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저 사람이 여길 왜 와? (1)
“오오! 이것이……?”
현종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당가에서 만든 만년한철검이란 말이지?”
“네.”
대답은 간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과연.”
현종은 손을 뻗어 나무 상자를 가볍게 쓸어 보았다.
“당가에서 만든 물건이라 그런지 상자도 범상치 않구나.”
백천이 미소를 지으며 그런 현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한철검을 담은 목궤는 딱히 대단할 것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런 현종의 착각이 우습지 않은 이유는 지금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열어 보십시오, 장문인.”
“그래. 그래야지.”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목궤를 열었다.
끼이이익.
“오오.”
마침내 드러난 만년한철검의 모습에, 현종의 눈이 격정으로 일렁였다.
그의 시선은 매화가 새겨진 검에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은은한 묵색을 띤 검집만 보아도 이 검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더욱 현종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검집과 손잡이 아랫부분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었다.
‘말 그대로 매화검이구나.’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대께서 이것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검 하나 쥐여 주지 못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한철검이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명검이겠으나, 현종에게는 이 검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현종은 은은하게 웃으며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덥석!
그의 손이 검에 채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벼락같은 손놀림으로 낚아채 갔다.
“…….”
당황하여 고개를 드니 현상이 어느새 한철검을 쥐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거…….”
……이놈아.
그래도 내가 장문인인데, 내가 보기도 전에…….
하지만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현상의 눈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광기가 어려 있었다.
“……한철검.”
“…….”
스르르릉.
현상이 천천히 겁을 뽑아 들었다. 일반적인 검보다 확연히 더 흰 검신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오…….”
현상의 입에서 결국 탄성이 흘러나왔다.
평생 검을 휘둘러 온 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이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챌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현상이 가만히 손을 뻗어 매화가 음각된 검면을 매만졌다. 그저 살짝 만졌을 뿐인데, 서늘한 한기가 손끝으로 시리게 파고들었다.
손끝으로 검면을 가볍게 튕기니 검이 더없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어 대었다.
“굉장하구나. 정말 굉장한 검이야!”
현상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연신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저리도 좋을까?’
일만 터졌다 하면 헤벌쭉 입이 벌어지는 현영과는 달리, 현상은 언제나 최대한 평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리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결국은 현종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리도 좋으…….”
“어디 한번!”
현상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자 검 끝에서 새파란 검기가 뿜어져 나왔…….
검기?
“아아아아악!”
“히이이이익!”
다짜고짜 뿜어져 나온 검기에 백천과 그 일행이 모두 바닥을 구르며 몸을 날렸다.
서걱!
검기는 이내 벽면에 긴 흔적을 남기며 파고들었다.
“……어?”
현상의 눈이 크게 뒤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 미친놈아!”
쿵!
엉덩이를 걷어차인 현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 안에서 검기를 뿜다니! 제정신이냐!”
현종이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해 댔다.
현상은 본인이 더 당황한 듯 입을 벙긋거리며 한철검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장문인……. 정말 내공을 거의 싣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조금 불어넣었을 뿐인데…….”
그때.
쿠릉. 쿠르릉.
현상의 검기에 잘린 벽면이 일순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방 한쪽이 휑하니 뚫렸다.
“…….”
어찌 손쓸 새도 없이 무너져 버린 벽을 보며 현종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눈가에 물기가 고여 들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자 놈들이 공을 벌어오니, 장로 놈이 사고를 치네.
아이고, 내 팔자야…….
현상은 당황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니,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그리고 그 말이 현종에게 기름을 부었다.
“장로라는 놈이 검 하나에 눈이 돌아가서는, 애들도 안 치는 사고를 쳐!”
“그, 그게 아니라 장문사형! 검이…… 이 검이 이상합니다. 이렇게 날카로울 수가 없는데!”
그 와중에도 검에 감탄하는 현상을 보니 속이 타오르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는 현종이었다.
“이리 내 보거라!”
현종이 현상에게서 한철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철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스스슷.
아주 조금 기운을 밀어 넣었을 뿐인데, 검 끝에서 검기가 자라나는 듯이 피어올랐다. 흡사 검이 스스로 검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현종도 결국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이래서 명검, 명검 하는 게로구나.”
사실 명검이라고 해 봐야 그저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날카로울 뿐일 거라 여겼건만, 이건 아예 차원이 달랐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검수들이 왜 체면도 내려놓고 명검에 목을 매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거늘.”
“그거 헛소리예요. 명필일수록 좋은 붓 쓰는 법이죠.
“응?”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현종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필이면 돈이 많을 테니까요.”
“…….”
“좋은 붓 쓰겠죠.”
아…….
그러네.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고수도 마찬가지예요. 고수치고 돈 없는 사람 없고, 돈 많은 사람이 굳이 나쁜 무기를 쓰는 건 그냥 허세죠. 나는 이런 무기를 써도 너희들보다 세다, 뭐 그런 거?”
“…….”
무너진 벽을 멍하니 보던 백천이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거 전에도 들었지만, 너무 과장된 말 아니냐? 내가 듣자 하니, 과거 매화검존께서는 풀잎 하나로 마교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다고 하시던…….”
“어느 미친놈이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려? 매화검은 엿 바꿔 먹었대? 왜 멀쩡한 매화검 놔두고 풀잎을 써? 그런 헛소리 해 대는 놈이 누구야, 대체?”
그러자 백천은 대답 대신 천천히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라가 보니 한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선 현상이 있었다.
“……미안하다.”
“아, 장로님이셨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헤헤.”
사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미친놈이 되어 버린 현상은 조금 서글픈 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청명이 낮게 헛기침했다.
“흠, 여하튼 검은 무조건 좋은 걸로 써야 돼요!”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청명이 놈이 선조께서 남긴 비고까지 파내 가며 검을 만든다고 했을 때는 영 탐탁지 않았는데, 막상 만들어진 한철검을 보고 있자니 이놈이 왜 그리 날뛰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검은 화산 제자들의 실력을 더 높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에 빠질 확률도 줄어들 것이다.
더없이 온화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이…….”
쾅!
그 순간 문 쪽에서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
그리고 반파되다시피 열린 문으로 현영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빌어먹을! 뭔 놈의 회의가 이렇게 길어! 대체 왜 이렇게 질척댄단 말이더냐!”
“…….”
거세게 투덜거린 현영이 냉큼 청명을 발견하고는 환히 웃었다.
“청명이 왔느냐!”
“네, 장로님!”
“그래! 그래, 이놈! 이번에는 또 뭘……. 이거냐?”
현영이 현종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가 들고 있는 한철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옜다.”
그래도 현상처럼 뺏어 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현종은 한철검을 순순히 현영에게 넘겼다.
“오오. 이 빛깔……. 게다가 검신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라니. 허허. 실로 매화검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검이로구나.”
더구나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균형까지, 화산의 검술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내공은 조심히 넣거라. 네 사형이 벌써 벽을 해 먹었다.”
“벽이요? 엄머야? 저거 왜 저래?”
벽을 바라본 현영이 기겁했다. 그러더니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려 현상을 노려보았다
현상은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니나 다를까 현영이 매서운 말이 쏟아졌다.
“돈도 한 푼 못 벌어 오는 양반이!”
“……미안하다.”
“새파란 제자 놈들은 사천까지 가서 돈을 벌어 오는데! 장로란 양반이!”
“……미안하다고.”
“쯧쯧쯧. 에잉!”
현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더니 현종을 향해 말했다.
“장문인. 아이들이 참 큰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지. 참으로 그렇구나.”
“청명아.”
“네.”
“검은 넉넉히 가져 왔느냐?”
“네. 적당히 쓸 만큼은 가져왔어요. 그런데 넉넉하다기에는 좀 애매하네요. 한철이 살짝 모자랐어요.”
“그게 어디더냐!”
현영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광경에 현종도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일이 다 잘 풀리는 것을 보니 그의 마음도 더없이 훈훈…….
“거 그러니까 진즉에 좀 좋게 보내 주면 되지. 그놈의 비고니 뭐니 좀생이처럼 한참을 앓으시더니!”
“…….”
“뭐 그거 남겨서 무덤에 가져가실 겁니까? 사람이 욕심을 좀 버릴 줄도 알아야지! 에잉!”
“…….”
“맡겨서 보내 놓으면 알아서 잘 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청명이 놈이 일 처리 제대로 못 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현종이 고개를 돌려 창밖……. 아니, 뻥 뚫린 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진짜 다 꺼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종의 속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현상과 현영은 희희낙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그래. 고생이 많았구나! 허허허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검을 만들어 왔어.”
“쯧쯧쯧. 얼마나 고된 길이었으면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됐누?”
이제껏 모두 그러려니 듣던 백천의 입가가 움찔했다.
반쪽? 반쪽이요?
저거 두 배 하면 애가 달덩이가 되겠는데요?
오가는 내내 드러누워 먹고 자기만 한 놈인데 뭔 반쪽…….
그때, 청명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던 현영이 청명의 목깃 아래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새하얀 것을 보고 움찔했다.
“이, 이건 또 뭐냐?”
“아, 얘요? 야수궁주님이 선물로 준 거예요.”
“……털 빛깔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비싸 보이는구나.”
“그렇죠?”
현영의 눈에 어린 탐욕을 본 것인지, 백아가 이를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위협했다.
하아아아악!
“어디 버릇없게!”
따악!
하지만 순식간에 청명에게 응징을 당한 뒤 시무룩해졌다. 그러더니 다시 옷깃 안으로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버릇이 없어요.”
“그렇구나. 누구랑은 다르게.”
아니요, 장로님.
정말 비슷한 겁니다. 정말로요…….
현영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흐음? 이건?”
“아.”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맨 암향매화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당가의 장인 분이 선물로 준 물건이에요.”
“…….”
현종과 장로들이 할 말을 잃고 검을 바라보았다.
“……이건.”
특히 현상은 말도 다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격이 다르다.’
당가에서 만든 만년한철검도 명검이라는 이름에 전혀 모자람이 없을 테지만, 저 검이 풍기는 예기는 평범한 한철검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했다.
“잠시 보아도 되겠느냐?”
“네.”
청명이 암향매화검을 순순히 현상에게 넘겼다.
검을 받아 든 현상은 잠깐 내려다보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뽑아 들었다.
“허억!”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검신에, 그는 헛바람을 삼키고 말았다.
“이…… 이런 검이…….”
그의 목소리는 넋이라도 나간 듯했다.
곁에 있던 현영 역시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청명을 향해 멍하니 물었다.
“이런 검을 그냥 만들어 주었단 말이냐?”
“네. 화산에 주는 선물이래요.”
“……화산에게 선물이라.”
현종이 잠깐 청명의 말을 되뇌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구나. 참으로.”
“쓰실래요?”
“아니다.”
청명의 물음에 현종은 딱 잘라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화산에 선물로 주었다지만, 이건 네가 쓰라고 만들어 준 검이구나.”
“음. 그렇긴 하죠.”
“그럼 네가 쓰는 게 맞다. 선물이란 받는 이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선물하는 이의 뜻도 중요한 것이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결정이 났음에도 현상은 쉽사리 청명에게 검을 돌려주지 못했다.
“한 번만 써 보면…….”
그러자 현영이 득달같이 눈에 불을 켰다.
“이리 내놓으십쇼! 다 늙어서 주책은!”
“이, 이놈아! 검수에게 검이 얼마나 중요한데!”
“개 발에 편자지! 개 발에 편자!”
현영은 버럭 소리치며 현상의 손에서 암향매화검을 뺏어다 청명에게 돌려주었다.
“네가 쓰거라.”
“네.”
청명이 씨익 웃고는 검을 허리에 다시 동여맸다. 현상은 몇 번이고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나중에 한 번만 빌려…….”
“거 입 좀 다무십시오! 입 좀!”
“…….”
현영은 고개를 내젓고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눈빛이 거짓말처럼 온화해졌다.
“그래. 정말로 고생이 많았구나. 그래서 다른 일은 없었느냐?”
“아, 일단 유령문은 잘 해결했어요. 은하상단에 상황을 전해 두었으니, 곧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참 좋은 소식이구나.”
“그리고, 어…….”
청명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천당가와 야수궁, 두 문파와 함께 맹을 하나 만들게 됐어요.”
“맹?”
“예. 천우맹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일단은 세 문파지만 더 많은 문파를 받을 거고요.”
뜬금없는 소식에 현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한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겠느냐만,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싶구나. 수많은 대소사를 조율해야 할 터인데.”
“네. 그건 조율하시면 될 거예요. 장문인께서 맹주시니까요.”
“응? 누가?”
“장문인요.”
“……내가 뭐라고?”
“맹주요.”
“…….”
청명을 보는 현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네.”
“……내가 왜?”
안타깝게도……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