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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49화 (449/1,567)

449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4)

“……끄으.”

앓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백천은 안쓰러운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원래 창백하고 병색이 완연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거의 푸르죽죽하게 죽어, 반쯤 시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병이 악화된 건 아니고…….

“크으으으!”

청명이 쫙 편 손을 싹싹 비비며 낄낄댔다.

다 죽어 가는 임소병과는 달리, 청명은 그야말로 활기가 넘쳤다.

“헤헤. 역시나 녹림왕쯤 되시니까 통이 남다르시네요. 감탄했어요.”

남의 통을 강제로 잡아 늘린 인간이 저런 말을 하니 지켜보는 이들은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속곳 속에 숨겨 둔 비상금까지 모조리 털린 임소병은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녹림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호피가 이제는 되레 임소병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백천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게, 왜 저놈과 얽혀서는.’

비슷할 수야 있지.

죽이 잘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청명 같은 놈이 둘일 수야 있겠는가?

천하를 샅샅이 뒤져 모든 사람을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절대 저런 놈은 둘일 수가 없다. 이건 백천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소병의 실수는 그걸 몰랐다는 점이리라.

“……도장.”

임소병이 원독에 찬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길 바라겠소! 반드시!”

“에이. 그거야 당연한 거죠.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청명이 낄낄대며 웃어젖혔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묘한 서글픔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우리만 당하는 게 아니구나.’

‘녹림왕까지 저렇게 당하는 걸 보면, 우리가 유달리 어리숙한 게 아니었어.’

청명이 놈 앞에서는 천하 만민이 공평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럼 물건은 언제쯤?”

“제가 화산에 가면 따로 보낼게요.”

“끄응. 정말 믿어도 되겠소?”

“에이, 제가 그래도 도산데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도산데…….”

임소병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가 삼킨 뒷말이 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솔직히 이건 화산이 사과해야 한다.’

임소병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주물렀다.

“끄으응.”

그리고 손가락 틈으로 청명을 시뻘겋게 노려보았다.

‘세상에, 도사라는 인간이…….’

녹림왕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벌어들인 돈은 물론이고, 선대에서 넘어온 돈까지 싹 다 털렸다. 게다가 녹채의 창고에 든 것들까지 내다 팔아야 할 판이었다.

“대금……. 대금은 조금 기다려 주시오. 일단 물건들을 처분해야 하니…….”

“아. 그건 제가 따로 사람을 보내 드릴게요.”

“……예?”

청명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상단이 많거든요. 양심적으로 잘 쳐드릴 거예요. 바로 부를까요?”

“야, 양심……. 양심? 쿨럭! 쿨럭! 큭. 가, 가슴이! 쿨럭! 쿨럭!”

임소병이 몸을 뒤틀면서 기침을 해 댔다. 급기야 피를 토하는 그를 보며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쯧. 그러니까 빨리 약 드시고 나으셔야지. 마음이 아프네요.”

“이, 이게! 쿨럭! 누구 때문인데!”

임소병이 눈을 까뒤집고 삿대질을 해 댔다. 이러다간 병이 낫기 전에 화병으로 죽을 판이었다.

‘대체 뭔 놈의 도사가 저렇게 돈독이 올라 가지고!’

돈 되는 일이라면 지옥도 들락거린다는 염상(鹽商)놈들도 저렇게 지독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의 원망에도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자자, 좋게 생각하자고요. 돈이야 또 벌면 되죠. 몸이 우선이죠, 몸이.”

말은 바른 말이다.

저 빌어먹을 놈이 정말 짜증 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는 말 중에 틀린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유 중 두 번째는 그 옳은 말을 저따위로 써먹는다는 거겠지.

“끄윽……. 무, 물!”

“여기 있습니다!”

번충이 잽싸게 달려와 호리병을 내밀었다.

재빨리 병을 낚아챈 임소병은 냉큼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장 몸을 뒤틀며 머금었던 물을 고스란히, 모조리 풉 내뿜었다.

“이거 술이잖아, 이 새끼야!”

“어? 차, 착각했나? 두, 둘 다 준비하다 보니 그만……!”

“쿨럭! 내, 내가 쿨럭!”

백천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러다 죽겠네.’

입가를 문질러 닦은 임소병은 청명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그…… 약속은 지켜 주길 바라겠소.”

“물론이죠.”

청명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녹림왕께서도 약조한 바를 지켜 주세요. 특별히 많이 깎아 드렸으니까.”

“……안 깎았으면 녹림이 아주 파산했겠군.”

임소병이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급하시면 화산으로 같이 가실래요? 거기 가면 바로 내어 드릴 수 있는데.”

“사양하겠소.”

청명의 말에 임소병은 단호하고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요? 정파라서요?”

“화산에 드는 게 껄끄러운 게 아니라, 화산까지 가는 게 껄끄러운 거요. 도착하기도 전에 피 토하고 죽을까 봐!”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신 분이네.”

“현명해.”

“배우신 분이야. 배우신 분.”

저 학창의를 괜히 입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여하튼.”

임소병이 부채를 펴지도 않은 채 휘휘 저었다.

“내 살다 살다 산채에 와서 돈을 털어 가는 이는 처음 보았소. 확실히 화산이라는 이름이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는 이유가 있었네.”

“뭐 보통이죠.”

“끄응. 괜히 엮었어.”

임소병이 후회의 한숨을 내쉬자 청명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무 그렇게 엄살떨지 마세요. 남는 장사 하셔 놓고.”

“…….”

순간 살짝 굳어진 임소병의 얼굴이 움찔했다.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정도만 할게요. 대신 이쪽에서 신경 써 드렸다는 거 잊지 마세요.”

“허허.”

청명의 말에 임소병은 이렇다 할 말 없이 그저 가볍게 웃었다.

“그럼.”

할 말을 마친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약조한 바는 알아서 지킬 거라 믿을게요. 물건은 화산에 돌아가는 즉시 보내 드리죠.”

“도장.”

그러자 임소병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도장은 뭘 하려는 거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하지만 청명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다들 친하게 지내자는 거죠.”

“……정말 그게 전부요?”

청명이 슬쩍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눈빛. 하지만 임소병의 손아귀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꾸욱.

부채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청명이 이내 히죽 웃었다.

“외양간은 미리 고쳐야 하는 법이거든요.”

“…….”

“그럼.”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 나가자 화산의 제자들이 녹림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뒤를 따라 나섰다.

“…….”

임소병은 한동안 말없이 청명이 있던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번충이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빛을 담고 있었다.

‘저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잠시간 보였던 청명의 그 서늘한 눈빛이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드르르륵!

“형님! 정말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번충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수레 위의 청명이 질색하는 얼굴로 귀를 틀어막았다.

“살살 좀 말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목청이 커서.”

“쯧.”

보면 볼수록 야수궁주랑 붙여 놓고 싶어지네.

“도사가 산채에 오래 머무르면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 볼일 다 봤으니 빨리 가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번충은 충심과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더니 거대한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화산까지 모시고 싶지만…….”

“아서라.”

기겁한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도사에 중에 거지까지 있는데, 여기에 산적까지 끼는 게 어디 사람 할 짓이냐.”

그 말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번충은 여전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곧 다시 볼 일이 있을 거다.”

“예, 형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실로 우애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백천과 그 일행은 수레 끌 준비를 하다 말고 흐뭇하게 웃었다.

‘너희들 만난 지 이제 고작 이틀 됐어요.’

‘저 꼴만 보면 뭔 십년지기 같네.’

제 반도 안 되는 크기의 청명을 꼬박꼬박 형님이라 불러 대는 번충이나,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청명이나 범상치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몰려나온 이들도 다들 그 광경에 놀라 수군대고 있었다. 녹립십영 중 하나인 철신장이 화산의 도사에게 설설 기는 양이 낯설면서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홍대광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곧 녹림에 화산신룡의 이름이 쫙 퍼지겠군.’

철신장의 본의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철신장의 순수한 충정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녹림왕. 아니, 이곳에서는 병서생의 행세를 하고 있는 임소병이 휘휘 걸어와 청명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몸 관리 잘하세요.”

“그 전에는 절대 안 죽습니다.”

청명과 임소병이 가볍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말이다.

“그럼 가자! 사숙, 사고, 사형!”

“끄응.”

짧게 앓는 소리와 함께 수레가 천천히 움직여 이내 대호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살펴 가십시오!”

“화산파 만세!”

“화산신룡 만세!”

등 뒤에서 커다란 환호와 배웅이 들려왔다. 수레에 걸터앉은 청명은 대호채의 산적들에게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채주가 산채를 나서는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발을 재촉했다.

수레가 아주 멀어져 가는 걸 보며 임소병은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의 시선은 수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저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람이 찹니다.”

흑야호가 임소병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바람이라…….”

하지만 임소병은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뜻 모를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래, 바람이지.”

“…….”

“바람이 불겠군. 제대로 된 바람이 말이야.”

“화산 말씀이십니까?”

흑야호의 물음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입을 뗐다.

“흑야호.”

“예.”

“사파와 정파가 마지막으로 힘을 합친 때가 언제였는가?”

“그야……. 지난 마교의 발호 때 아닙니까? 그때는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임소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최근 분주히 천하를 누빈다고 하더군.”

“사업을 벌이고 확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파인 우리들까지 끌어들여서?”

“……그야…….”

흑야호가 말끝을 흐렸다. 임소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그런데 저자는 굳이 우리를 불러들였네. 그러더니…….”

그는 다음 말을 삼켰다.

‘내게 혼원단을 준다라.’

사실 혼원단을 주지 않아도 손을 잡을 방법 따위는 수도 없이 많다. 청명이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화산에 혼원단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비록 거금을 뜯어 가기는 했지만, 임소병에게 있어서 혼원단의 가치는 그깟 돈 따위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과 사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끌어모은다. 은혜를 베풀고, 관계를 이어 붙인다.”

임소병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마치…… 다가올 거대한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이 말이야.”

“거대한 무언가라면…….”

흑야호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임소병은 눈을 슬쩍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네.”

“…….”

“다만 한 가지는 알지. 저런 부류의 사람은 당장 보이는 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단 것. 지금이야 실없이 보여도 지나고 보면 그 모든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일세.”

“저 어린 도사가 병서생의 심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린 도사라…….”

임소병은 피식 웃었다.

“범이야 제아무리 사나워도 결국엔 길들일 수 있지. 하지만 용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으니 용 아니겠나. 어린 용이라 해도 다를 게 없지.”

“…….”

“바빠지겠군.”

끝까지 뜻 모를 말만 중얼거린 임소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겨진 흑야호가 그를 다시 불러 보았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임소병의 얼굴은 어느새 확연히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확신이 있다는 건가?’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큰일이 또 벌어진다는, 그런 확신이?

그는 한숨과 함께 나직이 탄식했다.

“비가 내리면 처마 아래로 몸을 피해야지.”

그 처마에 피처럼 붉은 매화가 피어 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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