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5)
찻주전자에서 흘러내린 가느다란 물줄기가 잔으로 쏟아졌다. 은은한 다향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현종의 눈은 잔 안에서 넘실거리는 찻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던 물결이 이내 잔잔해지며 서서히 평온을 찾아 갔다.
‘화산과 같구나.’
그는 최근 들어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이리 찻물이 차오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찻물을 채우기 위해서는 차를 따라야 하고, 차를 따르면 한동안은 넘실거리고 흔들리기 마련이다.
‘흔들리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다라…….’
긴 세월 동안 다도를 놓지 않고 살아왔건만, 지금에 와서야 차 안에 담긴 세상을 본다.
“세상 모든 것이 도(道)인 것을…….”
현종의 입가에 가만히 미소가 걸리었다.
이 깨달음을 화산의 제자들에게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종이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차 안에 담긴 세상을 깨달았듯, 저들도 각자의 도를 스스로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종의 역할은 그저 저들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가지 않게 지켜봐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차향이 좋습니다.”
현상의 말에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더냐?”
차를 음미하던 현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무슨 맛인지도 몰랐는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도를 논하는지 이젠 조금쯤 알 것 같습니다.”
“여유가 생긴 게지.”
현종이 미소 띤 얼굴로 현상을 바라보았다.
현상은 만인방과의 전쟁에서 중독되어 상한 몸을 최근에야 완전히 회복했다. 몸이 나아져서인지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떠난 아이들이 생각보다 늦는구나.”
“원래 일을 만드는 녀석들이 아닙니까. 시간은 좀 걸려도 큰 사고 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현종은 부드러운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날이 더없이…….”
“아아아아아아악!”
“……청명하구나.”
“그렇습니다.”
두 가지 의미로 말이다. 두 가지 의미로.
밖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에도,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를 음미했다.
“현영이는 뭘 하고 있느냐?”
“오늘 은하상단과 결산이 있는 날이 아닙니까. 소단주를 만나고 있습니다.”
“허허. 현영이 녀석이 일을…….”
“아아악, 관주님! 살려 주십시오! 아악!”
“……하고 있는데, 이리 둘만 차를 마시려니 조금 마음이 찔리는구나.”
“제 일이 따로 있는 게지요.”
현상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놈은 그걸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돈이 들어오는 일인데 그게 어디 일이겠습니까?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는데, 눈이 벌게서 가는 꼴이라니. 쯧쯧.”
그의 말에 현종은 웃어 버렸다.
“그래. 다들…….”
“아아아아아악!”
“열심히…….”
“과, 관주님! 진짜 죽는다니까요!”
“화산을…….”
“아니, 더는 못 한다고요! 아악!”
끝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한 현종은 눈썹을 한차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여니 땅을 벌벌 기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끙끙대며 포복하는 그들의 얼굴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팔다리에 주렁주렁 달린 쇳덩어리들을 보자니 이들이 왜 그토록 소리를 질러 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관주님!”
“살려 주십쇼!”
모두가 바닥을 기는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만이 독야청청 유유하게 걷고 있었다.
“엄살이 심하구나.”
운검(雲劍).
그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복 팔 한쪽이 텅 빈 채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얼마 하지도 않았거늘.”
화산 제자들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운검을 올려다보았다.
“주, 죽는다니까요, 관주님?”
“허허. 그거 아느냐?”
“예?”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는다.”
“…….”
화산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운검이 저렇게 말하니 도무지 농담으로는 들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만인방 사태 때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이 아니던가?
그 당사자가 저리 말하는데, 무슨 수로 반박을 하겠는가?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검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평생 무학을 익혔지만 수련하다 죽었다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러니 안심하거라.”
“…….”
누가 이런 수련을 또 했겠습니까……? 아니, 무엇보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 말을 들으며 안심을 하겠습니까?
예?
제자들은 모두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망연히 운검을 보았다.
“그리고.”
하지만 운검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예?”
“곧 청명이가 돌아온다.”
청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제자들의 얼굴이 일순 파랗게 질렸다.
“생각보다 시일이 지체되는 걸로 보아,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이 많았을 터인데…… 그놈이 돌아와 너희를 보고 생각보다 수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그야…….
‘미쳐 날뛰겠지. 입에 거품을 물고.’
‘상상도 하기 싫다.’
‘망할!’
청명이 놈이 눈을 까뒤집고 날뛰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사람이 명성을 얻으면 좀 변할 만도 한데.”
“어떻게 이리 초지일관이냐, 어떻게.”
수군거리는 제자들을 보던 운검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나는 너희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희를 도와주는 거라 말해야 맞겠지. 청명이에게 수련을 받는 것보다야 내게 받는 게 낫지 않느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운검은 아직까지는 정도라는 걸 아는 사람이니까. 최근에는 좀 넘기 시작한 것 같지만.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것치고는 좀 즐거워 보이십니다?”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지.”
운검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모든 것에는 도가 있다고 하더니, 과연 가르침에도 도가 있더구나. 처음부터 새로 배워 나가는 입장으로 너희를 가르치다 보니 내가 배우는 것도 많다. 하루하루가 새로운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뭔가 거창한 말이지만 해석하자면 제자들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이런저런 요령을 알게 되어 빨리 강해진다는 의미였다.
‘관주님은 저런 분이 아니셨는데.’
‘물들었네, 물들었어. 하나같이 다들 왜 이러냐고.’
화산의 제자들은 차마 흘리지 못할 눈물을 삼켰다.
화산의 변화를 가장 확연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장문인 현종이라면, 화산의 변화를 그 피부로 체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다.
다만 문파가 부자가 되어 가고 명성을 떨치는데도 이들의 삶은 하루하루 고달파지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운검이 문을 열고 선 현종을 뒤늦게 발견하고 깊이 읍했다.
“그, 그래. 고생이 많구나.”
현종은 여전히 땅을 기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제자들의 간절한 눈빛이 현종을 향해 쏟아졌다.
‘장문인!’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관주님이 이상해졌습니다!’
‘저희 이러다가 골병들어요!’
현종 역시 그들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 헛기침을 했다.
“수련을 하는 중이더냐?”
“예. 수련에 몰두하다 보니 장문인의 처소 앞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미처 생각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다른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수련에 장소가 어디 따로 있겠느냐? 화산에서 수련을 할 수 없는 장소 같은 건 없다.”
부드럽게 고개를 저은 그는 운검을 잠깐 보다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수련이 조금…… 내 생각에는 조금 과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예, 장문인.”
제자들의 눈빛에 희망이 차올랐다.
운검은 빙그레 웃으며 현종에게 답했다.
“하지만 수련이란 힘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평소에 해 온 수련이 위기의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만인방과의 전투에서도 느꼈듯이 말입니다.”
“…….”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수련을 절대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크흠, 그래. 그건 그렇지.”
현종의 시선이 잠깐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장문인!’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장문인!’
그는 이내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모든 시선을 외면했다.
‘미안하다.’
어지간하면 도와주고 싶은데, 명분에서 밀린다. 게다가 한번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운검은 묘하게 예전보다 탈속한 느낌이 나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하기가 껄끄러웠다.
“크흠. 그럼 고생하거라.”
“예, 장문인.”
탁.
문이 미련 없이 닫혔다. 화산의 제자들은 더없이 허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자, 장문…….”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운검이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계속하자꾸나.”
“…….”
“장문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아직 힘이 남은 모양이던데, 수련을 조금 추가해 볼까?”
“관주님!”
“잘못했습니다, 관주님!”
통곡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는 화산에는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 죽겠네. 이제는 청명이 놈이 없어도 죽을 맛이야.’
‘예전이 그립다. 진짜 너무 그립다…….’
과거.
청명이 화산에 들어오기 전, 그 평화롭고 소박했던 화산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수난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 그럼 다시 힘차게…….”
쿠르르릉.
“음?”
운검이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쿠르르르릉.
저 멀리 산문이 있는 쪽에서 뭔가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흐음. 온 모양이로군.”
“예?”
“모두 산문으로 가 보자꾸나. 아이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어?”
그제야 화산의 제자들도 산 아래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사형께서 돌아오신다!”
“산문을 열어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부리나케 산문 쪽으로 달려갔다.
길을 떠났던 청명 일행에 대한 환영보다는 잠시라도 이 수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커 보였지만, 운검은 굳이 그런 제자들을 탓하지 않았다.
“사숙!”
“사형!”
화산의 제자들이 더없이 활기차게 산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산문 앞에 우르르 서서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오는 사형제들을 기다리며 환히 웃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쿠르르릉.
“……근데 아까부터 이 소리는 대체 뭐지?”
“그러게?”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반짝.
“큭! 눈이!”
“뭐가 이렇게 번쩍거리……. 아, 머리네.”
마치 수평선에서 찬란한 해가 떠오르는 듯, 언덕 아래에서 동그란 머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혜연 스님!”
“잘 다녀오…….”
환한 웃음으로 그를 반기려던 이들은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며 모두 입을 닫았다.
“하아아아…….”
쿵! 쿵!
혜연이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며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화산의 제자들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혜연 스님…… 맞지?’
‘생긴 건 맞는 것 같은데?’
‘……그새 어디 지옥에라도 떨어졌다 왔나?’
분명 혜연은 혜연인데, 뭔가 그들이 알던 것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처음 길을 떠나던 때의 숫기 없는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두 눈으로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야차만 있었다.
“……그런데 수레 소리인가? 수레라기에는 소리가…….”
“꼭 쇠로 만든 것 같은데?”
쿠르릉. 쿠르릉.
혜연이 완전히 언덕 위로 올라오자 그의 뒤로 커다란 수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동시에 수레를 끄는 백천과 그 일행의 모습도 나타났다.
“…….”
반쯤 걸레짝이 된 옷을 걸치고, 흙먼지투성이로 언덕을 오르는 그들에게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사, 사숙.”
“……잘 다녀오셨습니까?”
모두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혜연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희번덕.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아주…….”
입꼬리가 뒤틀리며 이 가는 소리가 빠드득 울렸다.
“편히 잘 지낸 모양이로군.”
“…….”
아닌데요? 아닌데요?
저희 진짜 열심히 했는데요?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이들 앞에서 할 순 없었다. 이들의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옷의 상태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고단한 여정을 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
“……옷 깨끗한 것 좀 봐.”
윤종이 한마디를 보태고.
“……살판났지, 아주.”
조걸이 뒤를 이었다.
“수련 필요.”
유이설이 두 눈으로 새파란 독기를 뿜어냈고.
“……사형들도 고생 좀 해 봐야지!”
당소소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백상은 말할 힘도 없다는 듯 수레를 놓고 모로 픽 쓰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
환영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 백천이 입을 뗐다.
“우리가 없는 동안 수련은 열심히 했겠지?”
“……무, 물론입니다, 사형!”
“그래?”
그의 눈이 시퍼런 광망을 뿜어냈다.
“그럼 어디 확인부터 해 보자. 마음에 안 들면 그땐 다 뒈져 보자고.”
저…….
사형?
왜 청명이 놈이 아니라 사형이 이러십니…….
“다 왔어?”
그때 청명이 수레 위에서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다.
“아, 배고프다. 밥부터 먹어야지.”
수레에서 뛰어내린 그는 휘적휘적 걸어 유유자적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에는 웬 하얀 담비까지 두르고.
“…….”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렇다 할 잔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저 모습이 더 얄밉지?’
‘그러게요.’
“고개 돌아가지?”
무심코 청명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이들이 백천의 말에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어디…….”
이윽고 씨익 웃음을 내건 백천의 얼굴은 환하고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 미소가 어쩐지 청명이 놈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실력 한번 보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
화산 제자들의 눈에 깊디깊은 절망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