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4)
반짝인다.
햇살을 받은 법정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가 하나.’
아니, 더 있네.
법정의 뒤쪽에 선 소림의 승려들을 가만 보던 청명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모로 꺾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퉁명스러웠다.
“저 양반이 여기는 웬 일이래?”
“소, 소림의 방장께 저 양반이라니, 인마!”
윤종이 기겁하며 말렸지만 청명은 태연하기만 했다.
“뭐 어때? 우리 장문인도 아닌데.”
“…….”
말을 잃은 윤종은 결국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가 보자꾸나.”
현종이 제자들을 이끌고 산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깊게 포권 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장.”
“간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숭산에서 이곳까지는 먼 길인데 어찌 이리 걸음 하셨습니까?”
그러자 법정 역시 미소를 내걸며 답했다.
“아무리 길이 멀다 해도 목을 축일 감로(甘露)가 있는 곳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현종의 눈이 살짝 빛났다.
‘감로라.’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이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서늘함을 느껴야 했다.
“갑자기 추운데?”
“겨울이 다가오고는 있잖아.”
“그렇긴 한데…….”
법정이 고개를 돌려 짝 다리를 짚고 선 청명을 바라보았다.
“잘 지내셨는가?”
“소림에서 웬 짐덩이를 화산으로 보낸 덕분에 그리 편하지는 않았어요.”
“짐덩이라.”
법정이 쓰게 웃었다.
짐덩이라 함은 혜연을 말하는 것이리라.
“짐도 짐 나름이겠지. 그래도 그 정도면 귀보(貴寶)라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네? 귀보요? 저 대머리가?”
“…….”
“거 군식구를 보내실 거면 돈이라도 좀 쥐여 보내시지! 안 그래도 화산에서는 찾기도 어려운 풀만 뜯어먹는 놈을 빈손으로 보내요? 돈도 많은 분이?”
“…….”
법정이 눈을 끔뻑였다.
돈을 쥐여 보낼 생각을 못 했던 건 사실이지만…….
‘찾기도 어려운 풀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법정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하하……. 그래도 나름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도움?”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이자 법정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불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청명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금세 다시 떠올리게 된 법정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무안한 건 법정뿐만이 아니었다.
현종은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청명이 놈이 더 사고를 치기 전에 법정과의 대화를 차단하겠다는 듯이.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대 소림의 방장을 산문에 세워 두었다고 세인들이 욕할까 두렵습니다.”
“말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어디 감히 대접을 바라겠습니까? 물이나 한 잔 내어 주시면 가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로 겸양의 말을 나누던 바로 그 때였다.
“방장!”
전각을 박차고 나온 누군가가 격한 목소리로 외치며 법정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오! 혜연이로…….”
어?
법정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혜연?’
응?
그는 크게 치뜬 눈을 몇 차례나 끔뻑였다.
‘맞는데?’
아닐 리가 없었다.
이 화산에 소림을 상징하는 황포를 입고 있을 이가 누가 또 있을 것이며, 거기에 굳이 머리까지 밀 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지금 그에게 달려오는 이는 혜연인 게 맞았다.
한데…….
‘혜연이가 맞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만지면 솜털이 보송보송 묻어날 것 같았던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왜 구릿빛의 피부가 미끈하게 빛나는 청년이 뛰어오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얼굴도 분명 뭔가 달라졌다.
피부색이 짙어져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슬쩍슬쩍 고개를 숙여 대던 수줍은 소년은 없고, 금방이라도 마라(摩羅)를 맨손으로 쳐 죽일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의 신장(神將)이 있었다.
‘어…….’
법정은 두 눈을 힘껏 비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가만 보면 겉모습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법정은 이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눈빛.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부드럽고 유약하던 혜연의 눈빛이, 미묘한 이글거림을 담고 번뜩이고 있었다.
법정의 앞까지 달려온 혜연이 격정적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방장!”
“……혜연이더냐?”
“예, 방장!”
뻔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건만, 법정은 그 대답을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보송보송하고 노란 병아리를 두고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왔더니 그 병아리가 커다란 수탉이 되어 홰를 치며 날아다니고 있는 광경 같았다.
그 미묘한 기분에 법정이 입을 뻐끔거렸다.
“……뭐가 많이 변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천과 그 일행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법정의 말에 공감했다.
“많이 변하기는 했지.”
“그러게요. 항상 같이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변했죠.”
“……뭔가 좀 죄책감이 느껴지는데.”
법정은 기가 막히고 답답하여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더냐?’
불법을 찾겠다고 나간 놈이 삼장법사가 되어 서장이라도 다녀온 것도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몇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한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던 법정이 순간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이곳은 화산이고 그는 소림의 방장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일이 있더라도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짐짓 근엄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크흠, 그래. 깨달음은 얻었느냐?”
“……깨달음은 얼어 죽을.”
“응?”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하지만 혜연은 그런 법정의 반응을 헤아리지 않고 눈물을 글썽여 댔다.
“방장! 저를 데리러 오신 것이지요? 저는 방장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조금 당황한 법정이 되물었지만 혜연은 애초에 귀가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법정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어, 어서 소림으로 가십…….”
“저, 저. 쯧쯧.”
그 광경을 본 청명이 혀를 찼다.
“짐승 새끼도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는 아는 법인데, 사람이라는 놈이 하는 꼴 봐라, 저거.”
“…….”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혜연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 틀린 말은 아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기는 했지.
사람을 소처럼 부리고 풀만 먹여서 그렇지!
“방해하지 말고 나와.”
청명이 저벅저벅 다가와 혜연의 머리를 찰싹 소리 나게 붙잡았다.
혜연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망울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러면서도 청명이 질질 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점이었다.
그때 현종이 헛기침을 한차례 하며 입을 뗐다.
“일단 안으로 가시죠.”
“……그, 그러지요.”
법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이구나.’
화산이야.
“크흠.”
“으음.”
모두 마주 앉고서도 쉬이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미묘한 어색함과 정적이 흘렀다.
사실 화산과 소림은 서로 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리한 이들도 서로 마땅히 꺼낼 말이 없었다.
‘뭔 말이라도 좀 해 보십시오, 장문인.’
‘숨 막혀 죽겠습니다.’
장로들이 눈으로 채근하자 현종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도 어색하다, 이놈들아.’
비무대회에서야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현종도 소림의 장문인을 상대하는 것은 더없이 부담스러웠다.
소림은 소림 나름대로 입을 닫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자리에서 태연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왜 다들 말씀이 없으세요?”
태연하고 무구한 목소리에 화산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향했다.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청명을 보는 순간 그들의 눈에는 나름의 안도가 어렸다.
‘저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살다 살다 저놈의 성격이 반가운 일이 생길 줄이야.’
장로들이 눈치를 주자 청명이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법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제법 먼 길인데.”
“여러 가지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네.”
법정은 가볍게 대꾸하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향을 음미하며 홀짝였다.
“차 맛이 좋습니다, 장문인.”
“먼저 대접받은 적이 있으니 신경 써서 우려 봤습니다. 질 좋은 차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그래도 화산에 오셨으니 매화차를 한번 맛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여.”
“향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현종을 바라보았다.
“만인방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아…….”
“화산이 참으로 굉장한 일을 해냈습니다.”
법정은 새삼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미타불. 그 만인방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진대, 화산의 기세가 얼마나 높은지 익히 알 수 있었습니다. 세간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감사합니다.”
법정이 슬쩍 장로들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일전에 소림에서 뵀을 때를 생각하면 그사이 화산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장문인을 비롯한 화산의 문도들이 얼마나 노력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화산 장로들의 어깨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사실 이 정도 칭찬이야 이제껏 제법 들었지만, 그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림의 방장의 입에서 나오는 건 그 의미가 남달랐다.
누가 뭐라 해도 천하 무림을 통틀어 가장 높은 권위를 지닌 것이 소림의 방장이니까.
그들의 입꼬리가 어찌할 수 없이 슬쩍슬쩍 말려 올라가자 법정이 슬쩍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한 송구합니다. 본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주변의 문파들이 지원해 주는 것이 법이거늘, 워낙 전격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실로 갑작스럽기는 했지요.”
“종남이 봉문만 하지 않았더라면 화산이 홀로 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 안타깝게도 종남의 봉문은 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괜찮습니다.”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공사다망하신 소림의 방장께서 이 먼 곳의 일까지 신경 쓰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하는 게 기본이지요.”
“아닙니다, 장문인. 이건 제가 사과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법정이 가라앉은 얼굴로 연신 불호를 외었다.
한편 청명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 너구리가 또 뭘 하려고…….’
화산이 주변 문파의 도움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소림의 잘못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방장의 반성은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고는 하나, 귀주(貴州)의 만인방이 단번에 섬서까지 치고 올라올 것이라고는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걸 어찌 방장께서 미리 알고 대비하시겠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제가 불편해집니다.”
“아미타불. 장문인, 어찌 그것이 제 잘못이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예?”
법정이 슬쩍 현종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상심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실망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현종이 슬쩍 얼굴을 굳히며 묻자 법정이 슬쩍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니 지금 화산이 구파가 아닌 다른 이들과 손을 잡으려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문인.”
청명의 얼굴이 슬쩍 구겨졌다.
‘이거구나!’
왜 이 먼 곳까지 굳이 행차했나 했더니, 이 말을 하려고 왔구나.
소림의 정보력이라면 화산이 다른 문파들과 연합하려 한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장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저 망할 땡중 놈이!’
현종 역시 법정의 말에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해 댔다.
“크흠. 그 일은…….”
“물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장문인. 하나…….”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진 법정의 눈이 현종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다른 문파들이 과연 그것을 이해할는지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청명이 얼굴을 확 구기며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런데 이 양반이?!”
“청명아!”
“가만히 있거라!”
하지만 장로들이 동시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어쩔 도리 없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림의 장로들이 다 보고 있는 마당에 삼대제자가 화산의 장로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하지만 법정은 그런 그의 마음을 능히 짐작한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
“예, 방장.”
“둘이서 따로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꽤 중요한 이야기인지라.”
“으음.”
현종이 잠깐 고민에 잠겼다.
화산의 장로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는 현종이지만, 확실히 지금 법정의 좌우로 앉은 소림의 장로들은 부담스러웠다.
“그러시지요.”
두 사람은 각각 장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 있거라.”
“자리를 비워 주거라.”
그 말에 자리를 채우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
그때 법정이 말했다.
“자네는 좀 남게나, 화산신룡.”
나가려 일어섰던 청명이 법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요?”
“그렇다네.”
“왜요?”
“그야 자네와 할 말이 있기 때문이지.”
능글능글 받아치는 법정의 태도에 청명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양반이 저번에 혼이 덜 났나 본데?’
그럼 어디 한번 보자.
어떤 소리를 늘어놓는지.
청명은 두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날선 그의 눈빛과 법정의 심유한 눈빛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