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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56화 (456/1,567)

456화. 내가 그쪽은 전문가거든. (1)

“방장…….”

넋이 반쯤 나가 버린 법정의 모습에, 혜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마구니(魔仇尼)로구나.’

저 청명 앞에서는 아무리 소림의 방장이라 해도 결국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법정이 멍하니 혜연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혜연아.”

“예, 방장.”

“돈이 무엇이더냐?”

“예?”

대뜸 날아든 뜬금없는 질문에 혜연이 눈을 끔뻑였다.

하나 방장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그는 답을 내어 놓았다.

“좋은 것 아닙니까?”

“…….”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정은 참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완전히 물들었구나.’

설사 저 대답이 틀린 말이 아닐지라도, 어찌 불자라는 이가 저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것은, 혜연이 평생을 소림에서 엄격한 불가의 가르침을 받고 산 이라는 점이다. 그런 이가 고작 몇 달 만에 이런 말을 태연히 하게 되었다.

법정의 눈치를 살피던 혜연이 살짝 헛기침을 했다. 방장의 얼굴에는 평소 찾아보기 힘든 노화가 가득했다.

혜연이 슬그머니 물었다.

“뭐가 잘 안 되셨습니까?”

법정은 앓는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하 만민을 위하여 희생하는 협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체면은 지킬 줄 알았지, 체면은!

소림의 장문인인 그가 직접 찾아와 협의와 천하 만민을 입에 담고 은근히 압박을 하면 그 체면 때문에라도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구파일방이니 오대세가니 하는 이들을 세상에서 떠받드는 이유도, 결국에는 그들의 명성이 드높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명문이라는 이들은 명성에 흠이 생길 만한 일을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놈의 화산신룡인지 뭔지 하는 마구니는 기본적으로 체면이라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 영광? 영과아아앙? 이 양반이 지금 화산에 와서 영광 타령을 하고 계시네? 아이고오! 그 영광이 그리 대단해서 화산이 그 모양 그 꼴이 됐던 모양이지? 이 양반 머리를 민 건 줄 알았더니, 양심에 털 나느라 머리털이 다 옮겨 가셨나 봐요?

그놈 목소리를 떠올리던 법정의 수염 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끄으……. 심장이…….”

“바, 방장! 진정하십시오!”

“으…….”

법정은 머릿속에 남은 잔재를 털어 버리겠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격하게 불호를 외고 나서야 뒤흔들리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실로 마구니로다. 마구니야.”

수십 년 쌓아 온 수양을 단번에 박살 내는 것이 마구니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법정이 수심 깊은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상대가 마구니가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화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화산신룡 청명이 지적한 그대로였다. 북해의 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게 되면서, 소림은 그 지도력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소림이 아니라 어느 문파라 해도 지금 북해를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디 세인들이 그런 사정을 헤아려 주겠는가?

‘천하비무대회만 아니었다면…….’

물론 소림은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강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림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문파가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파여야 한다. 하지만 그 비무대회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후우우.”

법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당하기가 버겁구나.’

모가 난 공을 외나무다리 위에서 튕기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예상이 되질 않았다.

“혜연아.”

“예, 방장.”

“네가 지켜본 화산은 어떤 곳이더냐?”

그 질문에 혜연이 살짝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청명 하나에 대해 묻는다면 사흘 밤낮을 대답하고도 모자랄 것이었다. 하지만 화산이 어떠냐 묻는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예, 방장.”

“그게 전부더냐?”

혜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게 전부입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 그를 응시하던 법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그러하다 답하는 것도 선(善)이겠지. 깨닫지 못한 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든 답을 내려 하는 법이니까.”

묘한 일이었다.

혜연은 분명 불가의 가르침에서는 조금 벗어났다. 하지만 지금 그의 대답에서는 불법이 묻어났다. 오히려 소림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더.

“석가께서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을 박차고 나서셨지. 어쩌면 불법이란 안온한 사찰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여, 많은 것을 배웠더냐?”

“그러합니다.”

혜연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개를 든 그의 눈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은 소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으음.”

“선이란 꼭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 갈고닦는 불도(佛道)만이 삶의 진의(眞意)에 도달하는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좋구나.”

법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옳음이란 의심에서 나오는 법이다.

수양자가 선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는 순간, 그건 선이 아니라 아집이 되어 버린다. 수양자가 추구해야 할 선이란 선(善)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완전한 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궁구하는 자세다.

그런 의미에서 혜연은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하여.”

혜연이 반장을 하며 엄숙하게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이만 소림으로 돌아가 이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고 더 높은 수양에 힘쓰려 합니다.”

“좋은 자세구나. 좋은 자세야.”

법정이 흡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쩍 성장한 혜연을 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절로 따뜻해져 왔다. 청명에게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음. 한데…….”

법정이 그답지 않은 표정으로 슬쩍 혜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 수양 말이다.”

“예?”

그러더니 낮게 헛기침하며 근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 네가 소림 밖에서 충분히 세상을 겪지 못한 것 같구나.”

“……바, 방장?”

생각지 못한 말에 혜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불호를 외었다.

“모든 배움에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네가 지금의 시기를 놓친다면 다시 소림 밖으로 나온다고 하여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느니라.”

“…….”

“그러니 지금은 이곳에 남아 조금 더 화산신룡을 지켜보는 것이…….”

“방장?”

“크흐흐흐흠.”

하지만 혜연은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크게 헛기침을 한 법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혹에 찬 얼굴 앞에서 더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안 된다는구나.”

“예?”

“북해까지는 써먹을 데가 있다고, 데려가야 한다더구나.”

혜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 아니, 그렇다고……!”

“천하 만민을 위한 일인데 어찌 소림만 발을 쏙 빼느냐 하니,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

혜연의 두 눈이 수많은 감정을 전했다. 하지만 법정은 그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외면했다.

“여튼…… 그리되었다.”

“…….”

“아미타불.”

혜연의 눈에서 생기가 빠르게 꺼져 갔다.

* * *

“정말 괜찮겠느냐?”

질문을 하는 현종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이미 법정을 몰아붙여 긁어낼 것을 모두 긁어낸 이상, 북해행은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현종은 도무지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소림의 방장이 앓는 소리 해 대는 걸 보는 맛은 좋았지만…….

그때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태연히 답했다.

“사안이 한두 개면 고민을 해 보겠는데, 이번엔 온갖 게 다 걸려 있잖아요.”

“으음.”

“거꾸로 생각하면, 한 번 움직이는 걸로도 그 모든 얽힌 일을 다 풀 수 있다는 거죠.”

현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영 불안하구나.”

걱정이 가득 어린 목소리에 청명은 가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어떤 재물도, 그 어떤 보물도 너희의 안전과는 바꿀 수 없다. 너희뿐만 아니라 화산의 어떤 문하도 마찬가지란다.”

“네. 알고 있어요.”

“청명아. 마교는 지금껏 네가 얽혔던 곳과는 다르다. 그들은 정말 두려운 존재들이야.”

청명은 부정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에 대해서 청명보다 잘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음.”

“하지만 세상에는 위험하니 피해야 하는 일과 위험하니 빨리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죠.”

“……그렇기는 하지만…….”

청명이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사람은 원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잖아요. 지난 전쟁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죠. 수면이 잔잔하다고 물밑까지 잔잔한 건 아니라는 걸요.”

중원이 마교의 준동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원은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에 취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빙정, 그리고 한철. 거기에 새외오궁 중 하나인 북해빙궁까지.

북해에는 많은 것이 얽혀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청명이 북해로 가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됐으니,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

그 소림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북해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청명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천우맹은 아직 튼튼하지 못해.’

천우맹이 완전히 그 기틀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변수를 줄여야 했다. 그래야 화산이 좀 더 안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

“마교는 무섭죠.”

“그렇지.”

“하지만 무섭다고 마냥 눈을 돌릴 수는 없잖아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이 예전처럼 되기 위해서……. 아니, 예전 이상으로 훌륭한 문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마교를 막지 못했다는 과거를 이겨내야 해요.”

“…….”

현종이 침중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 짐작하고 있느냐?”

“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청명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번에는 저희가 먼저 치고 들어가야죠.”

“…….”

“그래야 지금의 상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적을 모르고 적을 상대할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라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않으려고요.”

청명은 목덜미에서 잠깐 꿈틀거리는 백아를 쓸며 씨익 웃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화산이 선봉에 서서 마교를 막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건 화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니까 해 볼 만하다는 거죠.”

현종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청명아.”

“네, 장문인.”

“우리 화산은 마교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

잠깐 말을 멈춘 현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선봉에 서서 마교를 막지 않았더라면…….”

이내 작은 한숨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수없이 선조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던 세월도 있었단다.”

청명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말에 대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잠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청명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화산의 문도임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 원망스러운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분들 덕에 이 화산이 모든 것을 바쳐 천하를 지켜 내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단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확신 어린 목소리에 청명은 결국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현종의 얼굴을 보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 내가 너희에게 스스로의 안위만을 지키라 말할 수는 없겠지.”

부모가 된 이는 언젠가는 자식을 제 품에서 내어 놓아야 하고, 스승이 된 이는 언젠가는 제자의 성장을 인정해야 한다.

안타깝고 아리더라도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만 약속하거라.”

“네?”

“그곳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화산은 언제나 너의 뒤에 설 것이다. 그러니…….”

잠깐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린 현종은 이내 살짝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거라.”

“…….”

그 말을 들은 청명의 입가에는 비로소 미소가 맺혔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문인.”

아니, 미소로도 모자랐는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마교 놈들의 대가리를 깨 버리고 돌아올 테니까요!”

이번에는 이쪽에서 간다.

망할 마교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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