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3)
“인생이란…….”
청명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손을 뻗었다. 찬 이슬이 맺힌 술병이 잡혔다.
술을 꼴깍꼴깍 들이켠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놓인 안주들을 바라보았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다고 현영이 손수 고아 준 오리와 먹음직스러운 동파육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게다가…….
“지금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다리가 보인다잖아, 다리가!”
“욕할 힘이 있으면 더 끌라고! 더!”
“어디 눈을 부라려? 확 먹물을 쭉 짜내 버릴라!”
“…….”
백천을 필두로 하여 백상, 윤종, 조걸이 화산의 제자들을 비틀어 짜내고 있었다. 검을 검집째 한 손에 들고 소리를 질러 대는 꼴이…… 딱 뭐랄까, 어…….
잠깐 생각하던 청명은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알 게 뭐냐.’
효율이 좋으니 됐지.
여하튼.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다고, 위를 갈구니 알아서 그 아래까지 갈궈지는 아름다운 체제가 알아서 척척 돌아가는 중이었다.
응?
이거 이럴 때 쓰는 말 아니라고?
남이사!
청명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머리에 눌렸는지 백아가 잠시 꿈틀댔지만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용케 여기까지는 왔네.’
돌이켜 보면 참 고단한 세월이었다.
재수도 없게 거지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서 화산으로 오는 데만 한세월.
말 안 듣는 어린 사형들을 사랑으로 이끌고, 그를 의심하는 장문인과 장로들은 정의로운 의기로 설득하기를 수차례.
그 힘겹고 지난한 싸움 끝에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크으. 이게 인간 승리지, 인간 승리. 안 그렇소, 장문사형?”
- 참 오래도 걸린다.
“이 양반이 진짜.”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아, 그럼 직접 해 보시든가!
나니까 이 정도로 빨리 여기까지 왔지. 장문사형이 했으면 지금쯤 장문인이랑 둘이서 바둑이나 두고 있겠지!
“쯧. 말해 뭐 해.”
씨근덕거리던 청명은 이내 배를 통통 치며 다시 풀어진 표정으로 화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수련하는 사형들과, 제 할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한 윗어른들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좀 문파 같아 보였다.
처음 화산에 올랐을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다만…….
“아직도 멀었어.”
그래 봐야 이제 겨우 문파의 구색을 갖춘 것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화산이 만인방을 이겼다고 칭송하지만, 그건 정파의 탈을 쓰고 있는 화산이 사파인 만인방을 망신 주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사심이 듬뿍 담긴 평가일 뿐이다.
화산은 전력을 다해서 만인방의 전력 중 일부를 격퇴했을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게 지금 화산의 한계였다.
“아직 더 강해져야 돼.”
만년한철검은 화산 문도들의 실력을 못해도 삼 할 정도는 올려 줄 수 있겠지만, 그래 봐야 삼 할. 도토리가 조금 더 큰 도토리가 된 정도에 불과했다.
아직은 감히 과거의 화산에 비할 문파가 아니었다.
“저 도토리들이 강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문제는 세상이 그들을 무한정 기다려 주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되겠냐마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천우맹도 아직은 부족하고.”
야수궁과 사천당가, 화산 세 문파의 연합으로는 맹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천하에 손꼽히는 열 문파가 모인 구파일방이나, 다섯 가문이 모인 오대세가 같은 곳에 비한다면 확실히 처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파를 더 받아야 한단 소리인데.”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질이 부족하면 양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화산 문도들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제자를 더 받아서 전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었다.
청자 배 아래에 명자 배를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고, 속가 제자들을 본산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이었다.
다만 한 가지.
“……한철이 좀 더 있으면 좋겠는데.”
대충 어찌어찌 제자들에게 모두 돌아갈 만큼 한철검을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본산에 와서 수련을 하고 돌아갈 속가제자들에게도 상징적인 매화검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물론 본산 제자들이 쓰는 것처럼 한철이 많이 섞인 검을 만들어 주는 건 무리일 것이나, 그래도 ‘나 한철 좀 들었소!’라고 당당하게 빛을 내는 검 정도는 주고 싶은데…….
“이씨, 왜 한철이 씨가 말랐냐고!”
청명은 육포를 꺼내 씹으며 당군악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그런데 한철이라는 게 결국에는 철이잖아요. 다른 철은 다 나는데 그것만 뚝 끊기듯 사라진다는 게 말이나 돼요?
- 내가 한철이 언제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던가?
- 백 년쯤?
- 자네 한철이 어디서 나는지는 아는가?
- 땅에서 나겠죠.
- ……만년한철(萬年寒鐵)이네. 질 좋은 철이 극한의 음기를 만 년 동안 받아 그 성질이 바뀐 게 바로 한철이지. 그럼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겠는가?
- 북해?
- 그렇네. 한철은 바로 북해에서 나는 빙궁의 특산품이지. 그런데 지난 전쟁을 계기로 중원과 북해의 거래가 끊어지지 않았는가.
- …….
- 그래서 더는 구할 수가 없는 거라네.
“끄응.”
청명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그 지휘부 놈들을 다 파묻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전쟁도 말아먹더니, 지금의 청명에게까지 피해를 준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텐데.
“에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그거 구하려고 북해까지 가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고개를 내저은 청명이 술병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응?
그런데 아무리 툭툭 더듬어도 술병이 잡히지 않았다.
술병이 어디…….
“왁! 깜짝이야!”
청명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틀었다. 어느새 처마 위까지 올라온 유이설이 술병을 뺏어 들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왜 또 귀신처럼 그러고 있어, 사람 간 떨어지게!”
“술 안 돼.”
“왜?”
“현영 장로님이 찾으셔. 일 생겼다고.”
“엥?”
뜬금없는 소식에 청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또 무슨 일?”
그리고 훌쩍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없다고요?”
청명의 망연한 물음에 황종의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아니 왜?”
“물건이 씨가 말랐습니다.”
어…….
이거 어디서 듣던 이야긴데?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분명 저번에는 자목초 외에는 다 구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때는 분명 그랬습니다.”
황종의는 답답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장. 아시겠지만, 물건이라는 건 때에 따라 공급이 다른 법입니다. 그래서 가격이 바뀌는 거지요.”
“돈은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이제 화산은 부자거든요!”
청명이 엣헴 하고 배를 쭉 내밀었다.
하지만 황종의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압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가 화산의 재력을 왜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억만금이라도 줘서 구할 수 있다면 구해 보겠는데 지금은 물건 자체가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도장.”
“자, 잠깐만요.”
청명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렸다.
“넘쳐나던 빙정(氷精)이 왜 갑자기 없어져요?”
“……예전에도 넘쳐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돈만 많이 내면 구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을 뿐이죠.”
“여하튼 있었잖아요.”
황종의가 송구하다는 듯 머리를 긁는다.
“아시다시피 빙정은 북해에서 나는 물건입니다. 오직 북해에서만 나는 물건이죠. 그간은 북해와 중원의 교역이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암암리에 물건이 좀 돌기는 했습니다. 척박한 북해가 먹고살려면 중원에 물건을 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랬죠.”
한철은 안 팔아도 빙정은 팔았다. 그러니 빙정을 구할 수 있었지. 그 빙정으로 만든 게 바로 자소단이 아니던가?
“그런데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북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중원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어…….”
이거 소림에서 들었던 이야긴데.
“그리고 북해인들도 북해에서 일절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는 영문도 모르고 교역이 끊겨 버린 상황이죠.”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예.”
황종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이 중원인의 출입을 다시 재개시켜 주지 않는 이상, 더는 물건을 구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
청명은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안 되는데……. 그럼 그걸 못 만드는데?”
녹림왕에게 혼원단을 주기로 했다. 문제는 지금 화산에는 혼원단이고 자소단이고 단 한 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자소단은 남겨 둬 봤자 약효만 떨어진다고 모조리 먹여 버렸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만인방이 쳐들어왔을 때 치료를 위해 모조리 써 버렸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천당가에서 야수궁주 맹소를 만나며 자목초를 더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자목초만 있으면 자소단이든 혼원단이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러면 망하는데?”
청명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녹림왕?
아니, 지금 임소병이 중요한 게 아니지!
임소병이고 나발이고 빙정이 더 이상 공급이 안 된다면 자소단도 추가로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청명이 그 망할 자소단의 제조법을 구하고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데 그 한 번 만든 걸로 끝난다고?
“이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안 돼!
내 자소단!
그때 대화를 들으며 침음하던 현영이 물었다.
“그럼 진정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예, 장로님. 송구하지만 저희 상단의 능력으로는 무립니다. 아니, 저희가 아닌 어떤 상단도 빙정을 구하지 못할 겁니다. 혹시 몰라 이전에 빙정을 산 이들이 되팔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있지만…….”
“그렇게 찔끔찔끔 쥐꼬리만큼씩 모아서는 답이 안 나오지.”
“그렇습니다. 게다가 값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 확실한 터라 도무지 물건을 내어 놓질 않습니다.”
“빌어먹을 사재기꾼들!”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여하튼 방법이 없습니다. 중원인은 물론이고, 북해인이 아니면 지금 북해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목이 달아납니다.”
“……그렇겠죠.”
그 소림의 속가 제자도 북해를 조사하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그때.
가만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는 갈 수 있잖아.”
“응?”
“잊었어? 야수궁주님이 다른 새외오궁에 네 이야기를 해 뒀다고 했잖아? 박대하지 말라고.”
“…….”
처음 듣는 말에 현영이 놀란 얼굴로 청명을 보며 물었다.
“사실이더냐?”
“어…… 그런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러자 윤종이 서글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또…… 직접 가야겠네.”
조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곧 겨울인데! 북해에 가면 뼈가 시릴 텐데.”
하지만 백천은 어쩔 수 없다며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지 않느냐.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그러자 절망하던 둘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나.
입장이 조금 다른 듯한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반대다.”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현종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 일은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운남도…….”
“그것과는 다르다. 운남과 북해는 상황이 달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종은 이미 소림의 방장인 법정의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마교.’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해에서 이송해 온 소림 속가의 시체에서 마화가 발견되었다. 북해가 마교와 얽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물론 자소단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너희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중한 일은 아니다.”
현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너희가 북해에 가는 걸 허락할 수 없다.”
준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곳에 앉은 모두가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때.
“자, 장문인!”
누군가가 접객청의 문을 과격하게 두드렸다. 현종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 지금 산문에!”
“음?”
실로 다급한 그 목소리에 모두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적?’
‘침입자인가?’
만인방 때 덴 적이 있어서인지,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왔다. 청명을 위시한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얼마 이동하지 않아 산문에 선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
모두가 발을 우뚝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꺾었다.
“저…….”
청명이 두 눈을 끔뻑였다.
누런빛을 띤 황포.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반질반질한 머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산문에 선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이 신음하듯 말했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그, 그러게?”
모두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때 이쪽을 발견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와 반장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려, 화산신룡.”
소림의 장문인인 법정이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