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2)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백천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었다.
“좋구나.”
“정말 좋습니다.”
그의 옆에 누운 윤종과 조걸 역시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옅은 매화 향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래서 집 나가면 고생이라 하나 봅니다.”
“그래, 그렇구나. 화산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대체로 청명이 놈 때문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긴 여정을 끝내고 화산에 돌아와 이리 여유를 가지게 되니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에 윤종이 초를 쳤다.
“……장문인만 앓아눕지 않으셨다면 완벽했을 텐데.”
“…….”
순간 셋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현종은 천우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는 말 그대로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버렸다.
청명이 좋은 감투 가지고 왔는데 반응이 왜 그러냐는 말을 했다가 회초리를 맞을 뻔했다는 건 넘어가고…….
“벽이라도 안 무너졌으면 덜 처량하셨을 텐데.”
“……그러게요. 방이라도 좀 바꾸시지.”
벽이 무너져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방에 자리를 깔고 누운 모습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백천과 윤종이 어찌어찌 천을 가져와 임시방편으로 벽을 막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앓아누울 일입니까?”
조걸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 하나로도 골치가 아프신 분인데 할 일이 더 늘어나는 것 아니더냐.”
“화산 하나로 골치가 아픈 건 청명이 때문이고요.”
“맹에도 청명이는 있잖느냐.”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내가 서안까지 갈 마음이 있다고 해도, 내 발로 걸어가는 것과 태풍에 휩쓸려 서안까지 날아가는 게 같을 수는 없잖느냐.”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현종은 서안에 갈 마음이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여하튼 그…….”
덜컹!
“화산에 돌아왔으니,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체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그간 전념하지 못했던 검술 수련도 다시 시작…….”
“끄으으으으!”
덜컹! 덜컹!
백천이 미간을 좁히고 몸을 일으켰다.
“속도가 떨어지니 수레가 흔들리잖느냐! 제대로 달리지 못해?”
“끄으……. 사, 사숙. 이거 너무 무겁습니다.”
“뭔 놈의 수레가 쇳덩어리로 만들어져서는…….”
그들이 누워 있던 곳은 청명이 여정 내내 누웠던 그 쇠수레 위였다. 몸을 일으킨 세 사람이 수레를 끌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발 보인다? 발? 발?”
“나는 이걸 끌고 사천까지 갔다 왔어!”
쏟아지는 매정한 말에, 땀을 비처럼 쏟으며 수레를 끌던 화산의 제자들은 몰래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우리가 시켰냐고!’
‘왜 청명이한테 당해 놓고 애먼 우리한테 화풀이야!’
연무장 중앙에는 다른 제자들이 혀를 빼물고 쓰러져 있었다. 이미 한차례 수레를 끈 인원들이었다. 숨만 겨우 붙어 있는 듯 널브러진 그들은 기절을 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조걸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이게 진짜 좋은 수련법이거든. 이 좋은 걸 나만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개새…….”
“응?”
“아, 아닙니다.”
울분을 삼킨 이들이 다시 수레를 힘껏 끌었다.
백천은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살짝 눈을 빛냈다.
‘사숙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군.’
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전력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입을 열 힘이 있다는 것은, 이들의 기초체력이 그가 사천으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의미였다.
“물에 젖은 행주도 아니고, 다 짜냈다 싶어도 어찌어찌 쥐어짜면 한 방울이라도 더 나오는구나.”
청명이 놈이 우릴 괴롭힐 때 이런 마음이겠지.
‘이해해 버리는 내가 싫다.’
백천이 혀를 차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더 빨리 달려라! 더!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뛰고 또 뛰어!”
“끄으으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아!”
화산의 제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수레를 끌며 광속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잠시 후.
“끄아아악!”
“더는 못…… 더는 못 끌어…….”
수레를 끌던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둘 엎어지기 시작하며 수레가 멈춰 섰다.
백천은 혀를 끌끌 차며 수레에서 내렸다.
“모두 주목!”
“주목!”
널브러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정렬하여 백천을 주시했다.
“검은 마음에 드느냐?”
“예! 사형!”
“최고입니다, 사숙!”
검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허리춤에 매인 한철검으로 슬쩍슬쩍 내려갔다.
‘이걸 내가 받게 되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최고야.’
만년한철로 만든 검은 부유하기로 이름 높은 무당에서도 장로급이나 돼야 손에 쥐어 볼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보검이다. 그런 검을 일반적인 문도들에게 지급한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검의 가치는 너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 너희에게 그 검을 하사한 사문과 장문인의 은혜를 잊지 말거라.”
“예, 사숙!”
모두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백천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만 조금 문제가 있는 게…….”
“……예?”
“그 검 말이다.”
그가 슬쩍 한철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게 좀 비싸다.”
“…….”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흠칫하며 제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납득한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비싸겠지.’
‘엄청 비싸지. 만년한철인데.’
모두 이해한 눈치를 보이자 백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그게 많이 비싸다. 그런데 생각해 봐라. 너희는 이제 그 검을 들고 강호에 나설 일이 생길 텐데, 혹시라도 그걸 뺏기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큰일이 납니다.”
“아니,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걸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
잠깐 잠잠하던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이건 청명이 놈이 문제가 아니다.’
‘현영 장로님이 우릴 죽일 거야.’
이건 감당할 수 없는 미래였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진심에서 우러난 대답이었다. 백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호에는 이런 말이 있지. 보물은 그 주인이 따로 있다고. 보물을 운 좋게 얻는다 해도 결국 그걸 지킬 힘이 없다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지. 다시 말하자면…….”
백천이 스산한 시선으로 제자들을 바라본다.
“너희가 그 검을 쓰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검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화산 제자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더없는 정론, 하지만 들뜬 마음에 잊어버렸던 정론이었다.
“그러니 엄살들 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라. 너희는 스스로가 그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래. 그럼 다음 조.”
“…….”
몇몇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수레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때 윤종이 백천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사숙.”
“응?”
“백상 사숙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까부터 안 보이시던데?”
“아, 백상? 녀석은 내가 잠깐 화음으로 보냈다.”
“예? 화음이요? 갑자기 화음은 왜?”
“부족하잖으냐.”
“예?”
백천이 슬쩍 쇠수레를 향해 턱짓했다.
“이거.”
“…….”
“애들도 많은데 하나로 하려니 비효율적이라 몇 개 더 만들어 달라고 했지. 겸사겸사 산 오르면서 끌 수 있는 수레도 따로 제작하고.”
“…….”
“하하하. 애들의 하체가 아주 단단해지겠는걸?”
윤종이 살짝 떨리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어디까지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 * *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는 익숙해졌단다.”
운검이 빙그레 웃으며 청명에게 차를 내밀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왼손 하나지만, 그래도 차를 끓이고 따라 내는 움직임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불편하진 않으시고요?”
그 말에 운검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불편한 법이다.”
“…….”
“사람은 새처럼 날지 못하고, 물고기처럼 헤엄치지 못한다. 말처럼 달리지도 못하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탈 수도 없지. 그럼 불편한 게 아니겠느냐?”
청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두 팔을 쓰지만, 나는 이제 한 팔을 써야 하는 것뿐이지. 불편함이 조금 커졌지만, 이는 그저 조금 달라진 것이지.”
운검의 목소리에 현기가 묻어났다.
“도를 좇고 무학을 익혀 나간다는 것은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전보다 조금 더 불편해졌다고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 그저 조금 더 노력해야지.”
사실 청명은 이런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평생을 도사로 살아오긴 했지만 때때로는 이런 도에 관한 말이 뜬구름을 잡는 걸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나.
무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았을 청문에게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운검을 존중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그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청명은 운검의 왼쪽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그사이 더욱 탄탄해져 있었다. 옷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이리 줘 보거라.”
“네.”
청명이 가져온 한철검을 내밀었다. 운검을 위해 가지고 온 것이었다.
운검은 한 손으로 천천히 검을 뽑아 백색 검신을 바라보았다.
“좋은 검이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검이야. 날카롭고 단단하구나.”
그리고 그는 청명을 가만히 보았다.
“청명아.”
“예, 관주님.”
“너는 정말 잘해 주고 있다.”
“…….”
청명이 입을 닫았다.
운검이 보내는 시선이 미묘하게 청명을 뒤흔드는 까닭이었다.
“이 검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겠지. 너를 따라오지 못하는 화산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청명은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하지만 운검은 그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양 미소 지었다.
“홀로 앞서갈 수 있는데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게 답답하진 않더냐?”
“……음.”
청명은 살짝 묘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운검을 똑바로 보았다.
적당히 둘러댈 수 있는 말이야 많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엄청 답답했죠.”
청명이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 지금쯤 백천과 다른 사형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개인 수련에 매진하고 있거나.
“그런데 요즘은 괜찮아요. 사숙들도 사형들도 다들 열심히 해 주고 있으니까요.”
“그렇더냐?”
“네. 요즘은 제가 감당이 안 될 때도 있어요.”
“……그것 참 범상치 않게 들리는 말이구나.”
운검은 농처럼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저 검만 보고 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사경을 헤매다 돌아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명아.”
“예, 관주님.”
“그렇다면 그리 급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
“화산에 돌아왔으니 조금 쉬도록 하거라. 쉬지 않고 달린 말은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럼 다시는 전처럼 달릴 수 없게 된단다.”
운검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래.”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봐 오는 운검의 모습에 청명은 살짝 머쓱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쪽이 더 어른 같네.’
살아온 세월로 따지면 상대도 안 되는데 말이다. 이래서 장문사형이 그렇게 철 좀 들라고 말했던 걸까.
“좌수검은 좀 어떠세요?”
“아직은 시작하지 않았다.”
“응? 왜요?”
운검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네 말대로 아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치고 단단한 하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주면서 나는 검술만 익히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
“아…….”
“그래서 우선은 나 역시 몸을 다시 만들고 있다. 굳건하게 뿌리를 내릴 때까지 말이다. 안 그래도 이제는 성과가 보여 슬슬 시작하려던 참이다만.”
운검이 청명이 보며 말한다.
“어떠냐. 좀 도와주겠느냐?”
“저랑 같이 하시면 고달프실 텐데.”
“하하하. 그동안 아이들을 괴롭혔으니, 나도 응당 괴롭힘을 받아야겠지.”
“그런 각오시라면 얼마든지요!”
“좋구나. 어디 사손 녀석의 가르침을 받아 볼까?”
“그냥 도와드리는 거죠. 가르침 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그게 그거지, 이놈아.”
운검이 하나 남은 손으로 청명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백매관 뒤 연무장에선 새벽이 깊어 가도록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