떼어 놓았다.
화산이 생고집을 부리는 걸 알면서도 법정은 어찌할 도리 없이 저 검을 내놓아야 했다. 평생 주도권을 놓아 본 적 없이 살았던 소림의 방장이다 보니, 남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데에 대항하는 것이 미숙했던 탓이다.
‘내가 저걸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쓴 돈이 얼마며, 들인 노력이 얼마던가.
그런데 이걸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길 줄이야…….
법정의 시선이 자하신검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본 현종은 나직하게 헛기침하며 슬쩍 자하신검을 쓰다듬었다.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물이요?”
협상하려 가져온 물건을 거의 생으로 강탈해 놓고, 선물?
‘제자나 장문인이나…….’
하나같이 사기꾼 같은 것들이!
욱해서 얼굴이 뻘게진 법정은 연신 불호를 외며 마음을 다스렸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흥분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부에서야 어떤 일이 벌어졌든, 겉으로는 그가 화산을 설득한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화산의 신물을 찾아 돌려주신 것은 제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화산이 아닌 현종이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이 일로 화산이 은혜를 입은 건 아니라는 걸 교묘히 표현하는 현종이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발언에 맨들맨들한 법정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화산의 장문이라 한들 강호 경험은 일천할 텐데, 어찌 이리 능글능글 군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법정은 현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
평생을 빚쟁이에게 시달리다 보니, 약점을 잡히지 않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호를 왼 법정이 살짝 경련하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저 화산을 생각하는 소림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방장.”
어떻게든 대화를 잘 마무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법정은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본다. 아까부터 옆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
“…….”
아니나 다를까, 배웅하러 나온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서 혜연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법정은 속으로 사과를 건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 방장…….”
혜연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불렀지만, 법정은 그저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천하를 위한 일이다.’
더욱이 혜연은 언젠가 소림을 이끌 인재. 이런 희생쯤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부모 잃은 강아지처럼 큰 눈이 그렁그렁한 혜연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참을 수밖에.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법정이 다시 현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하지만 대답은 현종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청명에게서 나왔다.
만면에 미소를 띤 청명을 보자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화산신룡.”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일은 정말 중요하네.”
“알아요.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게 많이 주신 거잖아요? 저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받아먹었으면 일은 제대로 해야죠.”
“…….”
흐뭇하게 가슴을 쭉 내밀고 웃으며 말하는 청명의 대답이 법정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부질없도다.’
그토록 수양에 힘써 왔건만, 말 몇 마디로 심계(心界)가 이토록 뒤흔들리게 될 줄이야.
“……잘 부탁하겠네.”
“네, 걱정 마세요. 아, 대신.”
그때 청명이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맹에 관한 일은 저희가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시게나.”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현종을 향해 반장하자 그 역시 깊게 포권 했다.
“살펴 가십시오, 방장.”
“강녕하십시오, 장문인.”
혜연을 잠깐 흘끗 바라본 법정은 이내 몸을 돌렸다. 장로들이 그를 따라 함께 화산의 산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백천이 나직하게 숨을 토했다.
‘과연 소림의 장문방장이로구나.’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이게 법정이라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소림의 방장이라는 직함에서 나오는 압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구분에 의미가 없지.’
그때 곁에 서 있던 윤종이 작게 속삭였다.
“좀 이상한 기분입니다.”
“음? 뭐가?”
“그렇지 않습니까. 저 소림의 방장이 굳이 화산을 방문하고, 그런 소림의 방장을 장문인이 자연스레 배웅하지 않습니까.”
“…….”
“새삼스럽네요.”
백천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제는 이런 일들이 딱히 특별히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놀랄 일이었다.
어느새 화산이 저 소림을 당당히 상대할 수 있는 문파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저 소림의 방장이 화산을 굳이 찾아왔다는 것은 무척이나 많은 것을 의미한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렇구나.”
“그런데…… 저 양반은 왜 저러고 있습니까?”
조걸의 말에 백천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나라 잃은 충신 같은 얼굴로 망연히 산문 쪽만 바라보는 혜연의 모습이 보였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신 게지.”
아미타불.
아미타불.
산문을 나서 화산을 내려가는 법정에게 따라붙은 법요(法要)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방장.”
법정은 대답 대신 그를 일별했다.
“조금 전의 그 맹이라는 말은…….”
“음.”
법요의 물음에 법정은 슬쩍 침음성을 흘리다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하나, 방장…….”
법정은 말을 아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문득 발을 멈추고 화산을 돌아보았다.
‘화산파…….’
반골(反骨)이다.
적어도 소림의 입장에서 화산은 그랬다. 품기에는 가시가 많고, 내버려 두기에는 거슬리는 존재였다.
‘무작정 억누르는 게 능사는 아니겠지.’
그도 사람 보는 눈은 웬만큼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다. 저 화산신룡이 있는 한, 화산은 결코 소림의 휘하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법정도 바라지 않았다.
반골을 억지로 아래로 내리누르려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빤하지 않겠는가?
굳이 상하로 관계를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면 딱히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방장.”
하나 법요는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는 여전히 방장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을 굳이 화산에 맡길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도 이쪽에서 부탁까지 해 가며……. 다른 대단한 문파도 많지 않습니까?”
법정이 가라앉은 눈으로 법요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여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화산이 무엇이 대단한지 물었더냐?”
“…….”
“그걸 모른다면 더 할 말이 없다.”
“……송구합니다.”
법정이 드물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적임자가 있는 법이다. 이 일은 소림이 아무리 힘쓴다고 해도 해결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작은 일에 욕심을 부리다가는 큰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지금이야 비록 모양새가 나쁠지 모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천하와 소림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법요는 여전히 썩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하나 저들만으로 정말 북해의 일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방장의 깊은 심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저들에 대한 믿음이 통 가질 않습니다.”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좋다.”
“……예?”
법정이 슬쩍 미묘한 표정으로 머금은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해결한다면 천하에 좋은 일이겠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천하에 좋은 일이지.”
“…….”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법정의 말에 법요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하지만 법정의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저 그거면 된 것이다.”
그는 그저 낮게 불호를 외었다.
하지만 그때 법요가 법정이 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쿡 찔렀다.
“한데, 방장. 실패하면 저희가 투자한 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혹여 실패할 시 돈을 돌려받기로 하셨습니까? 아니면 괜히 돈만 날리는 것 아닙니까?”
“…….”
우뚝 멈춰 선 법정이 살짝 떨리는 눈으로 화산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쩐지 창백하게 질린 것 같았다.
“……성공하겠지?”
“예?”
“혜연도 있고…… 그 화산신룡이니, 어떻게든 하지 않겠느냐?”
“…….”
법요는 소림에 입문한 이래 처음으로 법정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 * *
쓰윽. 쓰윽.
현종의 얼굴에서 더없이 온화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그게 자하신검입니까?”
“오……. 화산의 신물이!”
현상과 현영이 격정이 넘실대는 얼굴로 현종의 무릎 위에 놓인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자하신검은 화산의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겠지만, 장로들이 느끼는 의미는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대산혈사에서 끊겼던 화산의 혼이 이제야 다시 돌아온 것만 같지 않은가?
감격에 겨운 눈으로 자하신검을 바라보던 현상이 슬쩍 현종을 재촉했다.
“뽀, 뽑아 보십시오, 장문인.”
“흐음.”
현종이 슬쩍 웃으며 가만히 자하신검을 뽑았다.
영롱하기 짝이 없는 광채가 검신에서 흘러나왔다.
“오! 오……. 으음…….”
감탄사를 뱉었던 현상의 얼굴이 서서히,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현영 역시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현종이 물었다.
“……표정들이 왜 그러느냐?”
“……굉장히 감격적일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현상은 시큰둥한 눈으로 자하신검을 보다 슬쩍 청명의 암향매화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걸 봐서 그런지 영…….”
“딱히 비싸 보이지도 않고.”
현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놈들이! 이 검은 화산의 얼과 역사가 함께하는 검이란 말이다! 화산의 신물이고! 화산의……!”
“아, 예.”
“네네. 알겠습니다, 장문인. 고정하시죠.”
“…….”
현종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화를 눌러 참았다.
이 천벌을 받을 것들!
“그건 그렇고 북해라…….”
“……자하신검 얘기는 이걸로 끝인 거냐? 넘어가는 거냐, 벌써?”
“아니, 뭔 칼 하나 찾았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십니까?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끄으으응.”
앓는 소리를 내는 현종을 무시하며 현영이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일전에 북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한 번은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말에 화산의 문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언젠가 한 번은 북해로 가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황이 그렇게 흘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시기에.”
“시기가 왜?”
“슬슬 쌀쌀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출발하면 그곳에 도착할 즈음엔 한겨울일 텐데, 여름에 가도 몸이 얼어붙는 북해를 하필 이럴 때에…….”
현상의 말에 현영이 혀를 끌끌 찼다.
“이게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군.”
현영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현종이 말했다.
“청명아.”
“네.”
“어찌 생각하느냐? 소림의 방장께서 이 일을 해결해 달라 요구한 건 사실이나, 그 시일을 확실히 정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겨울을 보내고 출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싶은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이 상황이잖아요. 좀 따뜻할 때 가겠다고 뭉그적대다가 북해의 상황이 나빠지면 더 위험해져요.”
“음, 그래. 그 말도 틀리지 않구나.”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바로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청명의 말을 듣던 백천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화산 주변의 소는 이제 남은 뿔이 없어.”
윤종이 절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가 다 뽑았지. 그런데 뭘 더 뽑겠다고.”
그때 현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리고 현영에게 말했다.
“제자들의 북해행에 문제가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거라.”
“예, 장문인!”
이렇게 화산의 북해행이 완전하게 결정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